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07화 (107/140)

#107화. 따뜻한 겨울

-신 대표님. 제가 잘 못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막말로 지금까지 잘 살다가 폭로하는 놈들이 나쁜 놈들 아니에요?

서태원.

학창 시절 학교 폭력의 업보를 주변 사람 모두에게 피해로 돌려주었던 남자.

나는 그 때문에 20억이란 빚을 졌고.

<어드벤처>는 세상으로 나오지도 못했으며.

젊은 날의 고생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이 미화된다지만.

그때의 감정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내 입에서 그 이름을 꺼내니 기분이 이상할 뿐이다.

그리고······.

-그래. 태원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번에 바로 군대 보낼 테니까 개봉은 태원이 다녀오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자고.

<어드벤처>의 배급을 맡았던 YJ E&M 회장 배인규는 서태원의 삼촌이었다.

서태원은 배인규 여동생의 아들이었고.

그의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떠난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배인규가 서태원을 더 끔찍이도 아꼈고.

배우의 꿈을 가지고 있던 서태원은 20살인 올해 데뷔한다.

데뷔 후 그는 YJ E&M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쑥쑥 성장하게 된다.

10년 뒤 학교 폭력 논란이 터지기 전까지는.

“나는 내 조카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물었네.”

배인규 입장에선 지금의 상황이 이상하기만 할 것이다.

자신의 조카 이름을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으니까.

“어쩌다가 알게 됐습니다. 조카분이 배우를 꿈꾸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자네 지금 혹시 가족으로 협박하려는 건가?”

“설마요. 아까 표절을 알았을 때 왜 바로 알리지 않았냐고 하셨죠? 그래서 이번에는 알려드리겠습니다.”

“도대체 뭘 말인가?”

“회장님이 아실지 모르겠으나 서태원 씨의 학창 시절은 엉망입니다. 그리고 이제 배우의 인성은 재능보다 중요한 시대가 올 겁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으시겠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게 될 테니 지금이라도 다른 일을 시키시죠. 물론 그 인성이 어디 가지 않겠지만.”

배인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콧방귀를 뀌기 시작했다.

“하, 이제야 알겠구만.”

전생에서 본 적 있던 비릿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걸렸다.

“자네······. 그 제목이 뭐더라. <기적>? 그것도 그 블로그 글 표절한 거지?”

이건 또 뭔 신박한 소린지.

“그러다가 자네들은 <안전지대>를 알게 됐어. 그래.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에게 말할 수 없었겠지. 그럼 영화는 자네 쪽에서 포기해야 했을 테니까.”

알고 보니 배인규가 소설을 잘 쓰네.

직접 시나리오를 쓰는 편이 나았겠다.

그는 상상의 나래를 더욱 펼쳤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디선가 태원이가 배우를 준비한다는 것과 과거 이야기를 들은 거지. 그걸로 날 협박해 영화를 포기하게 할 생각이었을 테고. 어때? 딱 맞추지 않았나?”

그래. 마음껏 생각하고 판단해라.

나는 경고했으니까.

“혹시 약주 하셨습니까?”

“뭐?!”

그가 발끈하길래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야기할 가치도 없다.

“뭐, 맘대로 생각하십시오.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서로의 뜻은 이제 잘 알지 않았습니까.”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나 보다.

“그래. 자네도 어디 한번 하고 싶은 대로 해보게. 나는 개봉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배인규에게 피식 웃어 보이곤 뒤돌아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나를 보며 웃고 있던 그의 뒤로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

2주 후.

[한국 영화계도 발전 진짜 많이 한 듯. <기적> 보는데 위화감 하나도 없었어요!]

[이거 아라비안필름 영화잖아요. <망자와 함께> 찍으면서 얻은 CG 노하우란 노하우는 다 퍼부었을 겁니다.]

[여러분 <기적>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 진짜 재밌습니다. 이게 재난 영화면서 사람 심리 묘사가 굉장히 디테일해요! 그냥 오락영화가 아님!]

[너무 실감 나게 잘 봤습니다! 이거 꼭 극장 가서 보는 거 추천이요!]

[도건우는 진짜 아라비안필름 만나면서 인생 연기 펼치는 듯. 캐릭터가 너무 잘 맞아요~]

[아라비안필름 대표가 촬영 감독 할리우드까지 가서 데리고 왔다길래 유난이다 싶었는데 보고 감탄했습니다!]

전작들의 영향인지.

시사회 반응이 좋아서인지.

<기적>의 스코어는 개봉하자마자 쭉쭉 올라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또 빠르게 지나고.

“대표님! 첫 주 스코어 나왔어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헐레벌떡 문을 여는 사람은 예정우였다.

“근데 완전 초대박!!”

정말 회귀하고 볼 일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초대박이라는 말을 들을 때가 다 있고.

“얼마 나왔습니까?”

“놀라지 마세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소리쳤다.

“250만 나왔어요!!”

지금까지 첫 주 스코어 중 최고 성적이다.

아라비안필름은 꾸준히 성장한 것이다.

소위 초대박이 난 <기적> 덕분에 사무실에 한바탕 난리가 난 후 나는 다시 <기적>의 댓글들을 확인했다.

그런데.

아까 보지 못한 한 댓글이 눈에 띄었다.

[근데 YJ에서 홍보 오질라게 하는 <안전지대> 왠지 <기적>이랑 비슷하지 않습니까? 나만 이렇게 느끼나?]

*

이주호는 편집실에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곳에는 <안전지대> PD, 촬영 감독, 편집 기사 등등의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는데.

결말이 없는 고민을 하느라 모두가 지친 상황이었다.

“이 이상 뭘 어떻게 더 고칩니까······.”

촬영 감독은 담배라도 피우고 오겠다며 편집실을 나섰다.

“감독님. 광화문으로 걸어가는 장면은 <기적>이랑 비슷해도 너무 비슷하잖아요. 더 괜찮은 아이디어 없으세요?”

이주호는 PD에게 쌍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면전에다 할 수는 없어 속으로 퍼부었다.

“애초에 같은 글인데 어떻게 더 다르게 만듭니까.”

PD는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중얼거리며 자신도 바깥바람 좀 맞고 오겠다며 나가버렸다.

편집 기사는 페이를 더 받긴 했으나 이 짓거리를 언제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지 똥을 제대로 밟은 표정이다.

거기 모인 모두가 이런 얼굴이었으나 이주호는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나 알아?!

배인규 회장에게 불려간 날.

자신을 포함한 <안전지대>의 PD, 배급팀의 강 팀장은 먼지 한 톨 안 나올 정도로 탈탈 털렸다.

-도대체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냐고!! 이번 일 해결 못 하면 여기 있는 모두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들 해!!

그날 이주호는 배인규 회장을 실제로 처음 봤다.

평소 언론에서 봐왔던 온화하고, 능숙하고, 인자하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특히 너! 감독이고, 나발이고! 다시는 이 판에 발도 못 들이게 해줄 테니까! 어떻게든 해결해!!

‘어디 한적한 산에 묻어버릴지도 몰라.’

배인규의 재력과 권력이면 자신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장면을 지웠다가 넣었다가.

컷 순서를 바꿨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가.

<안전지대>는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 했으나 <기적>을 뛰어넘기는커녕 그 발톱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산에 묻힐 수도 없는 노릇이다.

“광화문 걸어가는 장면은 지우죠. 그냥.”

비슷하면 지우면 그만이다.

이주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자신의.

아니, 자신이 표절한 <안전지대>의 내용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또 너무나 많은 내용을 바꾼 탓에 판단력이 흐려질 때로 흐려진 상태였다는 걸 말이다.

*

“씨발! 아니 무슨 소송을 걸겠다는 놈들이 이렇게도 많아!!”

배급팀 강 팀장은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뒤숭숭한 회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소송들이 너무나도 거슬렸다.

<안전지대>는 아직 개봉도 못 했는데 YJ E&M이 최근 휘말린 소송은 3건이나 되었다.

첫 번째로.

처음 배인규의 지시로 시나리오를 찾을 때 YJ E&M 직원들은 큰 실수를 했는데 그것은 바로 무차별한 계약.

그때 YJ E&M과 계약한 시나리오 중 영화화가 진행 중인 건 <안전지대> 외에는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러자 영화가 제작될 줄 알고 기다리던 작가들이 참고 참다가 들고일어난 것이다.

계약금을 준 뒤로 깜깜무소식이라는 작가들의 사정이 협회에 들어갔고.

이 소식을 접한 작가 협회에서 소송을 걸어왔다.

두 번째로는.

몇 개월의 고생을 같이 나눴던 <안전지대>의 현장 스태프들.

그들은 매 회차 오버 됐던 촬영 시간을 계약 위반이라며 노동청에 신고했다.

“아니, 이거 PD가 잘 정리했다고 안 했어?!”

옆에서 보고 중이던 배급팀 과장은 ‘그런 줄 알았는데-.’를 시작으로 변명을 늘어놨다.

그는 최세준 밑에 있던 놈으로 급하게 과장으로 승진한 탓인지 영 일 처리가 흐리멍텅했다.

“아, 됐고! 마지막은 뭔데!”

과장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소송은.

결국 합의하지 않은 무술 팀장.

그는 YJ에서 내민 합의서에 사인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사고를 산재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YJ E&M에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로 그는 곧장 법원으로 간 모양이다.

강 팀장은 딱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배인규는 위에서 계속 쪼지.

이주호는 매일 밤 전화해서 편집 방향을 묻지.

여기저기서 소송은 계속 터지지.

또 개봉 준비까지.

이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개봉이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배인규는 개봉일부터 물어왔다.

그래서 얼떨결에 말한 날짜는 이제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강 팀장은 쎄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내가 다 독박 쓰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의 합리적인 의심은 어딘가로 도달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에이, 설마······.’

*

딸랑-.

딸랑-.

“이웃과 사랑을 나눕시다.”

빨간 냄비 옆에서 종을 흔들고 있는 남자와 여자가 보이길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 있던 10,000원짜리 지폐 5장을 냄비에 쏙 넣으니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따뜻한 겨울 되실 겁니다.”

“고생하십니다.”

둘에게 인사를 하고,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바로 옆 극장으로 들어갔다.

마침 영화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입구로 몰려나왔다.

나는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와, 이거 200억짜리 영화라고 안 했어? 이럴 거면 그 돈 저기 구세군에 넣은 게 더 의미 있겠다.”

“아, 미친! 광고 겁나 하길래 재밌는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돈 아까워!”

“이병용이랑 송소리 어떻게 해. 내가 배우면 필모 지우고 싶을 정돈데?!”

“자기야, 화났어? 아니, 나는 자기가 <기적> 재밌다고 하길래 이것도 좋아할 줄 알고······.”

그리고 그들의 맨 뒤에 있던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두 명.

“근데 이거 완전 <기적> 짭 아니냐?”

“너도 느꼈음? 개 똑같은데?”

“너무 웃긴 건 이렇게 똑같은데 재미는 왜 존나게 없는 거냐고!”

“그러니까!! 송소리 누나 어떡함!!”

“뭘 어떻게 해.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님.”

그들이 지나치자 나는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금 작가님. 통화 가능하세요?”

-그럼요! 뭘 하고 있긴 했는데 괜찮습니다!

금현석은 <안전지대>의 개봉에도 전혀 데미지가 없는 듯했다.

“이제 슬슬 터뜨리려고 하는데요.”

내 말에 전화기 너머에선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저는 준비됐습니다! 다 부숴버립시다!!

그렇게 곧 터질 폭탄은 던져질 준비가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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