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02화 (102/140)

#102화. 알짜배기 노른자

명호식은 호쾌한 성격인지 내 제안에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답했다.

-와! 정말요?! 당연히 액션으로 도전적인 영화겠죠?! 저 ‘도전’이라는 단어 진짜 좋아합니다!!

전생에서 그를 실제로 마주한 적은 없어 어떤 성격인지 몰랐는데.

상당히 직선적인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것은 앞뒤 재지 않고, 실행부터 하는 이상적인 사람.

어떻게 보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나 오히려 이런 이상적인 사고가 사람을 ‘도전’하게 만든다.

전생에서 끊임없는 ‘도전’에 그가 결국은 성공했던 것처럼.

다행히도 ‘한국 액션 스쿨’에선 우리 영화에 참여하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오랜 기간 무술 팀장이었던 명호식의 감독 데뷔라는 조건까지도.

모든 팀이 그렇듯.

무술팀도 절대 혼자서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없다.

명호식도 같이 합을 맞춰왔던 팀원들이 필요했기에 아직은 ‘한국 액션 스쿨’과 손을 놓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무술 팀장이요?”

내 이야기를 들은 정 PD는 의아함을 온 얼굴로 표현했다.

“예. 무술 팀장을 오래 해서 감독으로 올려도 상관없을 경력입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정 PD가 걱정하는 건 너무나도 이해가 간다.

가뜩이나 온갖 액션들이 난무하는 <처단자>인데 무술 감독으로의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을 데려오겠다고 하니 말이다.

나는 그를 지긋이 쳐다봤다.

“괜찮을 겁니다. 만약 현장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다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계약 진행해주세요.”

부디 내 진심이 전해져 정 PD가 그냥 넘어가기를······. 바라고 있는데.

“휴우. 대표님은 가끔 정말 신기합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확신하시니.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죠.”

확신을 너무 강하게 했나.

어쨌든 두 쪽 다 순탄하게 설득했으니 다행이다.

“아, 혹시 임윤서 씨는 연락 왔습니까?”

정 PD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이요. 매니저한테 한 번 더 연락해봤는데 시나리오 건넨 뒤부터는 개인 스케줄도 없이 아예 집에만 콕 박혀 있다더라고요?”

아마도 그녀는 고민 중일 것이다.

너무나도 하고 싶지만.

개고생이 눈에 훤하니 쉽게 결정하기 힘들 테지.

“알겠습니다. 우선은 다른 조연부터 캐스팅 계속 진행해주세요.”

“네. 그리고요. 대표님.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

정 PD는 뜸 들이며 입꼬리를 슬금슬금 올리고 있었다.

“<처절한 인생> 말입니다.”

<처절한 인생>이 국내 개봉한 지 정확히 일주일이 되었다.

“예. 첫 주 스코어 나왔나요?”

정 PD의 고개가 빠르게 끄덕였다.

“네! 200만이랍니다! 200만!!”

보고하러 들어올 때부터 신이 난 발걸음이길래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이건 예상을 웃도는 굉장한 출발이었다.

그렇다면 참을 수 없지.

“200만이요? 이거 안 되겠네요. 회식합시다. 회식!”

축하 파티에는 돈을 아끼지 말자는 예정우의 지침에 따라 우리는 그날 꽤 맛있는 저녁을 다 같이 먹었다.

*

‘절대 보지 말아야지.’

‘보면 말릴 게 분명하다.’

‘그럼 연출에도 지장이 생길 게 뻔하다.’

라고 다짐했건만.

이주호의 다짐은 일주일을 겨우 넘기고는 꺾였다.

<처절한 인생> 개봉 일주일 후.

도저히 참을 수 없던 궁금증에 그는 촬영을 대충 끝마치고, 집 근처 극장으로 향했다.

11시에 시작하는 심야 영화였으나 영화를 보러 온 좌석은 꽤 차 있었다.

역시 ‘칸’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은 그 어떤 홍보보다 강력했다.

이주호는 불안한 마음에 손톱까지 물어뜯으며 영화의 시작을 기다렸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자 화려하면서도 다채로운 액션이 눈을 사로잡았으며 예상하지 못할 스토리 전개는 집중력을 흩뜨릴 틈이 없었다.

그렇게 영화는 뒷좌석에 있던 커플의 ‘와, 대박!’이라는 말과 함께 끝났다.

‘하아. 잘 만들긴 했네.’

영화는 얼굴이 익숙한 배우들이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고 연기가 밀리는 배우도 없었다.

누구 하나 튀는 사람 없이 서로의 밸런스를 아주 잘 맞춰주고 있었다.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는 소문을 듣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또 주인공 이안의 액션은 놀라웠다.

액션은 몸 잘 쓰는 배우들에게 전적으로 유리하다.

몸을 잘 쓴다는 말은 ‘춤을 잘 춘다’에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그는 꼭 춤추는 것 같은 액션을 선보였다.

가장 관건은 역시 수중 액션 장면.

물 안에서도 그는 마치 잘 짜인 안무를 소화하는 듯했다.

‘카 액션에서 차도 직접 몰았다고 하던데.’

어느 구석을 비교해봐도 <안전지대>가 비빌 구석은 없었다.

단 한구석도.

예산이 무려 두 배 넘게 차이 나는데 말이다.

어느새 내부는 밝아졌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제작 신바드.

감독 허훈.

촬영 고덕현.

.

.

.

물론 이주호는 이 영화가 절대 허훈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크레딧에 올라오는 저 이름들.

이 영화의 높은 완성도는 다 저들 때문이다.

이주호는 현재 <안전지대>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의 이유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의 실력이 좋지 않아서 영화의 퀄리티가 점점 떨어지는 것이고.

그들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아서 촬영이 늦어졌으며.

정신을 놓고 있으니 사고가 나는 것.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었다.

왜 눈앞에서 올라가는 저 사람들은 허훈이라는 모지리 같은 놈한테 붙어서 도움을 주는지 모르겠다.

자신도 저들과 함께라면 ‘칸’ 정도는 우스울 테지.

‘그런데 신바드?’

아라비안필름의 대표 신바드.

그의 이름은 너무 특이해서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그런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허훈이 하도 수상소감이든 인터뷰든 떠들어대서 아마 전 국민에게 그의 이름은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느낌과는 달랐다.

그전부터 알고 있던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았다.

어쨌든 신바드 대표도 허훈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허훈이 웬 듣도 보도 못한 작은 영화사를 갔다길래 코웃음을 쳤는데.

알고 보니 알짜배기 노른자였던 것이다.

“손님. 영화 다 끝났습니다. 나가주셔야 하는데요.”

청소도구를 들고 있던 직원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크레딧은 언제 다 올라갔는지 스크린엔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극장 안엔 자신밖에 없었다.

이주호는 가뜩이나 성질이 나 있던 상태라 직원을 한껏 노려보며 일어났다.

“아! 지금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이없어하는 직원을 밀치며 저벅저벅 극장을 나왔다.

‘저 자식은 내가 도대체 누군 줄이나 알고 저딴 대접을 하는 거야?!’

직원에게 성질을 부려도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내일 촬영을 위해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 했으나 집 근처 편의점에 가서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이 기분으론 도저히 못 자겠다.’

더러운 기분은 소주로 씻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였다.

*

최세준이 순례길을 모두 걷고 귀국했다.

그는 약속을 지켜 정확히 3달이 되던 날 출근을 시작했고.

나는 그와 기획 1, 2팀을 호출했다.

“이번에 신설된 투자배급 팀장을 맡게 될 최세준 팀장입니다.”

내 소개에 맞춰 그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세준입니다.”

그가 YJ E&M에서 배급팀 과장으로 있었다는 사실은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었기에 나경과 이 과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눈빛은 초롱초롱했다.

“와! 박수!”

박수를 유도하는 나경은 그에게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간단한 인사 시간이 끝나고, 나는 이들에게 맡길 업무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했다.

“투자배급팀을 신설한 이유는 내년부터 더 폭넓은 장르의 영화를 제작 또는 투자하기 위함입니다.”

이 과장은 내 말을 메모하다가 멈칫했다.

“그럼 작은 영화사에 투자만 할 계획도 있으신 거네요?”

“예. 어차피 회사를 키워나가려면 동시다발적인 투자는 꼭 필요하니까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기획 1, 2팀은 오늘부터 최 팀장과 함께 투자만 할 시나리오와 제작까지 함께 할 시나리오를 구분해서 발굴해내시면 됩니다. 최 팀장은 채용 공고 내서 직원들 직접 뽑으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대표님.”

이제 영화 제작은 슬슬 이들에게 넘길 때도 됐다.

언제까지 내가 시나리오와 감독, 배우들을 다 섭외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미래 정보를 알고 있으니 그들이 엄한 길로만 가지 않게 잡아주면 이상적인 사업이 가능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넵!!”

의욕이 넘치는 그들을 내보내고, 오전에 온 전화를 떠올렸다.

-신 대표님. 하겠습니다!

고덕현은 다부진 목소리로 고민의 결과를 알렸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은퇴 시기를 항상 고민해 왔어요. 그런데 이렇게도 좋은 기회가 찾아왔네요.

그는 딸의 입봉작인 <처단자>를 끝으로 은퇴한 뒤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겠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해왔고.

장비 렌탈샵은 안용덕 팀장의 빠른 일 처리로 벌써 설계가 끝난 상황이었다.

이제 구조검사 결과만 나오면 바로 시공에 들어간다.

<처단자> 촬영이 내년 초에 끝나니 시기도 얼추 맞는 것이다.

다행히도 일이 잘 풀렸다.

어쨌든 이쪽도 우선은 기다림이 남았다.

그나저나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지잉-.

지잉-.

임윤서도 양반은 못 될 위인인가 보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는데 너머에선 쉬익-, 쉬익-.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잘 못 걸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여보세요??”

-대표님······.

어이구. 깜짝아.

순간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발신자를 다시 확인했다.

[임윤서]

맞는데?

나는 분명 여배우의 전화를 받은 것인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왕국 : 역병의 시작> 촬영장에서나 듣던 쇳소리였다.

그녀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여서 물었다.

“윤서 씨?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목이 쉬었어요.

일이 없어 다행이긴 하다만.

뭘 했는지 제대로 쉬었다.

-다른 게 아니고, 보내주신 시나리오요.

“아, <처단자>요?”

누구보다 그녀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티는 내지 않았다.

-네. 그거요. 읽어보긴 했는데······. 아, 그전에 한 가지만요.

할 거면, 그냥 속 시원하게 이야기해주지.

그녀는 괜한 뜸을 들였다.

-혹시 저번에 대근육 어쩌고, 영어 공부 어쩌고 이야기하신 거 이 시나리오 때문이었어요?

술 먹고 한 소리는 꺼내지 않는 법이거늘.

민망했으나 그래도 대답은 했다.

“예. 맞습니다. 저는 이 시나리오 보고, 바로 윤서 씨가 떠올랐거든요.”

-제 어떤 모습을 보고요? 저는 우아하고, 기품 있고, 고상한 역할을 전문으로 했었는데요?

저런 말을 잘도 자기 입으로.

그것도 쇳소리로 하다니.

“그 우아하고, 기품 있고, 고상한 모습 뒤에 분명 ‘은서’의 처절함이 있을 것 같았어요.”

-······. ‘은서’의 처절함이라. 하, 대표님 정말 재밌으시네요. 제 목이 왜 쉬었는지 아세요?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르죠?”

-시나리오 소리 내서 100번 읽느라요. 100번을 읽고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으면 해야 하는 거잖아요.

기껏해야 집에 콕 박혀서 고민 정도 하는 줄 알았는데 100번이라니.

역시 독한 면이 있어야 하는 ‘은서’ 역엔 임윤서가 딱이다.

“그럼 지금 전화를 주셨다는 건 마음을 굳히셨다는 뜻이겠네요?”

-네. 저 이거 합니다. 무조건이요! 아마도 찍다가 한 번은 후회할 것 같은데,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요.

당연하지.

이거 놓치면 임윤서는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소개해드릴 분이 있으니 사무실 한번 오시죠.”

-응? 누구요?

달콤한 열매를 입에 넣기 위해서는 쓰디쓴 고통이 뒤따른다.

“액션 배우셔야죠.”

명호식의 훈련은 혹독할 테지만, 우리에게 달달한 열매를 가져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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