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끓어오르는 벅찬 마음
고진주가 보내온 시나리오의 첫 장에는 이런 제목이 적혀있었다.
<처단자>
초반 몇 장은 무난했다.
주인공인 죽지 않는 인간 ‘은서’가 남자를 만나고, 아이를 가지며 행복한 결혼식을 하는.
딱 거기까지는 그렇구나.
하고 봤다.
내 입이 점점 벌어지기 시작한 건.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던 그 뒷장부터였다.
몸담았던 킬러 집단에 남편을 잃고 아이까지 유산한 ‘은서’가 괴로워하다가 복수를 결심한 그 순간부터 영화는 숨 쉴 틈 없이 치닫는다.
먼저 ‘은서’는 빠른 이동 수단으로 오토바이를 선택해 개조하고.
그 오토바이로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숨어 사는 킬러들을 찾아내 고통스럽게 죽인다.
그러면서 발생하는 액션 장면들은 제작자로서 머리가 지끈할 정도였다.
‘은서’를 발견한 킬러가 버스를 강탈해 그녀가 탄 오토바이를 밀어 버리려다 뒤집히는 장면(-그것도 도심에서).
양쪽에서 ‘은서’를 추격하는 대형 트럭을 따돌리다가 가까스로 그 사이를 지나가는 장면.
킬러 집단의 보스가 보낸 전용기를 타고, 그가 있던 곳으로 향하다가 전용기를 일부러 추락시킨 뒤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장면.
고층 빌딩 사이를 줄로 연결해 도르래를 걸어 넘어가는 장면.
요트 파티를 벌이던 킬러 집단을 찾아가 몰살하고, 요트를 폭발시키는 장면.
등등······.
그냥 어디 뛰어내리고, 차가 뒤집히는 건 기본 베이스로 깔린 그런 액션들이 총집합된 시나리오였다.
“정 PD님.”
‘프랑스인과 하루 만에 친해지기!’라는 책을 읽고 있던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 대표님!”
“이거 한 번 읽어보시겠어요? 아마도 정 PD님이 맡아주셔야 할 것 같은데.”
스케줄 상 정 PD가 맡는 건 불문율이겠지만, 나는 이 시나리오를 회사 소속 PD들에게 모두 읽어보라고 할 참이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다른 PD들의 의견도 물어봐야 했기 때문이다.
정 PD는 <처단자>의 살벌함은 꿈에도 모른 채 내 노트북을 건네받았다.
“오! 진주 씨 드디어 작품 들어가는 겁니까? 이제 고 감독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귀국할 때까지만 읽어보시면 될 것 같아요. 사무실 가서 차 PD님, 권 PD님이랑 이야기 한번 하시죠.”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마도 자신이 맡게 될 시나리오를 굳이 다른 PD들과 상의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겠지.
그러나 그는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답했다.
“음, 알겠습니다!”
들고 있던 ‘프랑스인과 하루 만에 친해지기!’는 그 자리에서 내팽개치고, 곧바로 <처단자>를 읽기 시작한 정 PD.
잠시 후.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쪽으로······.
그걸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아까 저런 표정이었겠구나.
*
칸 영화제.
매년 5월 프랑스 남부 지방 칸에서 열리는 국제 영화제로 세계 3대 영화제에 속하고.
역사가 가장 오래된 영화제는 아니지만, 오늘날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영화제.
칸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다른 영화제에 비해 보수적인 편에 속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경쟁 부문에서 젊은 감독의 신선한 영화는 보기 힘들기에 허훈이 감독상 후보에 오른 것은 귀한 현상이었다.
약 15시간의 비행을 마친 뒤 프랑스 니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칸으로 이동했다.
늦은 저녁쯤에야 예약해둔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로비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피곤하시죠?”
그들은 아라비안필름의 해외팀.
반가운 얼굴로 우리의 짐을 받아 들었다.
해외팀은 우리보다 3일 먼저 출국했다.
칸 영화제가 자랑하는 건 3대 영화제라는 위엄뿐만이 아니다.
바로 세계 최대 규모의 거대한 필름마켓.
이 또한 매년 영화인들의 관심이 칸으로 쏠리는 이유였다.
이미 <처절한 인생>은 112개국에 선판매되었으나 우리는 조금 더 욕심을 내어보기로 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다들 이 시간까지 기다리신 겁니까?”
시간은 벌써 9시를 넘기고 있었다.
해외팀 팀장 송우준은 우리에게 카드 키를 하나씩 건넸다.
“숙소에서 쉬다가 도착하실 시간 맞춰서 나와 있던 겁니다. 미리 체크인은 해놨어요. 짐은 호텔에서 올려놓을 건데 배는 안 고프세요?”
하나씩 끌고 왔던 캐리어는 어느새 대기하던 벨보이에 의해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물음에 허훈이 번쩍 손을 들었다.
“저요! 저요! 배고픕니다!”
비행기서부터 프랑스는 뭐가 맛있냐고 묻던 그였기에 저럴 줄 알았다.
송우준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어서 호텔 레스토랑이랑 주변 식당들은 문 닫았을 거예요. 여기 15층에 바(bar)가 있던데 올라가시죠. 요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를 따라 이동했고.
그 사이 송우준은 짧은 보고를 시작했다.
“감독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라 이번에도 바이어들 연락이 많았습니다. 오늘까지 29개국 추가 판매했고요. 내일, 모레까지 영업하면 50개국까진 되지 않을까 예상 중입니다.”
이 정도면 최종 160개국 이상 판매는 확정이라는 말이다.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나는 끓어오르는 벅찬 마음을 애써 감췄다.
“고생하셨습니다.”
*
“칸에 저희 영화가 상영될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허훈은 연출한 영화를 자신의 영화라고 칭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우리 영화. 저희 영화.
모든 스태프가 같이 합심해서 만든 작품이라는 생각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다.
천재성뿐 아니라 감독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필수 덕목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게요. 이곳에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 세계 영화인들이 모인 이곳은.
뤼미에르 대극장.
2,000석 규모의 그 극장은 우리 영화를 관람하기 위한 세계인들로 가득했다.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듯.
그들의 표정은 모두 기대에 차 있었다.
“어휴. 영화제 일정은 역시 어느 나라든 빡빡하네요.”
정 PD의 말처럼 우리는 어제 장거리 비행의 피로를 풀 시간도 없이 오늘 오전부터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포토콜.
여러 국가와의 인터뷰.
레드카펫.
등등······.
지금이 오후 9시였으니 12시간은 쉬지 않고, 돌아다닌 것 같다.
그래도 이제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다.
뤼미에르 대극장에서의 프리미어 상영으로 세계 언론과 관객들에게 처음으로 영화를 선보이는 자리였다.
“힘들긴 한데 언제 또 와보겠어요.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감격의 젖은 듯한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내부는 서서히 어두워졌다.
<처절한 인생>의 상영이 시작된 것이다.
모두가 숨죽이고, 스크린에 집중했다.
캐리엔터테인먼트와 아라비안필름의 오프닝 영상들이 지나가고, 스크린은 암전.
뚜벅뚜벅.
대극장 내 스피커에는 웬 남자의 구두 소리만 들려오더니 새까맣던 스크린이 서서히 밝아졌다.
밝아지는 속도에 맞춰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음들도 하나씩 추가된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웃음소리.
지하철 안내 방송.
약속에 늦었는지 뛰어가는 남자의 발소리.
와 함께 어느새 완전히 밝아진 스크린에 나타난 곳은 서울의 어느 지하철역.
카메라는 그곳을 걷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중이다.
검은색 정장과 구두, 짧은 머리를 하고 있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서자 따라가던 카메라도 멈춘다.
남자는 한쪽 벽에 설치되어 있던 물품 보관함으로 몸을 돌렸다.
그제야 보이는 남자의 얼굴.
이안이다.
이번 영화를 위해 7kg를 감량한 이안의 깡마른 모습은 극의 긴장감을 더해 주는 포인트였다.
컷이 넘어가며 이안의 얼굴이 클로즈업.
덕분에 그의 위태로운 감정은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불안. 초조. 긴장. 걱정. 두려움.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쉴 틈 없이 곧바로 바스트 샷.
-하아.
이안은 한숨 쉬며 자신의 머리를 한 번 쓸어내리더니 19번이라고 적힌 보관함을 열었다.
끼익-.
보관함이 열리자 보이는 건 서류 봉투 하나와 구식 핸드폰.
주변을 짧게 살피고는 물건을 빠르게 꺼낸다.
지잉-.
지잉-.
꺼내자마자 야단스럽게 진동하는 핸드폰의 폴더를 달칵, 올렸다.
-여보세요?
샷은 전체적으로 넓어지며 이안의 모습을 풀로 잡았다.
그 타이밍에 맞게 음악 스타트.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
음악은 앞으로 시작될 우진(이안)의 이야기를 대변하고 있었다.
우울하고, 처량한.
참담하면서도 허탈한.
씁쓸한 비참함까지.
음악은 잔잔한 피아노 건반으로 시작하다가.
고운 소리이지만, 옥타브가 낮은 클라리넷이 출연하면서 음악 외에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우진의 입 모양이 무언가를 대답하는 듯 뻐끔거린다.
그 뻐끔거림은 점점 격해지더니 몸을 들썩이며 분노로 변했다.
결국 들고 있던 핸드폰을 던져버리는 이안.
그리고······.
서서히 화면 한가운데에 떠오르는 글자.
[처절한 인생]
붓으로 휘갈기듯 쓴 그 글씨가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
.
.
환호성과 박수 소리.
귀를 파고드는 휘파람 소리가 이 상황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방금까지 <처절한 인생>이 나오던 대형 스크린에는 우리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카메라들이 우리를 찍기 시작한 것이다.
약 2,000명의 사람이 모두 일어나 치는 박수는 기분이 아주아주 묘했다.
“이, 이거 잘했다고 하는 거 맞죠?”
허훈이 말까지 더듬는 걸 보니.
얼떨떨한 기분은 나 외에도 <처절한 인생> 팀이라면 모두가 느끼고 있나 보다.
“그렇겠죠?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하하.”
영화를 좋아해 주는 거 같아 기쁘긴 한데 굉장히 낯설었다.
칭찬에 인색한 한국에서 나고, 자라서 더 그런가?
카메라가 코앞에서 찍고 있으니 울상을 지을 수도 없는 노릇.
이안은 그렇게도 연기를 잘하면서 지금은 어색해서 죽으려고 한다.
정 PD는 어느새 카메라 뒤로 가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었다.
“와아! 재밌다! 멋있다! 수상 가즈아아!!”
얄미운 정 PD가 함께한 그 기립박수는 그 후로도 15분이 더 이어졌다.
그리고······.
사실 칸 영화제에서 기립박수는 매너와도 같았다.
영화의 퀄리티가 높아서, 흥미로워서라기보다는 그저 촬영하느라 고생한 스태프들의 노고를 알아주는 의례적인 행위에 불가했다.
의미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나 모든 영화에서 기립박수는 필수로 나온다.
그러나.
이 기립박수도 유일하게 의미 있는 상영회가 있다.
바로 공식 상영 이후 진행되는 기자 상영.
기자 상영회에 참여하는 기자들은 정말로 까다롭고, 예민하다.
재미없는 영화에 야유는 기본이고, 상영 중에 나가는 일조차 빈번했으니 말이다.
이들에겐 매너 따윈 지킬 시간이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영화를 보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자국민들에게 알려야 하는 기자들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하여튼 이 기자 상영에서 모든 기자가 일어나는 기립박수는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이렇게 알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다급하게 내 방을 찾은 송우준 팀장이 이런 소식을 전하기까지는.
“대표님! 기자시사에서 기립박수 터졌답니다! 그것도 모조리 다 일어났대요! 한 명도 빠짐없이요! 지금 리뷰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던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