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마지막 기회
“김 비서! 이 내용을 몰랐다는 게 말이나 되나?!”
배인규는 최근 이상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배 회장? 내가 오늘 말이야. 어떤 시사회를 하나 다녀왔는데-.
자신이 잘 되는 꼴은 절대 못 보던 김 회장의 연락이었고.
그 전화로 배인규의 속은 한바탕 뒤집혔다.
김 회장이 최근 본 한 영화가 자신이 항상 입버릇처럼 자랑하던 <안전지대>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
그는 설마 했지만.
‘참고’했던 블로그 글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김 비서에게 얼른 상황을 알아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김 비서가 가지고 온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기적>이라는 그 영화는 <안전지대>의 내용과 거의 흡사했다.
‘참고’ 사실을 알게 된 후.
<안전지대>는 등장인물 이름부터 수정했다.
이주호가 블로그 글의 이름까지 그대로 ‘참고’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영화의 등장인물 이름은 자신들이 수정하기 전.
즉 블로그 글과 같았다.
또 내용이 거의 흡사하다고 한 것은 영화 속 상황이 같더라도 해결 방법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다.
같은 듯 다른.
다른 듯 같은.
두 영화는 딱 뭐라고 정의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이 영화가 아라비안필름의 영화라는 것.
“죄송합니다!”
김 비서는 무릎을 꿇고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유능한 줄 알았던 자신의 비서가 이토록 보기 싫은 적도 없었는데.
배인규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같은 소스로 영화를 찍고 있었는데!! 몰랐냐고!!”
그는 책상 위에 있던 재떨이를 김 비서에게 던져버렸다.
날아간 크리스털 재떨이는 김 비서 머리에 퍽! 하고 맞아버렸다.
그녀의 머리에선 한 방울, 두 방울 피가 맺히더니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김 비서는 그래도 무릎을 펴고 일어날 수 없었다.
“이 변호사는?! 어딨어! 오고 있는 거 맞아?!”
이 변호사는 YJ E&M의 고문 변호사로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에 달려오는 중이었다.
“네! 지금 오고 있습니다!”
그는 얼굴을 와득 구기고는 생각에 빠졌다.
‘신바드. 이놈이 아주 나를 대놓고 망신 주려고 한 거잖아. 캐리엔터로 넘어갈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놈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통은 자신들의 ‘참고’ 사실을 알았다면 직접 찾아와서 협박이든 회유든 뭐라도 했을 텐데 이놈은 뭐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대비할 시간도 없었던 거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진행했나.’
고작 블로그 글이라길래 아무 죄책감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고작 블로그 글이 아니다.
아라비안필름과 캐리엔터가 따라붙어 덩치가 커져도 너무 커졌다.
그러나 그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YJ E&M 배인규였다.
‘아직 시간은 있다. 지금도 완전히 같은 게 아니니 편집으로 만져볼 수 있을 거야.’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던 김정난의 얼굴은 어느새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뭐 맞았다고 시위라도 하는 거야?! 꼴도 보기 싫으니까 빨리 나가! 나가서 이 변이랑! 이주호랑! 거기 PD! 싹 다 데리고 오라고!!”
“네. 알겠습니다.”
김정난은 맞은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다리가 저려 왔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탁-.
그렇게 회장실을 나온 그녀는 문 앞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
“어? 김 비서 누나! 삼촌한테 맞았어요?? 허얼. 샥샥 피했어야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낄낄 웃고 서 있는 남자는 배인규 회장의 조카 놈이었다.
“지금 회장님이 화가 많이 나셔서-.”
“뭐래? 삼촌은 나한테 화 안 내요~ 김 비서니까 맞고 그러는 거지.”
그러더니 조카 놈은 노크도 없이 회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삼촌! 나 왔어요! 또 무슨 일이래요?! 삼촌 화나게 한 사람 다 나오라 해! 내가 혼내주게!!”
놈의 말처럼 배인규의 목소리는 자신을 대할 때와는 180도로 달라졌다.
“어이구! 우리 태원이 왔어?! 일은 무슨! 아무 일 없다. 그래? 연기는 배워보니 어때? 재밌어?”
살가운 배 회장의 목소리는 회장실 문이 닫히면서 더 들리지 않았다.
김정난은 긴장이 탁 풀려 터덜터덜 걸었다.
비서들이 모여있는 곳까지 걸어가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어머! 실장님! 괜찮으세요?!”
“피 좀 봐! 어디 좀 봐봐요! 이거 꿰매야겠는데요?!”
“병원부터 다녀오세요!”
그러나 그녀는 이런 비상사태에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이따 퇴근하고 가면 돼. 우선 나 지혈만 하고 올 테니까 이 변호사님 도착하시는 대로 안내해드려.”
김정난은 이주호와 PD한테도 연락을 직접 돌린 뒤에야 직원 탈의실로 향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직원 탈의실에 걸려있던 거울을 빤히 보았다.
“하아······.”
한숨을 한 번 크게 쉰 뒤 가지고 온 구급함에서 소독솜을 꺼내 들었다.
피를 닦아내려는데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상황이 해결되지 않았다.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배 회장을 볼 수는 없으니 꾹 참았다.
피를 다 닦아내고 확인한 오른쪽 이마는 살짝 찢어져 있었다.
소독약을 묻히니 쓰라려 온다.
대충 밴드를 붙였지만, 금세 피가 묻어 나왔다.
“흉지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왜 이러고 사나 싶어 힘이 쭉 빠졌다.
‘그만둘 수도 없고. 진짜.’
김정난은 돈이 필요한 집안 사정 때문에 품속에 사직서를 꺼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온갖 수모를 묵묵히 견뎌온 그녀였지만.
최근 배 회장의 히스테리는 심해도 너무 심했다.
‘하아. 병원비만 아니었어도······.’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가지고 온 구급함을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
지금의 상황은 오롯이 자신이 견뎌내야 한다.
그렇게 구급함 뚜껑을 닫고 나가려다.
그녀는 문득 그것이 생각났다.
몸을 돌려 자신의 개인 사물함으로 향했고.
사물함 문을 열어 핸드백 가장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USB.
‘그래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는 나도 그냥은 못 나가지.’
USB는 다시 그녀의 핸드백 안으로 쏙 몸을 숨겼다.
김정난은 자신에게 남은 보험을 확인하니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는지.
조금은 씩씩해진 뒷모습으로 탈의실을 나섰다.
*
『이번엔 재난 영화다! 아라비안필름의 쉬지 않는 행보』
『한국형 재난 영화의 표본! <기적> 시사회 호평 이어져』
『의례적인 평론가들의 단합! 그 어려운 걸 해낸 <기적>』
『거장 노흥기 아직 죽지 않았다. 노장의 예술혼은 이제 시작이다!』
<기적>의 시사회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기사들이 쏟아졌다.
개중에는 이런 기사도 있었다.
『올겨울 대격돌 <안전지대>와 <기적>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
장르가 비슷한 <기적>과 <안전지대>를 대놓고 비교해 이슈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어그로성 기사였다.
그래. 많이 많이 써서 올려라.
이런 기사는 우리에게 차곡차곡 도움으로 쌓일 뿐이다.
그나저나 연락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지금쯤 YJ E&M에서는 <기적>의 내용을 알아챘을 테지.
만약 아직 모르고 있다면 대기업 명함 내려놔야 한다.
어쨌든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애를 태우고 있을 것이다.
<안전지대> 후반도 거의 끝났을 테니까.
내가 먼저 그들에게 연락할 필요는 없다.
원래 목마른 놈이 우물 파는 법이다.
나는 천천히 여유롭게 그들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늦어도 너무 늦는 거 아닌가?
무슨 고민을 그리도 많이 하는 건지.
아니면 자존심 싸움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그들의 반응은 영 도착하지 않았다.
그때.
지잉-.
지잉-.
정 PD에게 물어 저장해둔 배인규 회장 비서의 연락처가 화면에 떴다.
여기도 양반은 못 되는 사람이네.
목소리를 한번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드디어 배인규를 만날 시간이 온 것이다.
3시간 후.
우리가 만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당장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물었고.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그와의 독대는 꼭 필요했으니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 그곳으로 향했다.
배인규가 나를 부른 곳은 경기도의 한 승마장.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주차장에서부터 나를 기다리던 비서는 오른쪽 이마에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상처가 난 듯했으나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럴 분위기도 아니라 조용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나를 승마장 옆 건물로 안내했고.
엘리베이터로 태운 뒤 가장 높은 층인 5층을 꾹 눌렀다.
잠시 후 띵동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곳은 모든 벽면이 통유리로 둘러싸인 곳으로 배인규 회장의 개인 공간인 것 같았다.
“내리시죠.”
비서와 함께 내리자 고급스러운 마감의 테이블엔 차를 마시고 있던 배인규가 보였다.
“회장님. 모셔왔습니다.”
배인규는 한차례 말을 타고 온 뒤였는지 승마복을 착용한 모습으로 테이블엔 모자가 올려져 있었다.
“앉게나.”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후 3시의 햇빛이 가득 찬 그곳을 걸어 배인규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내 인사에도 그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내가 오늘 자네를 왜 불렀는지는 알겠지.”
성격 급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예. 표절을 인정하시려는 거 아니십니까?”
배인규의 떨떠름한 성가심은 불쾌함으로 빠르게 변화했다.
“표절이라니?”
나는 별 반응 없이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의 저작물 일부 또는 전부를 몰래 따다 쓰는 행위를 표절이라고 합니다. 회장님.”
그러자 애써 빼고 있던 점잔을 더는 유지하지 못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인정하지 않으시길래 뜻을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의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 난리가 났다.
“말장난할 생각하지 말고! 도대체 원하는 게 뭔가!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YJ에서 <안전지대> 표절을 직접 인정하세요. 그럼 저희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걸 알았지만, 나는 그래도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자꾸 표절, 표절 거리는데 증거라도 있나?!”
역시 인정하지 않고, 발뺌할 줄은 당연히 알았지.
“증거요? 저는 <안전지대>가 개봉하는 순간 준비해 둔 모든 증거를 내놓을 겁니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나?”
“믿고, 안 믿고는 회장님 자유죠.”
지금 배인규의 머릿속은 곧 터질 듯 팽팽히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물론 표절을 한 당사자의 잘못이 가장 큽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는 분명 영화 제작 중에라도 표절을 보고받으셨을 겁니다. 그때 중단하셨습니까?”
“그건!”
“오는 길에 <안전지대> 개봉이 한 달 뒤라는 기사를 봤으니 그건 아니겠죠.”
배인규는 답답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러는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정말로 그 ‘참고’ 하나 때문인가? 막말로 자네가 쓴 글도 아니잖아. 혹시 돈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돈이 아예 개입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안전지대>의 표절 논란으로 이슈까지 챙긴 뒤 <기적>을 흥행시키면 수익을 챙기는 건 아라비안필름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주된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혹시 조카님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배인규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무슨 말을 계속 되풀이해줘야 알아듣는 건지.
“서태원은 잘 지내냐고 물었습니다.”
방금까지 분노하던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작게 내뱉었다.
“자네가 내 조카 이름을 어떻게······”
어떻게 알긴.
절대 잊을 수 없는 놈이니까 아주 잘 알지.
지금도 생각하면 역겹고, 분하고, 핏대가 거꾸로 솟는 듯한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뱀 같던 눈으로 나를 깔아 보던 배인규.
그 옆에서 희희낙락 웃고 있던 서태원.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많이도 비교된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사셨습니까?”
이 버러지 같은 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