#111화. 빨리빨리의 나라
<기적>이 최종 스코어 1,250만으로 역대 한국 영화 관객 수 5위를 기록했다.
엄청난 결과에 우리 회사는 연일 축제였고.
경사는 하나 더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 벌어질 경사였다.
바로 <왕국 : 역병의 시작>.
우리는 신서영이 영혼을 갈아 넣은 최종본을 곧바로 컴플릭스에 넘겼다.
몇 개월은 걸릴 줄 알고 마음 놓고 있던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빠른 3주 뒤 넘어왔다.
-대표님! 미쳤는데요?! 수정 사항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처음 듣고는 귀를 의심했다.
-예? 수정 사항이 없다고요?
-네! 지금 회사에서 상반기 기대작이라고 홍보 준비 중입니다! 공개 예정일 빠르게 잡힐 것 같아요!
소피아는 다소 흥분한 듯 보였다.
-원래 수정이 없을 수도 있는 겁니까?
내가 침착하게 묻자 그녀는 들떠서 대답했다.
-전혀요! 오래 걸리는 건 반년도 걸리는 작품이 있는걸요?!
그러면서 그녀는 한 가지 걱정을 내 비췄다.
-그런데 한국 가입자 수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도 적은 편에 속해서 조금 아쉽긴 합니다. 자국민이 많이 봐주고, 그곳에서 화제 됐을 때의 뿌듯함이 또 있잖아요?
그렇긴 하다.
-그럼 저희 쪽에서도 미리 기사 좀 내고 홍보하겠습니다.
-오! 그래 주실 수 있으신가요?! 필요하신 지원은 저희 쪽에서 하겠습니다!
물론 소피아가 한 말은 이참에 한국인들의 가입을 유도하기 위한 영업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넘어가 줬다.
어차피 미래는 컴플릭스로 인해 완전히 변화한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우리나라가 그 변화에 조금 더 일찍 발을 들인다면 분명 앞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자본이 들어오면 그 산업이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까.
또 지원까지 해준다니 우리 쪽에서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소피아와의 통화를 마친 뒤.
오랜만에 핸드폰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렸다.
[장혜리 기자]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한 번의 신호음이 지나가자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어! 대표님! 너무 오랜만이신 거 아니에요?! 유명인 되셔서 저 잊으신 줄 알았어요!
언제나 유쾌한 장혜리의 목소리였다.
*
미국 캘리포니아 컴플릭스 본사.
“보스!! 터졌어요! 터졌다고요!!”
다넬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방으로 쳐들어온 소피아에게 물었다.
“뭐가 터졌다는 거지? 우리 회사에 설마 폭탄이라도?”
소피아는 다넬의 농담에 잠시 흥분했던 마음이 차게 식었다.
“보스. 제발 그런 농담 좀 안 하면 안 돼요?!”
다넬은 고개를 저었다.
“음, 농담이 아니었는데······.”
“하여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반응이 엄청 뜨겁다구요! <왕국 : 역병의 시작> 말이에요!”
그녀는 들고 있던 노트북을 그대로 다넬에게 가지고 갔다.
“이것 좀 보세요!”
노트북 화면에는 컴플릭스 내부 직원들만 볼 수 있는 실시간 시청 그래프가 떡하니 있었다.
“응? 3위이이?!”
그것은 전 세계 컴플릭스 가입자들이 어떤 작품을 가장 많이 보는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그래프였다.
그 3위를 당당히 차지한 것은 <왕국 : 역병의 시작>이었다.
“아니! 내가 오전에 확인했을 때만 해도 순위권에 없었는데?!”
“그게 말이죠!”
소피아는 이번엔 노트북 화면을 바꿔 한 SNS를 보여주었다.
“에이든 브라운이 이런 걸 올렸더라고요?”
<왕국 : 역병의 시작>의 처절함이 담긴 포스터 아래 글이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이거 뭐야?! 컴플릭스에서 최근 공개한 <왕국 : 역병의 시작> 보신 분? 저만 본 거 아니죠?!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제발 보라고 추천합니다. 정말 미쳤어요!! 그리고 컴플릭스 관계자분 혹시 보고 계시다면 시즌 2 빨리 내놓으세요!!]
에이든 브라운은 미국에서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가수였다.
노래뿐만 아니라 그가 하는 건 패션, 사업, 심지어는 뮤직비디오에서 하고 나온 코걸이까지 유행될 정도였다.
“에엥?! 그새 2위로 올랐잖아?!”
“그리고 보스! 하나가 더 있었어요!”
다넬은 순간 뭐가 이렇게 보고받을 게 많은가 싶었는데.
이미 노트북 화면은 다른 그래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거 보이세요?”
수많은 그래프 막대 중 두드러지게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는 한 나라는.
South Korea.
“한국의 가입자 수가 어마어마하게 늘고 있다고요!”
컴플릭스는 편당 결제가 아니며 광고가 일절 없다.
광고로 수익을 올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곳의 매출은 대부분이 유료 가입자에게서 나오기에 신규 가입자 유치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렇기에 한국 드라마의 공개로 늘어난 가입자 수는 이들에게 엄청난 수익 창출이었다.
다넬은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를 고민하더니 결심한 듯 소피아에게 물었다.
“하아, 소피아. 혹시 신바드 대표랑 지금 연락 가능한가?”
“네! 그럼요. 가능하죠!”
“당장 시즌 2 계약 진행하고, 시나리오 나오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체크해 줘.”
그 말에 소피아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시즌 2 집필은 이미 끝났을걸요?”
“뭐어?!”
다넬은 놀랄 새도 없이 순간 잊고 있던 한국인들의 특성이 생각났다.
“과연! 빨리빨리의 나라인가!”
*
<왕국 : 역병의 시작>의 전 세계 공개일은 3월 12일이었고.
오늘은 3월 18일이었다.
[구한말 좀비라니! 이 무슨 해괴한 조합인가?! 싶었던 나 자신 반성해!]
[와 진짜. 신서영 감독님 열일 부탁 좀 드립니다. 거기서 끊으면 어떡합니까 ㅜㅜ]
[이게 바로 한국형 좀비다앗!]
[도대체 컴플릭스랑 계약해서 이런 드라마를 만든 제작사 대표는 누구인가. 싶었는데 또 신바드 대표님이십니까!]
[아라비안필름 그들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인가]
[이게 한국 영화의 미래다!!]
예상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벌써 5년 차 기자였던 장혜리가 자신 주변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 홍보해 준 것이 컸다.
그러나 그녀는 인정하지 않았다.
-아라비안필름 기사라면 쓰겠다고 다들 달려들던데요?! 제가 아니었더라도 <왕국 : 역병의 시작>은 화제가 됐을 거예요. 그래도 나중에 밥 사는 건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런 결과 때문인지 최근 소피아는 시즌 2 계약을 속히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한국 가입자 수가 엄청난 속도로 늘고 있어요! 도대체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이런 엉뚱한 소리도 했었지.
그리고 나는 지금······.
“신 대표님. 저 진짜 열심히 할 겁니다.”
고덕현과 AB렌탈의 건물을 보고 있었다.
공식 오픈이 어느새 내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워낙 인맥이 넓으셔서 무리 없이 홍보했으니 잘 될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진주가 저리도 열심히 하는데 아빠도 제2의 인생을 이렇게도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결혼은커녕 내 아이를 본 적이 없으니 저 기분이 어떤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자신의 딸을 많이 사랑한다는 건 온전히 느껴졌다.
그러자 문득 사진으로만 봤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도 이런 사랑을 받았던 적이 있었겠지.
*
한국호텔 38층 기나키쿠.
고급일식당인 그곳에서도 VVIP를 위한 단 하나의 방.
그 방은 사방이 탁 트여 북한산과 남산타워가 한눈에 들어왔다.
방 가운데에 놓인 고급스러운 원목 원탁엔 배인규와 손두철이 마주 앉아 있었다.
“회장님. 한잔 받으시죠!”
손두철이 양손으로 공손하게 사케 병을 들어 보이자 배인규는 아무 말 없이 자신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조폭 출신이라더니만 하는 행동이 딱 그짝이야. 아직 버릇을 못 버렸어.’
배인규 잔에 사케를 따른 손두철은 얼른 자신의 잔도 채웠다.
“호텔에서 가장 비싼 사케로 가져오라 했는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뭐, 술은 마셔봐야 알지.”
그렇게 둘은 각자의 잔을 쭉 들이켰다.
배인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쁘진 않구만.”
손두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행입니다. 서태원 배우는 신경 쓰시는 일 없도록 저희가 잘 케어하겠습니다!”
‘그래도 그만큼 일 처리는 확실하겠어.’
그렇게 사케 병이 점점 가벼워질수록 그 자리는 무르익었다.
“회장님. 서태원 배우 일이 아니더라도 혹시 처리하기 번거로운 일이나 거추장스러운 놈이라도 있으시면 말씀만 하세요! 저희가 그쪽으로는 전문입니다!”
‘그게 자랑은 아닌 것 같은데.’
배인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눈엣가시들이 떠올랐다.
“크흠! 자네가 그렇게 말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
뭔가 할 말이 있는지 헛기침을 몇 번 더 하던 배인규가 말을 이었다.
“요즘 화분 엔터가 영 신경 쓰이더라고?”
“화분 엔터요?”
손두철은 설마 배인규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뒤를 잇는 이야기에는 웃음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하는 행동들이 다 마음에 안 들어. 뭐 자네들한테 어떻게 하라는 말은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네.”
배인규는 일부러 손두철에게 어정쩡하게 흘렸다.
혹시나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지금 손두철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한번 잡은 이 손을 놓치고 싶지 않을 테지.
“화분 엔터라······.”
손두철은 잠시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하더니 배인규에게 눈을 반짝였다.
“화분 엔터가 요즘 많이 깝죽대고 다니기는 하지요. 또 저희 경쟁사라 몹시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배인규에게 조심히 제안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혹시 저희가 화분을 먹는 건 어떻겠습니까? 회장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배인규가 흥미를 보였다.
“화분을 먹는다?”
“예! 최근에 뭐 이것저것 찌라시가 돌고 있더라고요? 이럴 때 큰 거 한 방 먹여서 아예 회생 불가로 만드는 거죠. 그다음엔 기냥! 저희 쪽으로 흡수?”
배인규는 손두철이 조금 요란하게 설명해서 그렇지 꽤 괜찮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화분 엔터는 아라비안필름과 공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화분 엔터를 NX엔터에서 합병이든 뭐든 하게 되면 아라비안필름도 어떤 식으로든 곤란하게 되겠지.
“그런데 무슨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가?”
손두철은 씨익 웃으면서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그야 당연히 이거 아니겠습니까?”
*
“올해 정직원 채용 공고 계획서입니다.”
예정우가 가지고 온 보고서를 유심히 살폈다.
작년보다 회사 규모는 더 커졌기에 이번에도 팀별로 부족한 인원을 채용하기로 했다.
뭔가 이렇게 서류로 확인하니 정말로 회사가 많이 성장했다는 게 한눈에 보인다.
“알겠습니다. 이력서 검토하고, 면접 보시려면 당분간 바쁘시겠네요.”
“그래도 인력 부족한 것보단 낫죠. 그럼 중간중간 보고드리겠습니다.”
예정우가 나가자 핸드폰이 진동했다.
확인해보니 양상철이다.
“예. 회장님.”
전화를 받았는데 건너편에선 다짜고짜 목적부터 날아왔다.
-신 대표! 다른 게 아니고, 다음 주에 올 거지요?!
순간 다음 주에 뭐가 있었나 싶었다.
“다음 주요?”
-어이구. 까먹고 있었던 건 아니죠? 주주총회 말입니다! 주주총회!
아, 맞다. 그게 다음 주였지.
“까먹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