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101화 (101/140)

#101화. 따뜻해지는 기운

최근 집을 이사했다.

강남역 사무실 근처 오피스텔로.

당연히 전에 살던 투룸보다 비싼 감이 있었으나 내 입장에서는 출퇴근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편이 나았다.

주말이었지만, 늦잠을 자는 사치까지는 부리지 못했다.

처리할 업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내려와선 거실에 TV와 소파 대신 놓아둔 업무용 책상에 앉았다.

회사가 손대는 일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컨펌해야 할 일도 많아졌다.

어제 사무실에서 챙겨 온 서류들을 하나씩 살폈다.

1시간 정도를 그렇게 가만히 서류만 보고 있다가 문득 따뜻해지는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통 창문으로 스며든 햇빛이 나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던 것이다.

어느새 식어버린 커피를 손에 들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며칠 전 사무실에 왔다 간 고덕현은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몹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신 대표님? 혹시 농담하시는 건 아니죠? 촬영하는 법밖에 모르는 제가 무슨 사업을 합니까?

나는 그런 그의 촬영 덕후 면모 때문에 동업을 제안한 것이었다.

-저는 촬영 감독님의 그 경력이 필요합니다.

고덕현은 여전히 내 속을 전혀 모르겠다는 안색이었다.

-장비 렌탈 사업을 해보려고 합니다.

-예에?!

그는 깜짝 놀라면서도 그런 말이었냐는 수긍의 고갯짓을 보였다.

-음, 렌탈 사업이라······.

영화든 드라마든 촬영에는 많은 장비가 필요하다.

여러 종류의 카메라와 렌즈, 또 촬영 시 흔들림을 최소화하는 짐벌부터 크레인, 달리 등 그립 장비와 조명 장비까지.

촬영 감독도 작품별로 페이를 받는 프리랜서이기에 이 모든 장비들을 직접 관리하지 않는다.

작품에 들어가게 되면 촬영팀을 꾸리고, 예산에 맞게 장비를 대여하는 것이다.

때문에 장비 렌탈 업체는 초기 자본이 많이 들어갈 테지만, 수요가 많았다.

하지만 이 사업은 나 혼자만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가장 흔하게 쓰이는 ARRI 사의 알렉사 카메라의 경우에는 1억에 가까웠고, 다른 장비들도 고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장비를 한두 대 사놓고, 렌탈 사업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 큰 금액을 투자하려면 장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꼭 필요했다.

나는 그 사람으로 고덕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내 계획을 그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좋은 기회일 것 같긴 한데······.

고덕현은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사업이라는 분야 때문에 고심하는 듯했다.

-처음부터 큰 규모로 시작할 생각은 없습니다. 점차 키워나가고 싶어요.

당연히 그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지금 당장 답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민이 끝나면 연락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그는 <처단자>의 촬영 감독 계약서에만 도장을 찍고 사무실을 떠났다.

구름이 지나가고 있는지 오피스텔을 비추던 햇빛은 잠시 걷혔다.

책상 위로 시선을 돌리니 다음으로 살펴야 할 문서가 눈에 들어왔다.

[남양주 장비 렌탈 사업 계획서]

고덕현에게 고민해보라고 전했으나 사실 그가 제안을 거절해도 이 사업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서라도 어차피 할 사업이었으니 이미 준비는 시작됐다.

우선 렌탈할 공간이 필요했다.

지금의 강남역 빌딩은 자리가 없을뿐더러 장비를 둘 공간으로 쓰기에는 아까웠다.

그렇다고 굳이 비싼 땅값의 서울에서 공간을 빌려 가며 할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촬영팀들은 알아서 찾아온다.

그래서 내가 정한 장소는 바로 남양주 세트장.

촬영 중 갑작스럽게 장비가 필요한 경우도 은근히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장비 렌탈샵이 근처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막연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사람 생각은 다 비슷하기에 세트장을 이용하는 촬영팀들도 요긴하게 사용할 것이다.

정리된 생각을 예정우에게 곧바로 전했고.

그는 세트장 옆 부지를 만 평 더 매입했다.

주말이 시작되기 전에는 사업 계획서로 한주건설과의 미팅 사항까지 정리하는 빠른 업무 처리를 보여줬다.

계획서를 살펴보니 한주건설 안용덕 팀장과는 벌써 장비 렌탈 건물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1차 미팅까지 완료한 상황이었다.

예정우도 점점 일이 익숙해지는지 믿음직스러웠다.

이제 내가 굳이 뭘 지시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통할 정도다.

장비 렌탈 사업은 고덕현의 답이 올 때까지 그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나는 또 하나의 해결되지 않은 일을 고심했다.

바로 <처단자>의 무술팀.

과연 어떤 무술팀을 데려와야 할까.

전생을 통틀어서 내가 겪은 모든 무술팀을 곱씹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처단자>의 액션을 소화할 무술팀은 돌파구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그것이 생각났다.

회귀 후 삶의 길라잡이 <신바드의 모험>.

<신바드의 모험>은 최근까지도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회귀 직전에 쏟아지던 힌트들은 요 근래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요즘은 일들이 술술 풀려서인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오늘은 저녁에 열어봐야 할 <신바드의 모험>을 조금 일찍 확인하기로 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어떤 신이 내게 이런 인생의 힌트를 주는 건지 모르겠으나 빌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속으로 몇 번을 되뇐 뒤.

시나리오 북을 넘겼다.

회귀 후 꽤 시간이 지난 후라 그런지 처음엔 얇았던 <신바드의 모험>이 꽤 두꺼워진 모습이었다.

이제 이 정도는 별로 신기하지 않을 만큼 괴이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그저 이 책이 두꺼워진 만큼 내게 많은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며 뒤로, 뒤로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며칠 전 고덕현을 만났던 장면을 지나쳐 다음 장을 넘겼을 때.

나는 마치 옛 친구를 오랜만에 본 듯한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팀장, 액션, 감독]

힌트가 떠올랐다.

*

이곳은 파주의 한 건물 앞.

창문으로 슬쩍 들여다본 그 건물의 내부는 마치 체육관 같았다.

입구에 붙어 있는 문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국 액션 스쿨]

한국 액션 스쿨은 전생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무술팀으로 유명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다.

꾸준히 성장해 몇 년 안으로 <처절한 인생>을 같이 했던 ‘더블에이’팀을 넘어선다.

엄밀히 따지면 현재 ‘한국 액션 스쿨’은 ‘더블에이’팀을 능가하지 못하는 실력이었다.

그런데도 주말까지 반납하고 이곳에 온 이유는······.

온전히 몇 시간 전 확인한 <신바드의 모험> 힌트 때문이었다.

<처단자>를 맡아줄 무술팀을 찾으러 이곳에 온 것이 맞았으나 그 대상이 ‘한국 액션 스쿨’은 아니었다.

대신 [팀장, 액션, 감독]이라는 힌트를 보자마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명호식.

명호식은 회귀 직전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액션영화 감독이었다.

영화판에 있다 보면 화제가 되는 사람들의 과거를 듣고 싶지 않아도 알음알음 알게 된다.

명호식의 과거도 그렇게 알게 된 케이스였는데 그는 원래 한국 액션 스쿨의 무술 팀장이었다고 한다.

무술 감독의 꿈을 안고, ‘한국 액션 스쿨’에 들어와 몇 년을 고생한 뒤에야 팀장의 자리까지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명호식은 워낙 무술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고, 획기적인 액션 장면에 집착했다.

결국 자신을 담당하던 무술 감독과의 지속적인 트러블로 팀을 나오게 되고, 결심한다.

세상이 놀랄 액션영화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내리라.

그렇게 영혼을 갈아 시나리오 집필에 몰두하지만.

역시 세상일은 만만하지 않았다.

명호식이 ‘한국 액션 스쿨’을 나온 뒤 그의 영화가 개봉하기까지는 정확히 10년이 걸렸다.

무작정 덤볐기에 시간이 너무도 오래 걸린 것이다.

만약 그라면······.

미래에 ‘액션의 신’이라 불리게 되는 그 명호식이라면 <처단자>를 어떻게든 구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현존하는 무술팀 중에서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흠, 그런 포부로 당장 달려오긴 했는데 막상 오고 보니 조금 막막했다.

무작정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찾아야 하나.

시간을 확인해보니 점심시간이 막 끝났을 무렵이었다.

하필 지금은 딱 명호식이 ‘한국 액션 스쿨’을 나왔을 시기였기 때문에 그는 벌써 이곳을 나가고 없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방법을 쥐어 짜내던 순간.

누군가가 문을 쾅! 하며 열고 나왔다.

“아니! 이렇게 해서 언제 업계 탑을 찍냐고오! 가끔은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거잖아!!”

뭔가에 제대로 뿔이 난 남자와는 다르게 안도감이 밀려왔다.

럭키.

그는 앳된 모습의 명호식이었다.

다행히도 아직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나 보다.

“호식아! 그래도 감독님이잖아! 네가 좀 참아라!”

뒤를 따라오던 명호식의 동료처럼 보이던 남자는 그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명호식은 영 진정되지 않는 눈치였다.

“씨발! 그럼 맨날 처맞고! 애들 이상한데 불려가는 것도 참아야 되냐?!”

무술팀은 많은 촬영 스태프 중에서도 안전과 직결된 팀이다.

그래서 군기가 쎈 경우가 많았다.

현장에서 가끔 이 사람들은 무술팀인가 군인인가 생각한 적도 많았으니 말이다.

근데 명호식의 방금 말은 군기를 넘어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그거는······.”

말리러 온 남자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놔! 자식아!! 나는 도저히 여기 더 못 있겠다!! 내가 직접 입봉하든가 해야지! 드러워 죽겠다 아주!!”

명호식은 씩씩대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야! 명호식!”

동료도 곧 그를 따랐다.

명함을 건네기에는 좋지 않은 타이밍이었으나 지금 그를 놓치면 또 찾아야 한다.

나는 얼른 그를 쫓았다.

“저기. 명호식 씨.”

내 부름에 뒤를 돌아보는 명호식과 남자.

“응? 저를 아세요?”

잔뜩 경계심을 품은 얼굴이었다.

이 순간이 가장 난감하다.

미래를 알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제외한 채 상대방에게 나를 소개하고, 내 사람으로까지 만들어야 하는 이런 순간.

항상 힌트를 보고 스태프들을 모을 때는 여러 가지 고충이 많았다.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

어떻게 찾아왔느냐.

등등 항상 그들을 초조하게 설득해야 했다.

“예.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우선 그에게 명함부터 꺼냈다.

명함은 사업가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니까.

명호식은 명함을 받아 들더니 뒤집어도 보고, 햇빛에도 비춰봤다.

동료 남자도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 행동을 같이하는 중이다.

왜 저러지.

하여튼 나는 그에게 내 제안을 설명하려고 했다.

“현재 영화를 준비 중입니다. 실력 있는 무술 감독님을 찾고 있는데 알음알음 소문을 듣고, 이곳까지 찾아오게-.”

“에에에?!”

아이고, 깜짝이야.

둘의 갑작스러운 샤우팅에 놀라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명호식은.

내 얼굴 한번.

명함 한번.

다시 내 얼굴 한번을 번갈아 봤다.

“와! 진짜 아라비안필름이라고요? 그 칸?! 신바드 대표님?!”

“예. 맞습니다.”

명호식은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손을 덥석 붙잡았다.

“대표님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정말 팬입니다! 이번 <처절한 인생> 너무 기대하고 있어요! 액션영화로 칸 감독상이라니! 또 신 대표님은 허 감독님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잖아요?! 아니, 그보다 영화를 준비 중이시라고요?!”

좀 전에 불같이 화내던 사람이 맞나.

따발총처럼 말을 잇는 그 때문에 그제야 겨우 답할 수 있었다.

“예. 이번에도 액션영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명호식은 숨을 헉! 하고 들이마시더니 갑자기 몸까지 굳었다.

“자, 잠깐만요. 그럼 아라비안필름에서 차기작을 액션영화로 준비 중인데, 무술 감독을 찾고 계신다는 말씀이세요?? 음, 그럼 저희 감독님을 찾으러 오신······.”

말이 잘 통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샌다.

“아니요. 저는 명호식 팀장님을 찾아온 겁니다.”

그는 잠시 이해를 위한 버퍼링이 걸린 듯 눈을 깜박거렸다.

그런 그에게 활짝 웃으며 제안했다.

“저희 무술 감독님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아주 도전적인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