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95화 (95/140)

#95화.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앞에 앉은 이주호는 말까지 더듬으며 자신의 죄를 실토했다.

블로그 글을 고대로 가지고 온 것이 맞으며 잘못된 일인 줄 몰랐다는 변명.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아······.”

어젯밤 블로그 글을 확인한 뒤 최세준은 한숨도 못 자고 다시 회사로 나왔다.

이주호에게 자초지종을 묻기 위해 당장 불렀고.

<안전지대>는 완전한 표절이 맞았다.

최세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부터 잘못됐고, 이 사태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앞에 앉은 이놈부터 한바탕 족치려다가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자신의 잘못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이주호는 눈치를 밥 말아 먹었는지 그 와중에도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그럼 이제 저는 입봉 못하는 겁니까?”

지금 입봉이 문제가 아니거늘.

사회생활 한번 안 해봤다고 하더니 그의 행동은 정말로 어렸다.

“이주호 씨. 당신은 양심도 없습니까? 영화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해야 할 사안에서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요?”

최세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읽지도 않는 글이었습니다. 제가 시나리오로 쓰면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보게 되는 거 아닙니까.”

이주호의 대답에 최세준은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대화라는 게 통하지 않는 놈이었다.

욕지거리할 가치도 없다.

“당신 여기 꼼짝 말고 있어. 팀장님께 보고하고 올 테니까.”

이주호가 제발 그러지 말라는 눈빛으로 그를 붙잡을 기세였다.

그러나 최세준은 그런 그가 꼴도 보기 싫어 쌩하니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밤새도록 심각하게 고심한 최세준의 결론은 이거였다.

이대로 진행할 수는 없다.

200억의 예산이 투자된 대형 프로젝트였으나 나중에 표절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더 큰 손해로 다가올 것이다.

다행히도 아직 촬영 전이라 200억을 다 쓴 것도 아니었다.

물론 계약한 건들이 많아 위약금을 물어줘야겠지만, 어쩌겠는가.

이 문제는 회사 측에서, 또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였다.

단숨에 팀장실까지 걸어간 최세준은 문고리를 잡고, 돌리기 전에 다시 한번 자신에게 물었다.

‘퇴사해야 할 수도 있어.’

자신의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코피까지 쏟아가며 열심히 준비했던 취업.

합격 문자를 받고, 기뻐하시던 부모님.

첫 출근 날 맡았던 새벽 공기.

동기들과 상사들 뒷담화를 하며 고주망태가 되었던 금요일.

비록 혼나고 깨져도 차근차근 연수를 채워가며 승진하던 날.

과장이라는 자리까지 오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이 없다는 것.

‘결혼 안 한 게 좋을 때도 있네.’

어차피 할 여자도 없었다.

최세준은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팀장실의 문을 열었다.

“뭐어?!”

팀장의 큰소리는 당연히 나올 줄 알았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조금 더 확실하게 알아봤어야 하는데.”

혹시라도 날아오는 물건이 있을까 봐 양팔로 얼굴부터 가렸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날아오는 건 없었다.

“최 과장. 그래서 자네 나한테 이걸 보고하는 저의가 뭐야?”

팀장의 반응은 아주 예상외였다.

“그야 당연히 <안전지대> 준비를 멈춰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이 자식이!!”

그제야 무언가가 날아와 최세준 머리에 퍽-! 하고 부딪혔다.

바닥에 데구루루 구르는 건 사무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조그마한 미니가습기였다.

“네가 뭔데 스탑을 결정해?! 너 지금 이게 무슨 프로젝트인지 몰라? 회장님 지시라고! 회장님! 누구 모가지 잘리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맞으면서 가습기 안에 있던 물이 새 나왔는지 최세준 머리카락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블로그 글을 베꼈다고? 막말로 그거 누가 알겠어?! 어! 당장 주인 찾아서 입막음하면 될 거 아니야!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이 자식이 그냥 안된다고 포기부터 하면 돼?!”

최세준은 팀장의 꾸중을 묵묵히 감내하며 대꾸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팀장은 자신이 너무 심했나 싶었는지 좀 전과 확연히 다르게 나긋해진 목소리로 최세준을 불렀다.

회유할 방법을 바꿔보려는 게 분명하다.

“최 과장. 그러니까 내 말은 이걸-.”

“저는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최세준은 팀장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지시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뭐?”

“제가 언제 팀장님 뜻 거스른 적 있습니까.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걸로 기억합니다.”

최세준은 마치 빵빵한 풍선 같던 자신의 몸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정말로 못하겠습니다.”

팀장은 한 번 더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최 과장.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봐. 너 이번에 이 건만 잘 마무리하면 무조건 승진이라고. 알잖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승진 욕심으로 죽을 만큼 노력도 했고요. 그런데 살면서 중요한 건 승진뿐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팀장은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걸 누가 모르냐?! 너만 청렴결백해?! 회사 생활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 저런 일 다 양심 챙겨가면서 하냐고!”

“저는 이번에 그 양심 챙기려고요.”

그는 평소 같지 않은 강단 넘치는 말투였다.

이미 모든 생각을 굳혔다는 뜻.

“아! 그래서! 뭐 어떻게 하겠다고!!”

“팀장님 선에서 제 의견을 묵살하신다면 당연히 <안전지대>는 계속 진행되겠죠. 그래서 저는.”

최세준은 팀장을 노려봤다.

“퇴사하겠습니다.”

“야!!”

팀장의 고함이 곧바로 날아왔으나 그는 뒤로 안 돌아보고 팀장실을 나왔다.

자리로 향하는 발걸음이 오랜만에 가벼웠다.

‘그래. 역시 대표님 말이 맞아. 잘한 거야.’

*

해외팀이 일주일의 출장을 마치고, 귀국했다.

『허훈 감독 신작 ‘처절한 인생’ 개봉하기도 전에 97개국 선판매 성공』

『‘처절한 인생’ 놀라운 기록에 대중들 관심 증폭』

『아라비안필름. 믿고 보는 제작사 타이틀 이번에도 유효할까?』

97개국 선판매라는 대단한 기록을 세우고 온 해외팀 덕분에 <처절한 인생>과 아라비안필름은 한바탕 화제가 되었다.

요즘 영화계에서 핫한 이슈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었다.

<처절한 인생>과 YJ E&M에서 곧 크랭크인 준비 중인 <안전지대>.

『YJ에서 만드는 재난 영화. ‘안전지대’ 기대 폭발!』

『‘안전지대’ 배우 이병용과 송소리 캐스팅 완료』

『한국형 재난 영화의 탄생. ‘안전지대’의 기대 요소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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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 E&M은 영화 중단은커녕 엄청난 물량 공세로 홍보에 매달리고 있었다.

반면 우리는 <기적>을 꽁꽁 감추고 있었다.

내일이 바로 크랭크인이었는데도 말이다.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고.

기대를 주면 줄수록 실망이 큰 법이다.

촬영도 들어가지 않은 영화를 지금부터 저렇게 많이 홍보하게 되면 대중들은 오랜 시간 영화를 기대하게 된다.

이때, 요상한 건 점점 커지는 기대감으로 변화하는 사람들의 심리다.

기대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이 영화는 재밌어야 한다.

꼭 그래야만 한다.

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

물론 이래놓고, 영화가 너무 재밌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막상 까본 영화가 별 볼일 없는 빈 수레라면 이들은 배신감을 느끼며 흑화한다.

그래서 이게 이 정도의 혹평을 들을 정도인가? 하는 기분이 드는 영화가 있다면 이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안전지대>의 이런 공격적인 홍보는 득과 실이 분명했다.

업무를 보고 있던 나는 알람이 뜬 메일함을 확인했다.

최세준 과장이었다.

메일을 확인한 나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최세준입니다.

제가 이번에 개인 사정으로 퇴사하게 되어 안내차 메일을 보내드립니다. 새로운 담당자가 인수인계 후 연락을 드릴 예정이오니 참고 바랍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결국 최세준은 <안전지대>를 멈추지 못하고, 무리를 나오는 방법을 택한 모양이다.

며칠 전.

12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각.

최세준 과장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대표님.

-아닙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다른 게 아니고, 뭐 하나 여쭤보고 싶어서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대표님이 답을 제일 잘 알 것 같았습니다.

나는 순간 그가 궁금한 것이 무엇이며 듣고 싶다는 ‘답’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뭐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 혹시 준비하던 영화가 표절인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맨 처음 <안전지대>의 표절 사실을 최세준에게 바로 알리지 않은 건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블로그 글을 누군가가 표절해서 최세준이 발견했다고 해도 그는 정말로 몰랐을까?

아니면 설마 그가 이 일을 주도한 것은 아닐까?

만약 알고도 한 행동이라면 내가 그에게 알리는 순간 우리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금현석의 글을 되찾고, 연출자와 YJ E&M에 죄를 묻는 것의 쟁점은 영화를 누가 먼저 개봉하느냐의 시간 싸움이었다.

그리고 시간 싸움에서 제일 중요한 건 정보력이다.

이쪽은 알고, 상대방은 모르게.

이것이 핵심이었으니 최세준에게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날 최세준의 물음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고.

정말로 자책하며 신중히 고민하는 목소리였다.

그는 진정으로 표절을 모른 채 가담했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은 단 한 가지.

-당사자에게 물어봤는데도 표절이 사실이라면 저는 바로잡기 위해 영화를 포기하겠습니다. 세상에 재밌는 스토리는 무궁무진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얽매이지 않아야겠죠.

내 대답에 최세준은 중얼거렸다.

-역시······. 대표님은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렇게 전화는 끊겼고.

최세준은 아마 상사에게 표절 사실을 보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받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았겠지.

결국 회사를 나가는 건 사태를 바로잡으려던 최세준이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밖에 있던 예정우를 찾았다.

“부르셨어요?”

내게 묻는 그에게 도리어 물었다.

“이사님. 대기업 배급팀 과장급의 경력직이 저희 회사로 오면 도움이 많이 될까요?”

예정우는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음, 배급팀 과장이면 이것저것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은데요? 거기다 대기업이면 시스템도 체계적일 테니 저희 규모 키우면서 벤치마킹하기에도 쉬울 것 같고요.”

“역시 그렇겠죠?”

예정우가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구 데리고 올 분 있으세요?”

“예. 이사님도 아는 분이에요.”

아는 사람이라니까 예정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곤 곧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지 냉큼 물었다.

“혹시 YJ E&M 최세준 과장이요?”

퇴사 메일은 예정우도 받았을 거다.

그 물음에 씩 웃으며 답했다.

“예. 맞습니다. 조건 잘 맞춰서 저희 쪽으로 데리고 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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