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친근한 그 이름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 앞에서 대기하던 줄줄이 사탕 같던 사람들은 김정난의 말에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어떻게 도망갈 수 있겠는가.
김정난이 문을 열자 사람들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이! 미친놈들이! 지금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배인규는 그들을 보자마자 집기들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아주 망신도 국제적 망신이라고!!”
먼저 강 팀장.
“이런 놈을 무슨 팀장이라고! 너! 해고야! 해고! 표절 시나리오 가지고 온 놈은 배급팀이잖아! 대국민 사과를 하든! 그 원작자한테 무릎을 꿇든! 소송 취하해! 그리고 회사에서 나가!”
강 팀장은 뭐가 됐든 나가는 건 똑같은 거 아닌가.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의 짬밥으론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말대꾸를 해서는 안 된다.
배인규의 화가 다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강 팀장이 별 반응 없자 배인규는 다음 타깃으로 넘어갔다.
감독인 이주호.
“너는 영화를 그딴 식으로 만들어 놓고,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이주호는 황당했다.
오라고 할 땐 언제고.
“이 새끼 다시는 내 눈에 안 보이게 치워버려!”
김정난은 밖에서 대기 중이던 덩치 큰 남자들을 불렀고, 그들은 이주호의 팔을 양쪽에서 꽉 붙들었다.
그때 이주호는 오기가 생겼다.
이렇게 끌려 나가 영화판에서 쫓겨나 죽든.
한마디라도 하고 배인규 손에 죽든.
죽는 건 매한가지다고.
“지금 이렇게 내치시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배인규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빨리 안 치워?!”
이주호는 질질 끌려가면서도 바락바락 대들었다.
“너네! 우리 아버지도 이렇게 끌어낸 거지!! 내가 다 밝힐 거야! 알았어!?”
마지막까지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진 않았다.
배인규는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를 마치 벌레 보듯 보고 있다가 김정난을 다시 찾았다.
“김 비서. 오전에 시킨 일은 어떻게 됐어?! 시켰으면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니야!”
그가 시킨 일은 절대 3시간 안에 끝마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정난은 머리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화분 엔터 쪽에서도 위에 보고한 뒤에 다시 연락을-.”
“이것들이! 너도 잘리고 싶어?! 태원이 지금 하루라도 빨리 데뷔시켜야 할 거 아니야!”
“네. 죄송합니다. 빠르게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문드러지는 속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힌 그곳에는 배인규의 호통이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했다.
*
“회장님. 오전에 YJ E&M 배인규 회장 비서의 연락이 왔습니다.”
양상철은 보고서를 훑다가 YJ라는 말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그래? 뭐라는데?”
“배우 한 명을 영입할 생각 없느냐고 하더라고요?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보통은 회장인 양상철이 배우 영입까지 보고받는 일은 없었으나 YJ E&M에 대한 건 모두 빠짐없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다.
“정중하게 거절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거절한 양상철의 태도에 보고하던 남자가 갸웃거렸으나 이내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남자가 나간 뒤 양상철은 얼마 전 자신에게 경고하던 신바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장님. 혹시 YJ E&M에서 배우 영입에 대한 연락이 오면 무조건 거절하십시오.
‘허, 거참. 어떻게 알았을까.’
최근 표절 논란이 있긴 했어도 대기업은 대기업이었다.
YJ E&M의 요구를 들어주면 뒷배가 든든해진다는 소리다.
또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제안을 받지 않으면 그들이 어떤 횡포를 부릴지 몰랐다.
그런데 신바드는 그 제안을 무조건 거절하라고 했다.
-이유가 있습니까?
자신의 물음에 신바드는 또롯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말씀드릴 순 없지만, 이유는 분명합니다. 절대로 받으시면 안 됩니다.
당연히 양상철은 신바드의 뜻을 따랐다.
-알겠어요. 내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젊은 청년은 YJ E&M에서 배우 영입을 제안할 걸 어떻게 알았으며 왜 그리도 거절해야 한다고 확신했을까.
그래도······.
지금까지 신바드의 말을 들어서 나쁘게 흘러간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렇겠지.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얼른 전화부터 해줘야겠네.”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친근한 그 이름을 찾았다.
[신바드 대표]
그리고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
최근 NX엔터의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손두철 대표의 심기가 아주 불편했기 때문이다.
팀장직을 맡고 있던 박홍래는 그 비위를 맞춰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화분 엔터 이 새끼들 윤서 데려가서 잘도 써먹나 보네. 그치? 박 팀장?
동의를 구하는 말투였으나 묘하게 돌려 까는 내용이었다.
-도대체 우리가 그놈들보다 못한 게 뭐냐고. 상장은 우리가 먼저 했는데 말이야? 그치? 주가는 벌써 따라잡혔고오?
손두철 대표의 말은 경쟁사 화분 엔터를 막을 대책의 건덕지라도 찾아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말을 듣지도 않았을 거다.
화분 엔터는 그린 애플을 비롯한 소속 연예인들의 상승가도를 시작으로 성공적인 상장까지 이뤄냈다.
그리고 그 소속 연예인 중에는 자신들을 배신한 임윤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속사를 옮긴 후부터 그녀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날개라도 단 듯 예전 로코 여왕 시절 보다 날아올랐다.
그래서인지 손두철은 임윤서를 뺏긴 뒤로 더욱더 화분 엔터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웠다.
몇 년 전만 해도 NX엔터의 한참 아래라고 생각한 화분 엔터는 이제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으니 손두철의 행동도 이해가 간다.
‘손을 쓰긴 해야 하는데······.’
그때.
핸드폰이 울려댔다.
지잉-.
지잉-.
번호를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다.
누구에게서 언제 어떤 전화가 올지 모르는 엔터 회사에 몸담고 있었으니 박홍래는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건 상대방은 똑 부러지는 여자로 자신의 신분부터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NX엔터 박홍래 팀장님 맞으십니까?
“예. 맞습니다. 누구시죠?”
-배인규 회장님 개인 비서 김정난이라고 합니다.
심드렁했던 박홍래는 순간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배인규 회장님이요? YJ E&M?”
-네.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박홍래는 갑작스러운 날벼락을 맞은 듯했다.
YJ E&M이라면 최근 표절 논란에 휩싸이긴 했으나 이쪽 업계 표절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인가.
대기업인 그들이 손쓸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그리 쉽게 무너질 그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NX엔터는 그들과의 커넥션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접촉해 왔었다.
결과는 항상 그들의 거절이었지만.
거기다 상무나 이사급도 아닌 회장의 다이렉트 연락이라니?
당연히 이 전화는 박홍래에게 간절했다.
“어휴! 그럼요! 만나서 이야기하시는 게 편하실까요?”
2시간 후.
YJ E&M 근처 카페.
그곳은 사방이 막힌 수십 개의 룸이 가득한 카페로 기업 내 고위 관계자들이나 연예인들의 비밀 밀회 장소로 유명했다.
김정난과 박홍래는 짧은 인사 후 서로에게 명함부터 건넨 뒤 자리에 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이번에 빠르게 진행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무슨 일입니까?”
박홍래는 죽으라면 당장에 죽는 시늉까지 할 태도였다.
“배우 한 명 영입할 생각 없으십니까? 아마도 그 뒤는 배 회장님이 직접 봐주실 겁니다.”
박홍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배인규 회장이 뒤를 봐주는 배우라니.
그것도 자신들에게 그 영광을 맡기겠다고?
그러다 도대체 누구길래 그가 직접 나서는 건지 궁금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물을 순 없었다.
설령 그 배우가 배인규의 스폰을 받는 여자일지라도.
아니, 숨겨둔 자식쯤이 되더라도 이 제안은 받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왜 요즘 잘나가는 화분 엔터가 아닌 자신들일까.
“정말로 죄송하지만. 대표님께 전화 한 통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손두철은 YJ E&M의 제안을 아주 흔쾌히 받을 것이다.
대기업과의 커넥션은 언제나 그가 원하던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목에 가시라도 걸린 이 기분은 대표의 확답을 받고 진행해야겠다는 본능을 끌어올렸다.
“네. 그러시죠.”
박홍래는 곧장 복도로 나가 손두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회장님.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는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소상히 보고했다.
YJ E&M에서 화분 엔터가 아닌 자신들을 선택한 이유가 조금 걸린다는 말과 함께.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칭찬은커녕 구박이었다.
-어이, 박 팀장! 진짜로 감 잃은 거야?! 당연히 받아야지! 당장 가서 하겠다고 해!!
*
나는 조용히 책상에 앉아 한 출력물을 읽고 있었다.
금현석은 베를린을 다녀온 뒤 최근 이것을 내게 건넸다.
-<기적> 원작입니다. 블로그 글 취합하고, 그 뒤 내용까지 전부 소설로 정리했어요. 책으로 꼭 출간하고 싶은데 대표님께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학교 다니면서 글은 또 언제 썼는지.
또 내게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는 게 기특해서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재밌어서 재탕 중이다.
영상으로 볼 때와는 다르게 상상을 하면서 보니 색다른 맛이 있었고.
금현석의 묘사가 독자의 상상을 최대한으로 끌어낸다는 점도 한몫 톡톡히 했다.
보자마자 괜찮은 출판사 알아봐서 소개해줘야겠다 싶어 예정우에게 말해둔 상태다.
영화든 드라마든 웹툰이든 흥행하면 원작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진다.
원작과 그 원작을 기반으로 만든 매체는 서로에게 좋은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끊이지 않고, 살아간다.]
벌써 다 읽었네.
‘기적’은 이렇게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재탕이었지만, 처음의 감동과는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한 번 더 읽는 것은 오버인 것 같아 출력물을 책장에 꽂아두고, 잠시 가만히 앉아 있는데 며칠 전 걸려 온 양상철의 전화가 생각났다.
-신 대표. 그때 말한 것처럼 YJ E&M에서 제안이 왔습니다. 당연히 거절했고요.
알고 있었지만, 역시 배인규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에 받쳤을 것이다.
<안전지대>는 최종 스코어 220만으로 한 달 만에 극장에서 내려왔다.
200억의 예산을 퍼부었으니 손익분기점은 약 500만.
절반도 미치지 못한 완전한 폭망이다.
이 수치도 <기적>과의 표절 논란으로 궁금증에 사람들이 보러 가서 나온 것이지.
한 사이트에선 평점이 5점 만점에 1.2점대를 기록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반면 <기적>은 개봉한 지 2달 반이 지났으나 아직도 상영 중인 곳이 있었다.
사실 1,000만은 얼마 전 지났고, 지금은 과연 얼마까지 기록을 갈아치울 것인가.에 이목이 쏠린 상태였다.
이런 상황이니 배인규는 서태원의 데뷔만이라도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내가 서태원은 배우의 길이 맞지 않네, 어쩌고를 시전했으니 말이다.
어디 한번 볼까나.
화분이 아니라면 결국 그곳이겠지만.
핸드폰을 열어 서태원을 검색했다.
그러자 역시 눈에 들어오는 기사들이 보인다.
『신예 서태원, NX엔터와 전속 계약』
『영화계 떠오르는 배우 서태원, NX엔터行』
이제 막 기사를 뿌리기 시작했는지 몇 개 없었다.
그나저나 떠오르기는 개뿔.
그대로 심해까지 가라앉게 해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