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지금까지의 노하우
“감독상은······. <처절한 인생>의 허훈!”
기자 상영회의 기립박수가 터진 그 날밤.
허훈은 감독상의 영광을 안았다.
트로피를 건네받은 그는 울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고, 소감을 위해 마이크 앞에 섰다.
그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수상소감을 준비해 비행기 안에서 수없이 되뇌었으나 막상 상황이 닥치자 머릿속이 하얘진 것 같았다.
“어, 아, 그러니까······. 하하. 죄송합니다. 수상소감을 연습하긴 했는데 정말로 받을 줄은 몰랐어요. 긴장되고, 당황스럽네요.”
그러나 곧 죽어라 외웠던 소감이 생각났는지 한 글자 한 글자 입 밖으로 꺼냈다.
“<처절한 인생>은 한국의 제주도라는 섬에서 초심으로 돌아가 집필했던 이야기입니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독특하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리고 완성했죠.
제가 한 건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이런 대단한 상까지 받을 수 있었던 건 저와 같이 <처절한 인생>을 함께 만들어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나는 객석에 앉아 그의 수상소감을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허훈과 눈이 딱 마주쳤는데······.
“모든 분께 감사하지만, 오늘의 영광을 특별히 돌리고 싶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 이 자리에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처절한 인생>의 제작사인 아라비안필름 신바드 대표님과 함께 이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그러자 한 카메라가 내 앞으로 다가왔고.
한쪽에 있던 대형 스크린엔 내 얼굴이 커다랗게 올라왔다.
그렇게 5분간 더 이어진 허훈의 수상소감.
카메라는 쭉 내 앞에서 날 찍고 있다가 그가 무대에서 내려올 때쯤에야 철수했다.
다음날 알게 됐지만.
전 세계로 송출되고 있던 칸 영화제 생방송에는 내 얼굴이 꽤 오랫동안 잡혀 있었다고 한다.
*
“다들 읽어보셨죠?”
앞에 주르륵 앉은 정, 차, 권 PD.
셋은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가장 먼저 정 PD가 말을 시작했다.
“네. 저는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예산 면에서 한계가 보이는 장면들은 과감히 수정하거나 삭제하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그러나 끝맺음이 영 시원치 않았다.
“다른 두 분은 어떠셨어요?”
“저도 정 PD랑 생각이 같아요. 그런데······.”
차 PD도 고심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마지막으로 권 PD가 한창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풀며 답했다.
“미국이었으면 바로 오브 콜스였겠지만, 여긴 한국이잖아요? 어설프게 할 바에는 안 하는 게 낫겠죠. 근데 진짜 아쉽긴 하네요..”
권 PD가 생각하는 ‘어설프게’라는 건 아마도 예산으로 직결될 것이다.
어쨌든 셋의 답은 전부 다 부정적이었으나.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 같을 것 같았다.
“다들 수정하거나 삭제할 장면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고심하던 셋은 일제히 고개를 흔들었다.
“맞아요! 이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니 쳐내야 할 것 같은데······.”
흥분한 정 PD의 말을 차 PD가 받았다.
“그럴 장면이 없단 말이죠?”
권 PD는 왠지 신이 나서는 의견을 마무리했다.
“장면 자르면 재미가 줄 것 같아요. 그냥 최대한 예산 줄여보는 쪽으로 촬영하면 수작 하나 나올 것 같은 예감이랄까요?!”
역시 사람 눈 다 거기서 거기다.
나도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그럼. 뭐, 어쩔 수 없네요. 정 PD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그의 손에 달렸다.
이 어마어마한 시나리오의 현실적인 예산을 짜는 일.
정 PD가 확신에 차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넵! 지금까지의 노하우를 총집합해보겠습니다!”
그런 그에게 나는 하나를 더 부탁했다.
“아, 그리고 주연은 윤서 씨 어떻습니까?”
정 PD에게 한 그 말에 셋 모두가 반응했다.
“예?! 윤서 씨라면 임윤서 씨요?”
“이미지가 너무 다르지 않을까요?!”
“오우. 제가 그분을 잘 모르지만, 굉장히 까다롭다고 알고 있는데 이렇게 힘든 영화를 하실까요?”
셋 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의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시나리오를 절대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임윤서는 액션을 향한 갈망이 엄청났지만, 아직 자각하지 못한 상태다.
이 시나리오를 보는 순간.
분명 그 갈망이 눈을 뜰 것이다.
이 사실은 나만 알고 있으니 그들이 놀라는 것도 이해가 간다.
“우선 던져보고, 기다리죠.”
그렇게 <처단자> 회의를 마치고.
의자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칸에서 귀국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
우선 <처절한 인생>의 뜨거운 반응을 공항에서부터 확연히 실감할 수 있었다.
금의환향하는 우리를 기다리던 수많은 기자와 팬들.
그 인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거기에 우리를 발견한 일반 승객들까지 모여들면서 공항은 잠시 마비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연일 우리 영화 기사가 인터넷을 도배했고.
허훈의 감독상 수상은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는지 달리는 댓글의 수도 어마어마했다.
[허훈 감독님 축하드립니다! 당신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올해 경사가 이리도 많다니! 빌보드 1위에, 할리우드 주연에, 심지어 칸 수상이라니요!]
[으앙! 그래서 <처절한 인생> 언제 개봉하나요ㅜㅜ 너무 궁금한데!!]
[해외 기자들 리뷰 보니까 액션이 장난 아니라던데,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안 되네요;;]
또 캐리엔터에서는 이런 경사스러운 일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자신들이 운영하는 호텔 레스토랑을 통째로 비워 회식을 주최했다.
<처절한 인생>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했기에 고생했던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자부심을 느끼며 참석했고.
대부분이 프리랜서로 다른 작품에서 촬영 중이던 스태프도 있었지만, 참석률 100%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그래서인지 회식은 유난히 분위기가 좋았다.
그날 나경이 보여준 어떤 것에는 굉장한 충격을 받기도 했는데.
-대표님! 그거 보셨어요? 댓글에 대표님 이야기도 종종 있던데!
-예? 제 이야기요?
-아직 안 보셨어요?! 훈남이라고 난리 났는데!
그녀는 얼른 자신의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더니 사진첩을 열어서 내게 내밀었다.
그걸 또 캡처까지 해놓은 것이다.
-진짜라니까요!
흥분하는 그녀에게서 핸드폰을 받아들었는데······.
[아라비안필름 대표 생각보다 젊고 잘생기지 않았음?]
[맞아요! 제가 생각하던 영화사 대표 이미지랑 달라서 조금 놀랐어요!]
[이안 옆에서도 꿀리지 않던데요?]
[훈남이에요! 훈남!]
어유. 이게 뭐야.
낯간지러워서 혼났다.
하지만 대중들의 관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길을 가다 종종 알아보는 사람까지 생겨버린 것이다.
그전에는 몰랐는데, 이게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내 신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더 행동을 조심하게 된달까?
내 삶은 그렇게 여러 가지 의미로 변화하고 있었다.
*
“와! 진짜로 15세 나왔네요? 조마조마했는데!”
허훈은 등급의 결과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네요. 다행입니다.”
<처절한 인생>의 등급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보통의 다른 영화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렸다.
아마도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우리 영화의 화제성을 고려해 심사숙고한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히 15세 관람가로 원하는 결과가 나왔으니 이제 개봉만 잘하면 됐다.
“개봉은 7월 3일로 잡힌 거 아시죠?”
<처절한 인생>의 개봉이 7월 초로 잡히면서 <망자와 함께 2> 개봉은 7월 중순에서 8월 초로 늦춰졌다.
영화는 흥행작을 피해 개봉일을 잡기도 하는데.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라비안필름 영화끼리 맞붙을 상황이 된 것이다.
두 작품 다 기대작이었기에 서로 피해 가는 것이 성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덜 미치는 방법이었다.
“넵!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씩씩하게 답하는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갔는데 이번엔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하던 중에 나경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대표님! 상금 수여 시간이 있습니다!”
순간 우리 회사에 그런 이벤트가 생겼나?
싶었다.
“예?”
“에엥? 모르셨어요?! 오늘 그린 애플 2위로 내려왔어요! 딱 10주 되는 날!”
아, 오늘 그렇게 됐나 보다.
“그러니까 그린 애플 빌보드 9주 연속 1위를 맞추신 대표님께 상금을 수여합니다!! 자 다들 박수요!”
직원들은 짝짝짝 손뼉을 치긴 하는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와! 진짜로 이걸 맞추실 줄이야.”
“그러니까요! 대표님 회귀라도 하신 거 아니죠?!”
기획 1팀 정 대리의 외침이었다.
뜨끔했지만, 이건 전생에서도 보지 못한 과거다.
“이거 참. 그냥 찍은 게 덜컥 얻어걸렸네요. 오늘 맛있는 점심이라도 쏘겠습니다. 요 근처 해산물 뷔페 어떻습니까?”
직원들은 환호했다.
그럼 이왕 쏘는 거 맘 편하게 먹고 와야지.
점심시간은 아직 30분이나 남았지만.
“거기 점심시간 맞춰 가면 자리 없습니다. 지금 나가시죠!”
환호는 함성으로 변했고.
우리는 그날 그곳에 있던 해산물을 모두 동낼 기세로 점령했다.
한 달 후.
“정 PD님 보낸 예산서는 검토했습니다. 적절하게 짜신 거 같던데요? 고민 많이 하셨겠습니다.”
정 PD는 극악의 난이도였던 <처단자> 예산서를 한 달 만에 내게 보여주었다.
그가 제시한 <처단자>의 예산은 200억.
다행히 직접 투자하기에도 적정선이었다.
“프리는 바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서요.”
“알겠습니다. 혹시 무술 감독님한테는 여쭤보셨습니까?”
<처단자>는 <처절한 인생>보다 더 큰 규모의 액션이 주를 이뤘기에 당연히 무술팀의 실력이 관건이다.
그래서 <처절한 인생>을 같이 했던 팀에게 시나리오를 보내라고 했었는데.
정 PD의 표정을 보니 거절한 모양이다.
“네. 힘들다고 하십니다. 다른 스케줄이 있다고 하시네요. 근데 스케줄 때문에 거절하신 게 아닌 것 같아요. 알아보니까 들어가시는 작품 없으시다고······.”
뭐, 그들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시나리오를 봤다면 욕심이 났겠지만, 감당하기 힘들었겠지.
고민을 많이 하다가 거절했을 것이다.
고진주의 액션은 그만큼 한국에서 시도되지 않은 획기적인 액션들이 많았다.
“그럼 새로 찾아야겠네요.”
“네. 후보 추려서 보고드릴게요.”
우리의 대화가 거의 마무리되던 그쯤.
똑똑.
대표실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고덕현.
“아, 오셨습니까.”
정 PD도 그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곤 차를 가지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아라비안필름은 올 때마다 좋아지네요? 빌딩 샀다길래 구경 왔습니다! 하하!”
“구경해보니 어떠십니까?”
“강남에 역세권 빌딩이라니! 당연히 부러웠지요!”
잠시 후.
정 PD가 내온 차를 마시며 우리는 반가웠던 마음을 조금 진정시켰다.
“계약하러 오신 거죠?”
고덕현에게는 <처단자> 촬영을 부탁했다.
당연히 딸의 입봉작이었으니 그는 고민도 없이 승낙했다.
“빌딩 구경하러 왔다니까요. 하하. 계약은 온 김에 하는 거죠.”
부녀 사이인 이 둘이 현장에서 손발을 맞춰본 적 없었다면 이런 선택은 쉽지 않았겠지만.
이 둘은 이미 두 작품이나 현장에서 부딪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니다. 계속 잘 부탁드려요.”
“부탁도 감사도 제가 드려야죠. 요즘 우리 진주 입봉한다는 말에 잠도 못 잡니다. 그 쪼그만 놈이 연출한다고 뛰어다닐 모습이 상상조차 안 돼서요.”
“잘하실 겁니다.”
“자기 혼자 잘한다고 영화가 만들어집니까? 아무튼 시나리오 봤는데 누구 딸인지 참. 지금까지 아라비안필름에서 한 영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그러니 이 고생을 누구한테 시키겠습니까. 내가 해야지.”
‘고생’이라고 하면서도 그의 입은 귀에 걸려있었다.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고덕현과는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그러다 나는 그가 오면 꼭 해야지 생각하고 있던 제안이 생각났다.
“아, 그리고 촬영 감독님.”
이건 아주 중요한 제안이었다.
“응? 무슨 할 말 있습니까?”
고덕현은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혹시 사업에는 관심 없으십니까?”
그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에? 사업이요?”
나는 그에게 웃음과 함께 답했다.
“예. 동업으로요.”
회귀하면서 사업이 이렇게 재밌는 거구나.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또 한 번 일을 벌일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