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04화 (104/140)

#104화. 응원과 긴장감을 동시에

김남구는 6인실 병동에 누워 자신의 왼쪽 다리를 빤히 쳐다봤다.

무릎까지 둘러싸인 깁스 아래 발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여봤지만, 그 외에는 감각이 없었다.

‘하아. 당분간 일 못 하겠네.’

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

당분간이 아니라 어쩌면 복귀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몸이 재산인 자신은 무술팀이었으니까.

‘그때 올라가지 말걸.’

일이 벌어진 뒤에 후회해봤자 뭐 하겠냐만.

감독이 아무리 협박까지 하며 시킨다 한들 무리하지 말았어야 했다.

김남구는 무술팀 ‘더블에이’ 소속의 8년 차 무술 팀장이었다.

‘더블에이’는 현재 YJ E&M에서 제작하는 <안전지대>의 액션을 맡고 있었는데.

그 영화팀의 분위기는 초장부터 영 불안 불안했다.

현장에 가보면 준비된 건 하나도 없었고, 그날그날 목표치 분량을 정신없이 찍어내느라 촬영이 끝나면 잠시 멍하기까지 했다.

그런 <안전지대> 현장에서 김남구는 무술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느라 항상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라비안필름에서 제작하는 영화 내가 할 수 있다고 그럴 걸 그랬나. 하아.’

‘더블에이’는 <안전지대> 촬영 직전 <처절한 인생>의 무술을 맡았었다.

또 다음 작품까지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는데 포기했다.

구현해야 할 액션이 지금까지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에 자신이 없던 탓이었다.

어쨌든 그 작품을 포기하고, 대기업 YJ에서 제작하는 영화라기에 믿고 왔다.

그런데 이 꼴이 무엇인가.

그날은 옥상에 대피해있던 주인공이 탈출을 위해 옆 건물로 뛰어 넘어가는 장면을 촬영하는 날이었고.

김남구는 주인공인 이병용의 대역이었다.

당연히 와이어를 사용하기로 했기에 자신과 팀원들은 제작팀에서 섭외한 두 건물이 있던 인천에 촬영 시작보다 일찍 도착했다.

장비를 설치하고, 합을 맞춰보는 등 촬영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제는 <안전지대>의 뒤숭숭한 분위기의 주범인 감독 이주호가 현장에 나타나면서부터 발생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난 그는 갑자기 조감독을 쥐잡듯이 잡기 시작했다.

-조감독! 이걸 와이어로 넘기면 티가 나잖아요! 그냥 뛰라고 해요!

-감독님. 이미 무술 회의 때 다 보고드린 내용인데······.

-무슨 소리세요?! 나는 못 들었다고요!!

사전에 다 이야기된 내용이었으나 이주호는 자신이 한 말을 기억 못 하는 듯했다.

-분명히 그러셨는데요?

-그때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말했더라도 지금 생각해보니 와이어는 아닌 거 같다니까요? 촬영 안 할 거예요?

조감독의 나이는 이주호보다 5살은 많았다.

당연히 영화판 경력도 조감독이 훨씬 많았다.

고집불통인 감독을 어떻게든 설득하려면 무술팀의 전문적인 의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조감독이 다가왔다.

-저······. 팀장님.

그는 마치 죄인이 된 양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이 장면 와이어 없이 가능한가요? 감독님이 너무 완강하셔서······.

조감독도 말하면서 안될 걸 뻔히 아는 눈치였다.

-아시겠지만, 힘들 것 같습니다. 5층 건물에서 4층 건물로 뛰는 거라서요. 둘 사이의 간격이 엄청 넓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위험할 수 있어요. 미리 말씀하셨으면 추락 대비 에어매트라도 준비했죠.

조감독에게는 미안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렇죠?! 알겠습니다!

비장한 눈빛의 그는 다시 이주호에게 가서 방금 자신이 한 말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그러나 이주호는.

-그래서 못하겠다는 겁니까?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럼 촬영 못 하겠네. 접읍시다! 접어!

자신의 의견을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지.

아니면 혼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주호의 속은 완전 배배 꼬여 있었다.

그러니 촬영을 접는다는 애도 안 할 협박을 하고 있지.

결국 김남구는 준비했던 와이어 대신 맨몸으로 5층 건물 옥상에 올라섰다.

현장에 있던 모든 스태프가 한마디씩 거들면서 말렸지만.

그럼 오늘 촬영은 진짜로 접어야 한다.

100명의 스태프가 무술팀 때문에 촬영 못 했다는 소리는 절대 들을 수가 없었다.

-자, 레디~ 액션!

김남구는 옥상의 끝에서 끝으로 치달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옆 건물로 뛰었다.

망설이면 더 위험하다.

부웅-.

날아오른 몸은 어느새 4층 옥상에 있었다.

‘됐다!’

그러나 긴장이 풀렸던 탓인지.

무리했던 탓인지.

착지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뭔가 빠각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왼쪽 다리가 꺾였다.

그 결과는 지금의 병원 신세.

‘휴우. 그래도 이만하면 천만다행이다.’

계속 생각해봤자 뭐 하나 잠이나 자자.라고 생각하던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아이고. 남구 씨 몸은 좀 어때요?”

<안전지대> PD와 이주호였다.

PD는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들고 온 과일바구니를 내밀었지만.

이주호는 뭐 때문인지 똥 씹은 표정이었다.

김남구는 그 표정을 보자 기분이 싹 더러워졌다.

누가 봐도 억지로 끌려온 것이다.

“철심 수술은 잘 끝났다고 하던데. 비 올 때마다 시리겠죠. 뭐.”

저럴 거면 왜 왔나 싶어 자신도 모르게 구시렁거림이 튀어나왔고.

이주호는 여전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왜 그렇게 무리를 합니까.”

김남구는 어이가 없었다.

“예? 제가 언제 무리를 했습니까? ”

“이렇게 다친 거 보면 무리한 거죠. 뛸 수 있다고 해서 뛴 거 아닙니까.”

병실에 다른 환자들도 있어서 큰소리를 지르진 못했으나 김남구는 더 참을 수 없었다.

“감독님이 와이어 달지 말라면서요! 안 그러면 촬영 안 하겠다고 떼를 쓴 게 누군데요?!”

그런데 이주호의 답은 아주 가관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감독이 죽으라 그러면 죽을 겁니까? 무술팀이 알아서 판단해야죠. 내가 전문가예요?”

“뭐라고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챈 PD가 얼른 끼어들었다.

“아유. 감독님. 왜 그러세요. 아프신 분한테. 잠깐 나가계실래요?”

PD가 등을 슬쩍 떠밀자 이주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병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솔직히 사과 한마디는 할 줄 알았다.

“남구 씨. 감독님 성격 알잖아요. 미안합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그래서 말인데요······.”

김남구는 PD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것을 보고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 역시 PD도 다 똑같은 놈들이었다.

자신 앞에 놓인 것이 바로 합의서였기 때문이다.

*

“소피아. 잘 지냈어요?”

<기적>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2주 뒤.

<왕국 : 역병의 시작> 촬영도 끝이 났다.

-그럼요! 칸 수상 장면은 생방송으로 봤습니다! 화면이 잘 받으시던데요?

요즘 웬만해선 연락하는 사람마다 듣는 소리였기에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촬영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이제 막 후반 시작했어요.”

-네. 프로덕션 보고서는 꼼꼼히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산도 조금 남은 걸로 알고 있는데, 고생 많으셨어요.

“차 PD가 쓸데없는 곳에 예산 쓰지 않으려고 노력 많이 했습니다. 자유는 주어졌을 때 잘 써야 한다더라고요?”

나는 전생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차 PD는 컴플릭스의 시스템을 처음 접하고 굉장히 놀라워했다.

컴플릭스는 촬영 기간 단 한 번도 영화에 불만을 제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매 회차 보고만 받았을 뿐이다.

돈을 투자하면 보통은 간섭하기 마련이다.

당연한 이치였다.

하지만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가는 것처럼 영화의 경우 주변의 간섭이 많으면 오히려 해가 될 때도 있다.

한국 영화 중에서는 실제로 이 짓을 하다가 영화 내용이 산으로 간 사례도 있었다.

어쨌든 차 PD와 신서영은 이런 컴플릭스의 제도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또 컴플릭스가 한국에서 우리와 제일 먼저 거래했으니 뒤이어 계약할 영화들을 위해서라도 길을 잘 닦아 놓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하하, 역시 그 대표님의 그 직원이네요?

소피아는 요즘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어쨌든 후반도 잘 부탁드립니다. 요청 기한까지만 보내주시면 검토한 뒤 알려드릴게요. 아, 그리고 그때는 수정 요청이 들어갈 수도 있어요.

그래. 수정 요구를 아예 안 하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다.

편집은 영화를 수백 번도 더 보면서 이 장면이 나을지, 저 장면이 나을지, 아니면 아예 삭제할지 고민의 연속이다.

오히려 컴플릭스의 의견이 들어오면 판단이 쉬워질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은 틈틈이 드리겠습니다.”

소피아는 짧게 웃고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기대 많이 하고 있겠습니다.

그녀는 은근한 부담감을 얹어주며 전화를 끊었다.

컴플릭스에서 괜히 동아시아를 담당하는 위치에 있는 게 아니다.

말 한마디에 응원과 긴장감을 동시에 주었으니 말이다.

*

『대한민국에 누아르 붐이 불고 있다』

『2년 만에 천만 영화 나올까? 영화계 기대 만발』

『‘처절한 인생’ 배우들을 만나다. 꿈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한국 액션영화의 신화를 다시 쓰다. 감독 허훈의 영화 인생』

『배우 이안. ‘처절한 인생’은 내 꿈을 이뤄줘』

『쉬지 않는 아라비안필름! ‘처단자’ 촬영 시작』

“음, <처단자> 크랭크인 기사 떴네요?”

팀도 많아지고, 직원들도 많아지면서 보고받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불편했다.

하여 매주 월요일 오전 팀장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예. 오늘 아침에 올라와서 내려달라고 전달했는데 아직 안 내렸네요.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확실히 이쪽 일은 홍보도 중요하고, 즉각 대처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홍보팀을 최근 신설한 뒤 직원들을 채용했다.

방금 대답한 이는 홍보팀장이었다.

“아닙니다. 놔두세요. <처단자>는 그냥 두고 봅시다. 알아서들 기를 쓰고 홍보해준다는데요. 뭐.”

홍보도 전략이 필요했다.

나는 <처단자>에 확신이 있었다.

그런 영화라면 <안전지대>처럼 공격적인 홍보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빈 수레가 아닌 재미로 가득 찬 수레였으니까.

관객들은 안을 들여다보고도 절대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악의적인 기사만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순서대로 팀별 보고 사항들이 주르륵 쏟아졌다.

그 자리에서 이야기해 줄 건 해주고, 고민해 볼 건 보류했다.

회의를 의미 없이 길게 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월요일 팀장 회의는 1시간을 절대 넘기지 않기로 했다.

“휴우. 그럼 다 끝난 거죠?”

“넵!”

“아니요!”

나경은 모두가 예를 외치는 그 순간에도 아니오를 외치는 사람이었다.

멋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나경 씨 할 말 더 남았어요?”

“넵! 건의드릴 게 있습니다!”

음, 건의라.

불안하긴 하지만 일단 물어는 보자.

“뭐죠?”

“<처절한 인생>이 지금 800만이잖아요? 1,000만은 무조건 넘을 거 같은데 그때까지 회사 홈페이지나 SNS에서 카운트해보는 게 어떨까요? D-DAY? 뭐 이런 식으로요?”

아주 좋은 생각이다.

“사실은 회사 내부에서 진행하면 재밌을 거 같아서 아침마다 화이트보드 같은 곳에 써놓으려고 했거든요. 근데 또 이런 재미는 많이 나누면 나눌수록 더 커지지 않습니까!”

전생에서는 흔하게 진행했던 홍보 방법이 떠올랐다.

“좋아요. 홍보팀은 기획 1팀이랑 이야기해서 추진해보죠? 공약 같은 것도 걸면 재밌겠는데요? 경품이나 주연배우 사인 같은?”

내 말에 나경이 환하게 웃었다.

“넵!!”

그렇게 아라비안필름은 첫 천만 영화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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