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때를 기다리며
“그 이야기 들었어?”
“응? 무슨 이야기?”
“최 과장 퇴사한 이유 말이야.”
“뭐 산티아고 순례길인가 간다고 들었는데? 버킷리스트라나 뭐라나. 그것 때문에 그만둔 거 아니래?”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다고 하던데?”
“에엥?”
담배를 피우던 두 사람은 옥상을 한번 둘러봤다.
다행히 다른 직원들은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먼 곳에 있었다.
그럼에도 한 명은 귀를 가까이 대라는 시늉을 했다.
“<안전지대> 표절이라잖아.”
“뭐어?!!”
비밀을 들은 남자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큰 소리로 놀랐고.
말한 남자는 누군가 들었을까 봐 주변부터 살폈다.
“아, 이 사람아! 조용히 좀 해!”
한 명이 가까스로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물었다.
“이거 믿을 만한 거야?”
“뭐, 아직 확실치는 않은데, 배급팀 직원한테 직접 들은 거니까 마냥 카더라는 아닐 거야.”
“와, 그럼 최세준 과장이 책임지고 나간 건가? 아니지, 근데 또 촬영하고 있잖아? 오늘 아침에도 홍보용 기사 올라온 걸 봤는데?”
“최세준이 표절 사실 까발리려고, 팀장한테 갔는데, 팀장 선에서 자른 거지.”
“진짜? 개봉해서 표절 알려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회사 이미지야 조금 깎기겠지만, 내 알 바냐. 배급팀만 뭐 되는 거지.”
“하긴. 우리가 그런 걸로 무너질 사이즈도 아니고, 근데 배급팀 팀장은 조금 꼬시다.”
“응? 왜?”
“자기네 팀에서 시나리오 선정됐을 때 어깨가 이렇게나 올라가서는 난리도 아니었잖아.”
어깨를 쫙 펴고 거들먹거리는 동료 때문에 남자는 하마터면 마시던 믹스커피를 뿜을 뻔했다.
“풉! 야아! 와, 진짜 똑같아! 하하!”
“아, 맞다! 그건 들었어?”
표절 이야기에 열을 올리던 둘의 대화는 금세 다른 사내 가십거리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날 옥상, 휴게실, 1층 카페, 회의실, 심지어는 업무 종료 후 회식 자리까지.
YJ E&M 직원들의 주된 화제는 모두 동일했다.
*
『이번엔 칸이다! 허훈의 ‘처절한 인생’ 초청. 수상 후보까지 관심 쏠려』
『‘처절한 인생’ 작품성 해외 수상으로 인정받을까?』
『도대체 ‘처절한 인생’의 국내 개봉은 언제? 아직도 미정』
『돌풍은 이제 시작이라는 평론가들의 공통된 의견』
“대표님! 같이 가실 거죠?!”
차분해졌던 허훈은 요 며칠 다시 운서대를 다니던 학생처럼 호들갑 떠는 일이 많아졌다.
뭐, 이해는 한다.
<처절한 인생>이 칸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무려 허훈이 감독상 후보에 올랐으니까.
전생에서는 각본상 수상으로 화제가 되었으니 조금은 다른 행보다.
상의 영예를 일일이 따질 수 없으나 굳이 따지자면 각본상보다는 감독상이 조금 더 높다고 볼 수 있었다.
허훈은 내가 잠시 말이 없자 같이 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되물었다.
“많이 바쁘세요? 이안 씨랑 이야기했는데 대표님은 꼭 같이 가주셨으면 해서요.”
“시간이 되면 당연히 가야죠.”
영화제가 5월 중순이었으니 딱 한 달 남았다.
그리고 영화제만큼이나 중요한 <처절한 인생>의 개봉은 7월 초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배급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YJ E&M에 맡겼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할 일이 좀 많았다.
다른 배급 루트를 찾아야 했고.
찾는다고 해도 손발을 맞춰보지 않았으니 신경 써야 할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허훈에게는 ‘시간이 되면’이라고 답한 것이다.
“꼭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나도 칸에 초청된 건 처음이니 꼭 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열심히 발로 뛰면 된다.
“예. 오랜만에 나은 대표님 뵙겠네요? 이야기해놓을 테니 준비 잘하고 계세요.”
꾸벅 인사를 하며 나가는 허훈의 뒷모습을 보니 최근 들은 그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주호라는 아직은 젊은 청년입니다.
이주호.
전생에선 아무리 망나니짓을 많이 했거니와 표절까지 할 줄은 몰랐다.
거기다 감독으로써 천재성을 인정받아 허훈과 라이벌로 회자되기도 했던 터라 그 충격은 더 컸다.
아마도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빠진 뒤 극복하지 못한 모양이다.
어쨌든 표절범이 이주호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안전지대>의 표절 사실이 어느 선까지 올라갔는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최세준 과장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퍼진 소문이 배인규 귀에까지 들어갔을지도. 아닐지도.
그러나 배인규가 알게 되는 시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금현석에게 YJ E&M이 연락할 것이 뻔했으니 차단하라고 했다.
이렇게 원작자를 회유하지 못하면 그들은 선택의 갈림길에 설 것이다.
하나는 표절 사실을 내부에서 인정하고, 영화를 포기하든 시나리오를 수정하든 방향을 바꾼다.
둘은 표절 사실을 무시하고 그대로 간다.
YJ E&M은 분명 후자를 택할 게 뻔했다.
영화를 포기하는 건 최악의 수단이기에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이고.
해봤자 시나리오 수정일 텐데, 이 방향을 택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촬영 분량 중 사용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그럼 필요한 부분에선 준비를 다시 한 뒤 재촬영해야 하고, 스케줄을 전면 조정하는 등.
수없이 생길 변수는 모두 돈이었다.
그들은 표절보다 손해를 보는 쪽을 더 혐오할 게 분명하다.
내가 전생에서 겪은 YJ E&M은 그랬다.
이익을 위해 약자를 밟고 올라감은 물론이요.
써먹을 때로 써먹다가 이용 가치가 없어진 사람이나 손해가 될 것 같은 일에는 철저하게 손을 뗐다.
그런 그들과 지금까지 손을 잡아 왔던 이유는 이번 생엔 내가 먼저 그들을 이용하려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저 묵묵히 때를 기다리며 차근히 준비만 하면 됐다.
*
“대표님! 연락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처음 보는 남자는 살갑게 웃으며 자신의 명함을 꺼내 건넸다.
[캐리엔터테인먼트 배급팀 전동현 과장]
준비하고 있던 내 명함도 그에게 건네며 웃어 보였다.
“미팅 연락 흔쾌히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캐리엔터는 배급 건으로 우리 쪽에서 한번 거절한 적이 있었기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
그런데 마주한 전동현의 태도가 생각보다 적극적이라 다소 당황스러웠다.
“당연하죠! 저희가 얼마나 모셔오려고 했는지 아십니까? 사실 저번에 한 번 거절하셔서 먼저 연락드리기가 죄송스러웠는데 이렇게 찾아주시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하하.”
배급팀 사람들은 다 이렇게 밝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건가.
“아, 물론! 저희 이렇게 기다렸으니 오늘 미팅 잘 부탁드린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제가 더 잘 부탁드려야죠.”
뭔가 최세준과의 첫 미팅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전동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밝은 사람.
같은 공간에 있으면 그 에너지가 나한테까지 전이되는 사람.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이다.
“자, 그럼 말씀하신 <처절한 인생>부터 천천히 이야기해보시죠.”
*
2주 후.
“신 대표! 여깁니다!”
양상철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잘 지내셨어요?”
꾸벅 인사를 하고, 일어서자 그가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그럼요! 신 대표는 이번에 칸 간다면서요?!”
“예. 어쩌다 보니 저도 가게 됐습니다.”
“어유! 당연히 가야지요! 갔다 오면 술 한잔합시다! 자랑도 좀 듣고요. 허허!”
“알겠습니다.”
<처절한 인생> 국내 배급이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어 나는 칸 영화제 스케줄을 맞출 수 있었다.
2주 전 전동현 과장과 약 2시간에 걸친 오랜 대화 끝에 얻은 결과는 이랬다.
<처절한 인생>은 캐리엔터에서 배급한다.
이외에도 그는 좋은 관계를 쭉 유지해 이후 개봉하는 아라비안필름 영화의 국내 배급까지 같이 한다면 정말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처절한 인생>이 이미 영화판에서 큰 화젯거리였고.
아라비안필름이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좋아 얻을 수 있는 결과였다.
또 그는 뜻밖의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표님. 사실 저는 최세준 과장이랑 동문입니다.
어쩐지 그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했다.
-이번에 세준이 퇴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순례길이라니. 그 녀석답지 않은 선택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아무튼 저를 그냥 편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경쟁사로 넘어오시는 거라서 부담이 많이 되셨을 텐데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사이 양상철은 아까 사 온 팝콘을 와그작 씹으면서 물었다.
“아, 그것보다 그 이야기 들었습니까?”
“무슨 이야기요?”
“YJ E&M에서 제작하는 영화 말입니다.”
“<안전지대>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예! 맞아요! 맞아! 그거요!”
“그게 왜요?”
그는 이번엔 콜라를 쪼옥 한 모금 마시더니 답했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라던데요?”
“엉망진창이요?”
“예. 조용한 회차가 없다고 합니다. 매 회차 사건, 사고에 감독이 입봉이라 촬영은 계속 늘어지고, PD는 예산 마이너스 날 것 같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더라고요?”
하긴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200억 영화로 시작하는 건 무리였다.
“그런가요? 큰일이네요.”
“몇몇 팀은 도저히 못 해 먹겠다면서 집에 갔답니다. 촬영 시간이 24시간 넘어가는 날도 있다고 하니 쌍팔년도도 아니고, 스탭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24시간은 좀 심한 것 같은데.
노동청에 신고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참.
“상황이 좀 심각하긴 하네요.”
“그래서 요즘 현장 스탭들 사이에 아라비안필름 이야기가 꾸준히 나오고 있답니다.”
“예? 저희요?”
생뚱맞은 전개였다.
“그럼요! <안전지대>뿐만이 아니라 다른 현장도 심한 곳은 여전히 심하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아라비안필름은 이렇게 하던데, 저렇게 하던데. 하면서 비교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음, 이걸 좋은 현상이라고 봐야 하나.
“하여튼 지금도 그랬지만, 다음 영화부터는 번호표 뽑고 기다려야 하는 스탭들로만 꾸릴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서로 하겠다고 나서면서 경쟁도 심해질 거고요.”
그렇다면 우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럼 정말 좋겠네요.”
내가 슬쩍 웃자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구, 시간 다 됐다! 그럼 들어가죠!”
양상철과 앉아 있던 VIP 대기실을 나서니 영화관은 입장을 기다리는 기자, 관계자들로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 많이 불렀나 보네요?”
“불렀다기보다는 시사회 오고 싶다는 인원이 하도 많아서 규모를 좀 더 키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할리우드 영화라 그런지 국내 관심이 대단하다.
“아람 씨는 아직 미국에서 활동 중인 거죠?”
“그렇죠. 곧 있으면 투어 때문에 아마도 몇 달은 더 못 들어올 것 같아요.”
그린 애플은 현재 빌보드 1위를 유지 중이다.
그나저나 영화가 유독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람의 캐릭터를 위해 미국까지 날아가 함자를 만나 잘 해결했고.
전생과 확연히 다른 ‘퍼플’을 창조해 냈을 테니 그 모습은 과연 어떠할까.
영화에 집중하려고 양상철이 권하는 팝콘도 거절했다.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입장한 우리는 영화관 직원의 안내로 자리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영화가 잘 나왔어야 할 텐데.”
양상철은 근심 반, 기대 반의 얼굴을 한 채 팝콘으로 마음을 달래는 중이었다.
“잘 나왔을 거예요.”
<블랙히어로즈>는 사실 ‘퍼플’ 캐릭터만 아쉬웠던 정도지.
전 세계 흥행을 주도했던 영화다.
이후 시리즈로 계속 제작되기도 하고.
어둠이 내려앉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블랙 히어로즈>.
영화의 시작은 사막 한가운데서 진행되는 전투신.
외계 괴물들에게 쫓기는 5명의 사람.
각자의 능력을 이용해 괴물들을 따돌리고 있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역부족이다.
그때.
한 남자가 무리 중 어떤 여자를 특징해서 부른다.
“퍼플! 어디로 가야 하지?!”
그녀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모래바람을 피하고자 쓰고 있던 고글과 스카프를 벗으니 그 얼굴이 드러난다.
순간 극장 안은 짧은 함성이 들려왔다.
뽀얀 피부의 오뚝한 콧날.
전체적인 화장을 진하게 하지 않아 더 아름다운 그 얼굴은.
대한민국 현직 걸그룹 아람이었다.
“적당한 장소를 알아! 이쪽으로 가자!”
아람으로 재해석된 ‘퍼플’은 극장 안 모두의 눈에 담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