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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10화 (110/140)

#110화. 돈이 웬수다

“최 팀장님. 잠깐 이야기 좀 괜찮으세요?”

사무실에서 코코아를 호호 불어가며 마시고 있던 최세준을 잠시 불렀고.

내 방으로 들어온 그를 소파에 앉혔다.

“물어볼 게 좀 있어서요.”

“예.”

그는 궁금한 눈치였으나 재촉하지 않고, 내 말을 차분히 들었다.

“혹시 배인규 회장 비서분 말입니다.”

나는 시사회와 승마장에서 본 비서가 궁금했다.

왠지 배인규의 가장 가까운 곳을 지켰을 그녀가 이 사건을 푸는 열쇠일 것 같았다.

“비서가 여럿 있는데, 말씀하시는 분은 아마 김정난 비서실장일 겁니다.”

“배인규 회장과는 오래 일했습니까?”

“예. 20대 중반에 입사했으니까 7~8년은 됐을 겁니다. 개인 비서였으니 수족처럼 시키는 일은 다 했을 거예요.”

보통 직장인들이 한곳에서 오래 일하는 건 둘 중 하나다.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다든가.

어떠한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든가.

대부분 후자인 경우가 많다.

돈이 웬수다.

배인규라는 쓰레기 밑에서 7~8년을 견디고 있다면 김정난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YJ 계실 때 친하게 지내셨습니까?”

“제가 웬만한 직원들하고 잘 지내긴 했는데 김정난 씨는 조금 어려운 감이 있었죠. 아무래도 회장님 비서다 보니까.”

“그럼 뭐, 개인적인 생활 같은 건 전혀 모르시겠네요.”

“아무래도요. 조금 베일에 가려져 있는 이미지랄까? 그랬어요.”

그녀를 직접 만나볼 생각이었으나 그전에 뭔가 힌트라도 있을까 싶어 그를 부른 것인데······.

이러면 무작정 만나봐야 하나.

내가 잠깐 생각에 잠긴 그때.

최세준은 뭔가가 생각난 듯 ‘아!’ 하고 반응했다.

“몇 년 전인가. 한번 회사로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오긴 했어요.”

“이상한 사람들이요?”

“예. 그 막 있잖아요.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사채 쓰면 찾아오는 사람들.”

역시 돈 쪽이 맞았다.

“그때 한바탕 난리가 났었어요. 아버지 죽게 내버려 두고 싶냐고 하면서요. 이걸 까먹고 있었네!”

그것도 지독하게 절실한 돈인 것 같다.

*

김정난은 오늘도 퇴근 후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배인규가 언제 또 자신을 찾을지 모르지만, 전문 간병인은 너무 비싸 오래 고용하지 못한다.

이렇게 저녁에라도 자신이 아버지를 돌봐야 돈을 아낄 수 있었다.

“아빠. 오늘 하루도 잘 지냈어?”

물을 묻혀온 수건으로 아버지의 얼굴과 발, 팔, 다리 등을 꼼꼼하게 닦아준 뒤에야 앉아서 쉴 시간이 생겼다.

아버지 옆에 앉아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는데.

천장만 보고 있는 퀭한 눈과 생기 없는 피부, 며칠째 깎지 못해 까끌까끌한 수염이 눈에 들어온다.

금방이라도 일어나 ‘우리 딸’이라며 자신을 안아줄 것 같지만, 아버지의 시간이 멈춘 지는 10년이나 지났다.

10년 전.

대학생이던 김정난은 부모님, 동생과 함께 여름휴가를 떠났다.

마냥 즐거웠던 가족여행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중앙선을 넘어온 음주 운전자는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엄마와 고등학생이었던 동생은 그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다행히 아버지와 자신은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 가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깨어나지 못했다.

엄마와 동생을 잃은 슬픔에 빠져 산 것이 2년.

그새 사망보험금은 아버지의 병원비로 모두 사용됐고.

2년 뒤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병원비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되어있었다.

YJ E&M과의 인연은 그때부터였다.

당시 YJ E&M 상무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로 자신의 사정에 비서직을 소개해줬다.

졸업은 못 했으나 나름 명문대를 다녔던 이력과 영어 공부를 꽤 열심히 했던 게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엔 배인규 회장 비서실의 막내로 들어가 텃세에 적응해야 했고, 이를 악물며 버텼다.

그렇게 다소 빠르게 인정받아 지금의 자리까지 온 것이다.

하지만 일을 한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지진 않았다.

병원비는 계속 불어났고.

사채까지 손댄 적도 있었으니까.

“아빠. 오늘 점심 메뉴 불고기였다? 엄마가 불고기 진짜 잘했는데, 그치? 거긴 어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혹여나 답답할까 듣지 못한다는 의사에 말에도 옆에서 계속 종알거리던 게 벌써 10년이다.

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수다를 떨고 나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리 종알거려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김정난은 도저히 이 말은 아버지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아 꾹 삼켰다.

‘아빠. 나 이제 버티기가 너무 힘들어.’

괜히 흘리지 않으려고 애쓰던 것이 나올 것 같아 숨을 크게 내쉬었다 뱉었다.

“후우······.”

그때.

지잉-.

지잉-.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이라면 배인규일 확률이 높다.

가뜩이나 요즘 그의 심기가 불편하니 얼른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그런데 이상했다.

성격 급한 배 회장이라면 분명 따다다다 전화한 목적을 말했을 텐데······.

김정난은 깜짝 놀라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아라비안필름 신바드]

‘응? 신바드 대표?’

사업을 하는 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었고.

그는 경쟁사 대표이자 요즘 배인규의 가장 큰 관심사였으니 번호 저장은 필수였다.

상대방도 조금 당황했는지 멈칫하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저 신바드입니다. 잠깐 좀 뵐 수 있을까요?

김정난은 당황스러웠다.

‘이 사람이 나를 왜?’

*

배인규는 흡족한 얼굴로 김정난이 올린 기사들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NX엔터와 전속 계약 맺은 서태원. 첫 행보는?』

『서태원 데뷔하자마자 YJ푸드 전속 모델 발탁』

내심 화분 엔터와의 계약을 원했는데 그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 거절했단다.

그래도 조카의 데뷔를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그놈 말처럼 되는 꼴은 절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화분 배우들이 아라비안필름 영화에 참여를 많이 했잖아. 설마······.’

미심쩍은 기분에 사로잡힌 배인규는 인터폰을 눌러 김정난을 호출했다.

“김 비서. 잠깐만 들어와 봐.”

-네. 회장님.

잠시 후 부리나케 들어온 그녀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요즘 화를 내는 일이 많아서 그런지 빠릿빠릿한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진작 이렇게 할 것이지.’

어쨌든 그녀를 부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화분 엔터에서 어떻게 거절했다고?”

“올해는 배우를 더 영입할 계획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무려 자신이 추천하는 배우인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없던 계획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NX엔터처럼.

그렇다면 이건 분명 돌려서 한 완강한 거절이라는 건데······.

‘그런 짓을 시킬 놈은 그놈밖에 없잖아?!’

배인규는 갑자기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건지.

도저히 가만두고 볼 수 없었다.

며칠 전.

그는 홍보팀에 아라비안필름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를 뿌리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보고받은 내용은 황당했다.

-기자들이 하나같이 쓸 수 없다고 하는 통에······.

돈이라면 영혼이라도 팔 것 같이 굴던 몇몇 기자들도 이번에는 등을 돌렸다.

그에 대한 이유는 더 황당했다.

-한 기자가 지금 국가 영웅 수준인 기업을 어떻게 악의적으로 끌어내리냐고······.

‘뭘 또 국가 영웅까지? 아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박쥐 같은 놈들.’

뭐가 됐든 기사를 직접 쓸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그 뭐야! 댓글 조작하는 알바라도 풀어!!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아라비안필름 대표가 완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던데······.]

└ 뭐라는 거? YJ에서 알바 나왔냐?

└ 지금 누구를 까는 거임? 도대체 이런 짓은 얼마나 받습니까?!

└ 신바드 대표 말하는 겁니까?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인데, 이 사람처럼 진국인 사람 영화판에 드뭅니다!

생각보다 거센 항의에 댓글 알바팀은 그날로 해체됐다.

“김 비서. 홍보팀한테 저번에 시킨 일 말이야.”

김정난은 설마 그 짓거리를 또 하려나 싶었다.

“회장님. 그건 이미-.”

“나 아직 말 다 안 끝났네.”

배인규는 위압감으로 김정난을 짓눌렀다.

“죄송합니다.”

사죄가 이어지든 말든 그의 머릿속엔 시커먼 계략이 가득했다.

“아라비안필름 말고, 화분 엔터 쪽으로 기사 준비하라고 해.”

김정난은 멈칫하다가 이내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으니까 소속 연예인들 마약, 도박 찌라시부터 해서 몇몇 엮어서 스캔들도 좀 내고. 아, 그리고 우리랑 관련된 작품엔 화분 엔터 소속 연예인들 쓰면 투자든 뭐든 아무것도 없다고들 전해. 알았지?”

대충 대기업에 갑질, 횡포 이런 것들이었다.

고개를 한번 끄덕인 그녀는 곧바로 회장실을 나왔다.

‘점점 더 심해지네. 진짜.’

어디까지 치졸해지려나 싶은 정도였다.

8년간 배인규의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해왔지만, 이 이상 범법 행위를 눈감아도 괜찮을지 걱정도 되었다.

‘아, 맞다.’

그녀는 잊기 전에 정장 바지 주머니에 꽂아 놓은 만년필을 조심히 꺼내 ‘달칵’ 버튼을 눌렀다.

잠시 그 만년필을 뚫어지게 보다가 아마도 오늘부터 야근을 시작할 홍보팀에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후.

카페에 앉아 있던 김정난은 초조했다.

‘좀 당황스러워서 약속을 잡긴 했는데, 이제라도 물러야 하나. 회장님이 아시면······. 하아, 나 미쳤네. 진짜.’

그녀는 그래도 지금껏 살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심장이 주체하지 못하며 벌렁거렸으니 말이다.

배인규가 경쟁사 대표.

아니, 그가 가장 싫어하는 신바드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무슨 일인지 그녀는 신바드의 전화가 온 날.

그의 만나자는 제안을 덜컥 승낙했다.

‘왜 그랬지······.’

김정난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당연히 회사에 속을 터놓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답답한 상황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또 그 누군가가 배인규의 폭주를 막아줬으면 하는 마음까지도.

그녀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

이에 대한 갈등은 계속해서 그녀의 안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나저나 올 때가 됐는데······.’

*

며칠 전 김정난은 나와의 만남을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였다.

어쩌면 일이 수월하게 끝날 수도 있겠다.

그녀는 한 카페의 주소와 시간을 알려주었고.

시간에 맞춰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 카페는 한 대학병원의 바로 맞은편이었다.

본능적으로 며칠 전 최세준의 말이 생각했다.

-그때 한바탕 난리 났었어요. 아버지 죽게 내버려 두고 싶냐고 하면서.

저곳에 김정난의 아버지가 있겠구나.

카페로 들어간 나는 그녀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카페 손님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다.

단정하게 묶은 말총머리에 정장 차림.

누가 봐도 환자나 평범한 간병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김정난 비서님?”

다가가서 말을 걸자 그녀가 흠칫 놀란다.

“네. 앉으세요.”

간결한 그 대답에 나는 자리에 앉았다.

“제가 이 시간, 여기가 아니면 따로 만나기가 어려워서요.”

오히려 좋았다.

YJ E&M 로비에서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예. 나와주신 것만으로도 정말로 감사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저를 왜 보자고······?”

“저는 배인규 회장을 무너뜨릴 생각입니다.”

“네?!”

그녀가 왠지 바쁠 것 같아 본론부터 이야기한 것인데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자신이 모시는 회장을 무너뜨리겠다는데, 어느 누가 황당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김정난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의 구체적인 계획을 알려줄 순 없었다.

그저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배인규 곁을 지키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황당하네요. 다시는 이런 일로 연락하지 마시죠.”

내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카페를 나가버렸다.

그래도 의리가 대단하네.

나는 이곳에 오기 전.

최세준에게 YJ E&M에 대한 최근 동태를 살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정말로 잘해줬던 배급팀 사원 한 명에게서 한 가지 소문을 들었는데.

그것은 김정난과 관련된 것이었다.

-김정난 비서가 최근 배인규 회장에게 맞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답니다.

그때.

승마장에서 본 이마의 상처가 생각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자를 때리다니.

미친놈이다.

나는 잠시 카페에 앉아 있다가 그곳을 나선 뒤 아마도 그녀가 들어갔을 병원의 입구로 향했다.

[한길 대학병원]

그 앞에 잠시 서서 바라보다가 뚜벅뚜벅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의 사정을 대략이라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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