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천만 영화 제작사
“특효팀! 피탄 준비 얼마나 걸립니까?!”
“10분! 아니! 8분이면 됩니다!”
성당 세트장 내부를 가득 메운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의 촬영은 <처단자>의 초반부인 결혼식 장면.
평범한 결혼식이었다면 돈이 많이 드는 세트까진 짓지 않고, 로케이션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총을 난사하는 장면이기 때문에 온갖 벽과 바닥에 구멍을 뚫을 것이고, 피 칠갑을 해야 한다.
이런 장면을 진짜 성당에서 찍을 순 없었다.
“윤서 씨. 그거 안 아파요?”
지금 특효팀은 성당 씬에서 출연하는 배우들 몸에 피탄들을 장착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피탄은 화약과 인공 피 액체를 품은 작은 주머니인데.
이걸 촬영 전에 솜 같은 쿠션과 함께 배우들 옷 속에 장착한다.
특효팀은 촬영에 들어가면 공포탄이 발사되는 순간에 맞춰 피탄 주머니를 터뜨리고, 총을 맞아 피를 쏟는 것 같은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어 단연 돋보이는 임윤서는 고진주와 미리 이야기된 왼쪽 허벅지, 복부, 심장까지 피탄을 장착한 상태였다.
“이거 웨딩드레스 오늘 3벌 밖에 없대요. 3번 안에 오케이 안 나면 의상팀 죽어납니다. 제가 아픈 게 대수겠어요?”
오, 이제는 현장 스태프 걱정까지 하고.
임윤서는 정말 많이 유해졌다.
사실 피탄은 그렇게 아프지 않다.
직접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화약이라고 하면 아주 위험하거나 아프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애초에 화약이 아주 소량이고, 쿠션이 있어 툭툭 건드리는 정도이다.
그럼에도 내가 임윤서에게 고통을 물은 것은 고생 중인 우리 주연배우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윤서 씨. 직업정신이 정말 투철하십니다!”
“어머? 저 임윤서예요! 직업 정신하면 또 저 아니겠어요?”
그녀가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칭찬이 뭐 별건가.
이렇게라도 그녀가 힘을 받는다면 백 번도 더 해줄 수 있다.
“사실 피탄은 이제 별 감각도 없어요.”
<처단자>는 크랭크인 날부터 피탄 전쟁의 시작이었기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그때.
“윤서 씨! 잠시만요!”
멀리서 고진주가 임윤서를 불렀다.
급하게 상의할 내용이 있나 보다.
“그럼 대표님! 저 촬영 때 꼭 자세히 보세요!! 진짜 연습 많이 했으니까요!”
하며 고진주에게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래도 그녀가 힘든 만큼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잠시 후 시작된 촬영.
조감독의 신호가 주어지자마자 주례를 맡은 신부님 역할의 출연자가 입을 연다.
“신부는 맹세합니까?”
임윤서가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입 모양이 ‘네’를 만들고 있는 사이.
쾅-!
성당 문이 활짝 열리고.
타앙-!
총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임윤서 왼쪽 허벅지에 장착되어 있던 피탄이 터지고.
하얀 드레스는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꺄아악!!”
성스러운 성당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10명의 하객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탕탕탕-!
타앙-!
탕탕-!
특효팀은 순서에 맞게 피탄을 터뜨리느라 몹시 분주했고.
출연자들은 리허설 때와 마찬가지로 실감 나게 쓰러졌다.
바로 눈앞에서 봐서 그런지 더 실감 났다.
“안돼!”
임윤서가 소리치며 옆을 돌아보자마자.
타앙-!
남편 역할 출연자 뒤통수의 피탄이 터지면서 피가 흩뿌려졌다.
모두가 목숨을 잃은 꿈과도 같은 상황.
임윤서는 그 상황을 온 얼굴로 표현했다.
-컷!
그때 현장에서 대기하던 조감독의 무전기를 통해 울려 퍼지는 고진주의 목소리.
-오케이. 다음 씬 준비합시다.
“오케이입니다! 연결 유지해주세요!”
의외(?)의 결과에 옆에서 깨끗한 웨딩드레스를 들고 있던 의상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 장면을 다시 가게 되면 흩뿌려진 피를 다 닦아야 했던 제작팀, 연출팀의 표정이 모두 밝다.
이 장면은 고진주가 공을 많이 들이던 장면이었다.
그래서 웨딩드레스도 3벌이나 준비해달라고 한 것인데 이렇게 한 번에 오케이가 난 것이다.
고진주도 기분이 좋았는지 곧이어 이런 무전이 들려왔다.
-그런데 저희 합이 너무 잘 맞는 거 아닙니까?
*
“와! 대박! 지금 45,100원이에요!”
화분 엔터가 상장했다.
오전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상장기념식과 함께 43,000원으로 시작해 오후 1시가 넘은 지금 시각에는 나경의 말처럼 45,100원까지 올랐다.
“근데 화분 엔터 다들 사셨어요?!”
나는 뜨끔했고.
박지연과 눈이 마주쳤다.
아라비안필름의 법인 명의로 주식을 받은 것이기에 회계팀장인 박지연에게는 알려야 했다.
아직 모두에게 알릴 때는 아닌 것 같아 조용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자 박지연은 이내 눈길을 모니터로 돌렸고, 다시 업무를 시작한다.
박지연 외의 다른 직원들은 아직 화분 엔터 주식 이야기 중이었다.
“저는 샀어요!”
손을 든 이 과장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나두!”
“저도요! 조금 샀습니다!”
“무조건 오를 텐데, 사야죠!”
여기저기서 주식을 샀다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자 나경은 심각한 고심에 빠졌다.
“음, 대세에 따라야 하나.”
그녀의 고민은 2시간 반이 지난 3시 반까지도 계속되었다.
“과장님. 장 마감했어요. 이제 고민 안 하셔도 될 듯합니다.”
기획 1팀 대리의 말에 나경은 화들짝 놀랐다.
“에에?! 3시 30분 지나면 못 사요?! 은행도 4시 마감인데?! 아니 그것보다 아까 1시에 샀으면 진짜로 무조건 버는 거였네요?!”
상장 당일 화분 엔터는 47,200원에 마감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 회사에는 또 하나의 호재가 날아왔다.
“됐다! 됐어!”
“자자! 기자들 연락 돌립시다!”
“경품 정리는 다 된 거야?! 이제 추첨 발표해야 해!”
“감독님! 진짜 해내셨어요!!”
“와아! 축배를 듭시다앗!!!”
사무실은 전쟁터와 축제를 오갔다.
<처절한 인생>이 드디어 1,000만을 돌파한 것이다.
*
두 달 후.
“대표님! 너무 축하드립니다!”
캐리엔터 전동현 과장은 나를 보자마자 축하 인사부터 전해왔다.
“감사합니다.”
밝은 얼굴로 그의 축하와 악수를 받은 다음 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캐리 엔터에 작은 회의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천만 영화 제작사도 힘든데 쌍 천만이라니요?!”
전동현이 이리도 들뜬 이유는 <처절한 인생>이 1,000만을 찍은 다음 달 <망자와 함께 2>까지 최종 스코어 1,100만을 찍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올해 여름은 아라비안필름을 대적할 영화가 없었습니다. 외화들도 줄줄이 고배를 마셨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나도 이렇게 생각하지만.
겸손해야 한다.
“운이 좋았죠.”
그러자 전동현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아니요. 저는 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실력이죠!”
그의 덕담은 그 후로도 몇 분이 더 계속됐다.
“하하,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이제 진짜 해야 할 이야기를 해볼까요?!”
그제야 우리는 오늘 만남의 목적을 꺼냈다.
“<기적> 개봉 일을 최대한 빨리 잡았으면 합니다.”
<기적>의 후반이 거의 끝났기에 우리는 더 바빠졌다.
모든 타이밍을 알맞게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전동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동안 숨기고 있던 우리의 계획을 전동현에게 말할 생각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YJ E&M은 대기업이었고.
우리가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대기업은 그렇게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도 대기업의 힘이 필요했다.
“이유는 당연히 있습니다.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본론부터 말해버렸다.
“<기적>은 <안전지대>와 시작점이 같습니다.”
“예?”
전동현의 표정은 아주 오묘했다.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것 같으면서도 황당해했다.
“아시다시피 <기적>은 금현석 씨의 블로그 글이 원작입니다.”
“그렇죠?”
캐리 엔터에서 알고 있는 사실은 여기까지다.
“<안전지대>도 이 블로그 글이 원작이에요.”
“예에?!”
그들은 <안전지대>를 <기적>과 대적할만한 재난 영화다.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인 내용까지는 몰랐다.
그러니 저렇게도 놀라지.
이제부터는 설명 속도를 좀 더 높여볼까.
“<안전지대>는 금현석 씨의 글을 표절했습니다.”
전동현은 이제 말하는 걸 까먹은 듯 눈을 깜박였다.
“표절은 <안전지대> 감독 이주호가 했지만, YJ E&M에선 이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진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기적> 촬영을 강행하신 겁니까? YJ E&M에 표절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이 방법은 절대 통하지 않는다.
“이 바닥에서 표절 시비가 제대로 가려진 적이 있습니까?”
내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교묘하게 빠져나갈 거라는 거 빤히 아시지 않습니까. 금현석 씨는 제게 이야기를 뺏기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뺏기지 않을 방법은 제 생각에 단 하나였어요.”
“그 방법이 먼저 영화로 제작해 개봉하는 거였습니까?”
“맞습니다.”
누군가는 황당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이 방법이 이야기를 뺏기지 않고, 그들을 벌할 수 있는 필승법이라고 생각했다.
전동현은 잠시 훅 들어온 많은 정보로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 중인 것처럼 보였다.
약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대표님. 그럼 배급 계약하실 때 이것저것 조항을 수정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까?”
나는 캐리엔터와의 <기적> 배급 건 계약에서 유독 까다롭게 굴었다.
혹시라도 캐리엔터 측에서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절대로 법적으로 걸고 넘어갈 수 없게끔 말이다.
그들이 우리를 내치지는 않을 테지만.
일종의 보험이었다.
“예. 그것도 맞습니다.”
전동현이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이거 완전히 저희가 당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이 사건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과 무조건 <기적>이 승할 거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
“과장님. <기적>이 <안전지대>에 밀릴 거라고 생각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판단은 저희가 아닌 관객들이 할 겁니다.”
“하아,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비교되면서 이슈로 이어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그걸 노리려는 거다.
“저희한테 이슈란 뭡니까. 억지로 만들려고 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관객들은 분명 몰려들 겁니다.”
그는 점점 내게 설득되기 시작했다.
“그 이슈를 역이용하자?”
“그렇죠!”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대표님. YJ E&M 저희 경쟁사고, 꼴 보기 싫은 놈들 천지긴 해도 만만히 볼 회사가 아닙니다.”
전동현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래서 처음부터 더욱 캐리 엔터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저는 신 대표님 믿어요. 이번에는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표절은 선 넘었죠. 영화인으로서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 아닙니까. 시사회랑 개봉 일정은 최대한 빨리 잡아보겠습니다. 이게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최선입니다.”
됐다.
“감사합니다.”
전동현은 마지막으로 내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그런데 <기적> 이번에 정말 잘 빠진 거 맞습니까?”
너무 오글거려서 안 써먹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안 쓰면 후회할 것 같은 타이밍이다.
“과장님. 저희 아라비안필름입니다. 쌍 천만 영화 제작사요.”
이 말은 그 어떤 말보다 <기적>의 완성도를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