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96화 (96/140)

#96화. 인생은 정말 요지경

맞은편에 최세준은 가만히 내 말을 듣기만 했고.

우리 사이에 있던 테이블 위에는 종이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비밀 서약서]

나는 그의 약속을 받아낸 뒤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때 그런 말을 해드린 겁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최세준은 걱정한 것보다 담담했다.

“그렇군요······.”

“예.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못한 건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안전지대>의 표절은 제가 한 구절을 인터넷에 검색만 해봤어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저를 믿지 못하신 것도 당연하지요.”

사실 최세준의 잘못은 그리 크지 않다.

그저 시나리오를 처음 접했을 때 표절을 확인하지 못한 것.

내게 정보를 유출한 것.

이 두 가지 정도뿐이고, 진실을 알고 난 뒤에는 바로 잡으려고도 노력했으니 상쇄되고도 남는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표절한 당사자와 최세준의 보고를 들었음에도 묵살한 YJ E&M.

우리는 잠시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며 서로 다른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 짧은 침묵을 깬 건 최세준.

“그런데 <안전지대>와 같은 내용의 영화가 촬영 중이라는 건 조금 충격적이네요. 이건 뭐 손 떼고 안 나왔으면 제가 다 뒤집어쓸 뻔했습니다.”

그 말대로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나 단정 지을 수 없으니 대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으로 대신했다.

대신 어려운 결정을 한 그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그날 전화하셨을 때 뭘 고민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아, 그렇네요. 대표님은 다 알고 계셨으니······.”

그는 치부를 들킨 듯 멋쩍어했다.

“예. 그때 저는 과장님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습니다.”

“제 선택을요? 무슨······?”

그런 그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그냥 최 과장님은 잘못을 알고도 두고 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저는 생각하시는 것처럼 깨끗한 사람이 아닙니다.”

“최 과장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전화해서 그런 질문을 한 그 자체로 알 수 있었습니다. 죄책감이 드셨겠죠.”

최세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모두가 그 일에 당연한 죄책감을 느꼈습니까?”

잠시 허공을 보던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네요. 모두가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요. 과장님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신 겁니다.”

그가 내게 머뭇거리며 물었다.

“잘한 거겠죠······?”

“무슨 선택이든 후회하지 않는다면 좋은 선택인 겁니다.”

그 말에 최세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은 아주 또렷했다.

“후회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럼 된 겁니다.”

나와의 대화를 통해 그는 마음 정리를 얼추 한 얼굴이었다.

“대표님. 정말 죄송하지만, 해주신 제안은 잠시 미뤄도 될까요?”

아라비안필름은 그에게 곧 신설될 투자배급 팀장직을 제의했다.

그런데 거절이면 거절이지. 미룬다는 건 또 뭘까?

“품고만 있던 꿈이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려면 두 달 정도는 시간을 내어야겠더라고요.”

최세준은 상상만 해도 행복한 듯 빙긋 웃었다.

“그런 이유라면 당연히 가능합니다. 넉넉히 3달 뒤라고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대화를  마쳤고, 최세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간과하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아, 그런데 과장님 <안전지대> 연출자 이름이 뭡니까?”

무심코 한 질문의 답은 아주 뜻밖이었다.

“아, 제가 그건 말씀 안 드렸군요? 이주호라는 아직은 젊은 청년입니다. 나이는 30살 정도였던 거 같아요.”

어쩔 때 보면 인생은 정말 요지경 같기도 하고.

인연은 참 끈질기기도 하다.

*

<기적>은 <안전지대>보다 정확히 2주 빨리 촬영에 들어갔다.

출연하고 싶다는 배우들의 연락이 많이 온 덕분에 조연 캐스팅은 순조롭게 완료할 수 있었고.

권현미와 리암 스미스의 여러 가지 할리우드 노하우 덕분에 촬영 준비는 말할 것도 없이 원만했다.

또 제작한 영화들이 늘어남에 따라 아라비안필름도 틀이란 게 잡혀가면서 조금 더 전문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노흥기와 리암은 도자기로 많이 친해졌는지 촬영 중 잡음 또한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인 촬영 감독에 대한 거부감이 있던 스태프들도 모두 그를 좋아한다는 풍문까지 들려왔다.

<기적>은 그렇게 순탄한 촬영이 계속되고 있었고······.

“와! 대박! 저기 아라비안필름이라고 적혀있는 거 좀 봐요!”

나경이 가리키는 곳은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인 빌딩의 꼭대기였다.

깔끔한 검은색의 알파벳 간판은 정갈한 모습으로 빌딩에 붙어 있었다.

한주건설에서 참 깔끔하게도 달아놨다.

-간판은 진짜 중요해요. 지나가는 사람들 눈길을 끌면 소소하지만, 홍보도 되고요.

“자자, 들어가서 내부도 구경해보자고요!”

예정우의 재촉에 직원들은 우르르 안으로 향했고.

그들은 꾸며놓은 사무실을 보고 입이 떠억 벌어져서는 한마디씩 꺼냈다.

“저희 진짜 여기서 일하는 거 맞죠?!”

“이게 다 몇 층이야? 4층부터 다 쓰는 거예요?!”

“와! 여긴 휴게실! 안마의자도 있어요!!”

“회의실 넓은 것 좀 봐!”

강남역 빌딩으로의 정식 출근이 시작되었다.

첫 출근이다 보니 새로운 사무실을 구경하고, 적응하느라 다들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1층에는 카페가 들어온 거예요?”

예정우에게 묻자 그는 핸드폰을 들어 이것저것 내게 보여줬다.

“네. 요즘 잘 나가는 브랜드라고 하더라고요.”

[크로스타]

몇 년 뒤 마케팅의 성공으로 쭉쭉 성장하는 브랜드였다.

그 인기에 힘입어 ‘크로스타’를 입점시킨 빌딩은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에 따라 입점은 점점 하늘의 별 따기 정도로 힘들어지는 브랜드였다.

예정우는 그런 것까진 모르고, 카페면 괜찮겠다 싶어서 오케이 했단다.

참, 타고난 운이 좋은 사람이다.

“좋네요.”

“2층이랑 3층은 각각 미용실이랑 헬스장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이 또한 선호하는 업종들이었다.

괜찮은 생각도 떠올랐다.

“입점주님들이랑 협의해서 직원들 복지 포인트 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복지 포인트요?”

“예. 한 달에 얼마씩 정해서 다들 원하는 곳에서 쓸 수 있게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오, 직원들이 진짜 좋아할 것 같은데요?”

예정우가 벌써 적정 금액으로는 얼마가 좋을지 손가락까지 접어가며 심오한 고민을 시작하길래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래. 이참에 나도 머리 좀 해야겠다.

*

“레디! 액션!”

이주호는 동시녹음이 연결된 헤드폰에서 나오는 소리를 유심히 들으며 앞에 놓인 모니터에 쏘옥 빠져들어 갈 듯 몸이 기울었다.

“컷.”

그의 힘없는 ‘컷’ 소리가 들려오자 옆에 앉아 있던 스크립터가 무전기를 들었다.

“컷입니다. 컷.”

그 무전기 소리는 현장 곳곳으로 퍼졌고.

사람들은 오매불망 고대하는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 말을 절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한 번만 더 갑시다.”

원하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나직한 한숨들이 현장을 가득 채웠다.

<안전지대>의 크랭크인도 벌써 2주가 지났다.

평균적인 영화는 1주일에 대략 5회차 분량을 촬영한다.

<안전지대>는 총 80회차로 4개월간 촬영할 예정이었고.

2주 정도 지난 지금 시점에선 10회차 분량의 촬영이 끝났어야 하지만.

이놈의 현장은 아직도 7회차 분량을 찍고 있다.

그 이유는 아주 복합적이고도 복잡했다.

촬영은 고작 2주가 지났을 뿐인데, 온갖 문제들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3회차 장소는 아예 어그러져 스태프들이 발도 디디지 못한 채 돌아갔고.

지진이 나면서 테이블 위에 어항이 떨어져 깨지는 장면에서는 출연자가 파편에 다쳐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마저도 대기하던 구급팀이 없어 급하게 제작팀 차로 갔으니 말 다 했다.

그 외에도 항상 현장에서는 자잘한 문제들이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가 연속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백업 메모리가 사라지는 기묘한 일까지 겪어야 했다.

그런데다 이주호는 한 장면당 최소 5테이크씩 찍어대고 있었으니 촬영 속도가 느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스태프들은 가뜩이나 아니꼽게 보던 젊은 입봉 감독 이주호를 더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렇다 보니 스태프들의 피로도는 점점 쌓여갔다.

피로도가 쌓이면 당연히 목소리가 높아진다.

목소리가 높아지면 현장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

그 분위기는 결국 영화의 퀄리티까지 영향을 미친다.

악순환의 반복이 단 2주 만에 시작된 것이다.

다행히 아직은 감독의 뜻을 묵묵히 따르는 스태프들이었으나 이주호는 온몸이 따가웠다.

그도 이런 내막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물며 2주 동안 자신의 실력이 형편없이 부족하다는 걸 여실히 느꼈는데.

현장에서 구르고 구르던 스태프들은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이 현장에서 가장 답답한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

최세준 과장은 표절 사실을 알고 퇴사했다고 한다.

YJ E&M은 자신을 집요하게 추궁하긴 했으나 영화를 아예 포기하진 않았다.

한순간에 무너지나 했던 입봉의 꿈이 다시 살아나니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은 순간이었다.

바뀐 담당자는 최세준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촬영이 끝나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매일 새로운 담당자에게 그날 하루 촬영에 대한 보고를 직접 해야 했다.

그러고 끝나면 다행인데 담당자의 잔소리는 기본이 두 시간이었다.

스태프들뿐만 아니라 이주호의 예민함도 극에 다다르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컷! 컷! 아! 진짜! 병용 씨, 여기서 웃지 말라니까요? 말귀를 왜 이렇게 못 알아들어요?”

주연 배우에게 화를 내버렸다.

“뭐? 말귀요?”

그런데 이주호는 몰랐다.

이병용도 이 바닥에선 꽤 알아주는 성질머리였던 것을.

“야! 상재야! 차 어딨어!!”

감독이 얼마나 많은 걸 감내해야 하는 위치라는 것을.

상황이 심각해지자 <안전지대>의 PD가 와서 수습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병용 씨. 왜 그래요.”

“PD님. 저 못 해먹겠습니다. 감독님, 감독님 해주니까 뭐라도 되는 줄 알지 않습니까! PD님이랑 YJ 믿고 온 건데! 이래도 되는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영화가 잘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PD는 베테랑이었다.

“영화야 잘 나오게 만들면 되죠. 잠깐만 우리 저기 가서 커피나 한잔하면서 열 좀 시킵시다.”

이병용이 PD와 자리를 뜨자 조감독이 외쳤다.

“잠깐 쉬는 시간 갖겠습니다!”

이주호는 한층 더 따가워진 시선에 ‘감독 이주호’라는 오버로크가 새겨진 의자 위로 풀썩 몸을 숨겼다.

‘허훈 그 자식은 도대체 이걸 다 어떻게 한 거야.’

<처절한 인생>의 기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쇄도하고 있었다.

<안전지대> 기사도 많이 올라왔지만, 돈의 결과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그 차이가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주호는 지금 이 순간이 마치 지옥 같다고 느끼며 더욱더 몸을 웅크렸······.

“감독님!”

눈앞엔 이병용과 사라졌던 PD의 얼굴이 흐릿하게 놓여 있었다.

“지금 잠이 오세요?”

잠시 잠이 들었나?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이주호 옆에 앉은 PD.

PD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또 현장에 혼자 돌아온 걸 보니 이병용은 집에 간 모양이다.

“사고가 나든 배우가 집에 가든 예정되어 있던 촬영이 취소되면 얼마가 손해인지 아세요? 자그마치 2억입니다. 2억. 그것도 최소치로요!”

이를 시작으로 이주호는 예산에 대한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잔소리로 태도가 고쳐질 그였다면 벌써 무슨 노력이라도 했겠지.

이주호는 하도 잔소리를 많이 들어 자신만의 대피 방법까지 생겼다.

듣고, 흘리고, 딴생각하기.

그의 머릿속엔 그저 ‘칸 영화제’에서 수상하면 어떤 소감을 해야 할까.

이상만이 가득했다.

같은 시각.

강남 아라비안필름 대표실.

“대표니임!!”

이 과장은 숨을 헐떡이며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왔다.

“으응? 큰일이라도 났어요?”

“네! 큰일! 진짜 큰일 났어요!”

그러더니 그는 말도 잘 안 나오는지 단어를 나열했다.

“칸! 후보! 초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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