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94화 (94/140)

#94화. 힘겹고도 역사적인 일

“감독님. 이번 작품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허훈은 담담한 웃음을 지었다.

“고생이야 스태프랑 배우들이 했죠. 저는 그저 인복이 많은 사람일 뿐입니다.”

이런 모습에 사람들이 따른다는 걸 자기만 모르는 모양이다.

<처절한 인생>이 드디어 그저께 크랭크업했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으니.

전생에 비하면 약 5년이나 빠른 속도였다.

“후반은 이번에도 3개월 정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네. 그런데 편집을 어느 방향으로 진행하는 게 좋을까요?”

“방향이라고 하신다면?”

허훈이 아차, 하더니 말을 정정했다.

“아, 주어를 빼먹었네요. 등급 말입니다. 15세로 갈지. 아예 청불로 뺄지 고민이에요.”

관람 등급은 영화 흥행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높은 등급을 받을수록 관객의 폭이 좁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 기획 단계에서 어떤 등급으로 개봉할지 고민하고, 결정한 다음 촬영에 들어간다.

<처절한 인생>은 당연히 15세로 기획했다.

그럼에도 허훈이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촬영하다 보니 피 튀기는 장면 등 문제 될 부분이 많다는 내부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등급을 위해 장면을 모조리 편집하면 영화의 결이 달라진다.

등급은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접수하면 알아서 정해줄 것이니 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냥 감독님 감으로 편집하시죠. 등급 생각하지 마시고요.”

“그러다가 청불 나오면 흥행이······.”

“에이, 감독님은 원래 흥행 안 따지시잖아요. 저 때문이면 괜찮습니다. 항상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돈은 제가 걱정하겠다고. 청불 나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운명이었던 겁니다. 그걸로 흥행 못 하면 15세로도 안 될 영화였던 거고요.”

<처절한 인생>은 오직 그의 감각을 따라가야 전생과 비슷한 성적을 낼 수 있었고.

나는 그저 허훈의 천재성과 감을 믿었던 것뿐이다.

그런데······.

“<투명한 사랑>부터 쭉 느껴왔지만, 대표님은 정말 연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허훈의 반응은 감동을 웃돌아 감격에 가까웠다.

“대한민국 제작사 대표들이 다 대표님과 같은 마인드를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에게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런 나와는 다르게 허훈은 뭔가를 결심한 듯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의 비장한 눈빛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

“레디! 액션!!”

경기도 인근의 한 야산.

“으어어-.”

좀비 분장을 한 20명의 출연자는 조감독 신호에 맞춰 어기적어기적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특효(특수효과) 실장은 들고 있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펑!

펑!

퍼어어엉!!

퍼엉!

리허설 때 터지기로 했던 순서 그대로 야산 곳곳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미리 흙을 파서 심어둔 폭약이 좀비들 사이사이로 터져 흙먼지 파편과 함께 솟구쳐 올랐고.

좀비들은 그 여파에 쓰러지기도 하고, 와이어를 단 채 날아가기도 했다.

주인공 일행이 좀비에게 쫓기다가 지뢰밭으로 그들을 몰았다는 설정의 장면이었다.

폭약의 소리가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전 스태프들은 이어 플러그를 귀에 꽂고 있었지만.

몇몇 경험이 많지 않은 스태프들은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누구 하나라도 실수하는 날에는 중대한 안전사고가 날 수도 있었기에 촬영장은 극도의 긴장감이 흘렀다.

그렇게 준비했던 모든 폭약이 터지고.

“컷! 오케이!”

어차피 다시 갈 수 없던 장면이었으나 신서영의 오케이 사인은 우렁차게 들려왔다.

“오케이입니다!”

“다치신 분 계십니까?!”

“다들 괜찮으세요?!”

연출팀과 제작팀들은 혹시라도 다친 사람이 없는지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배우들의 안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속칭 지뢰밭 장면은 오늘의 마지막 장면이었고.

“촬영 종료하겠습니다!”

오늘도 고생한 스태프들은 짐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촬영도 무사히 끝났으니 키 스태프들에게 인사라도 할 겸 모니터 테이블로 향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 이번 영화는 특효가 좀 많죠?”

“하하, 특효가 많긴 하죠. 매일매일 특분(특수분장)에다 폭발에다 불까지 지르지.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썼나 싶다니까요?”

하얗던 피부가 어느새 많이 그을린 그녀는 웃으며 과거의 자신에게 묻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확실히 <왕국 : 역병의 시작>은 오늘 촬영과 같이 까다로운 장면들이 많았다.

불에 타는 좀비.

산탄총에 맞고 날아가는 좀비.

목을 매달린 채 움직이는 좀비.

상체만 남은 좀비.

등등.

평소 좀비 물 마니아라는 신서영이 자신이 보고 싶은 판타지를 모조리 쏟아 넣어둔 영화였다.

“그래도 할리우드 진출하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죠.”

장난 섞인 내 말에 신서영이 반응했다.

“그럼요! 우리나라도 특효 이만큼 발전했다는 걸 딱 보여줄 거예요!”

그녀는 말하면서 속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는지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하! 세계야 기다려라! 콧대를 아주 납작하게 해주마!!”

저런 오글거리는 멘트를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신기한 건 현장 스태프들은 다들 익숙한지 별 반응도 없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고덕현이 내 팔을 톡 쳤다.

“요새 신 감독 앞에서 ‘할리우드’에 ‘할’ 자도 꺼내면 안 돼요. 저렇게 급발진을 하더라고.”

미국을 한 번도 안 가봐서 저러나 싶어서 컴플릭스 두 번째 방문도 함께 한 거였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뭐, 미국진출이 대단한 거긴 하지.

“그나저나 신 대표님.”

갑자기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덕현의 시선이었다.

“예?”

“저번에 신 감독 차기작이 공포 서스펜스라고······.”

하하.

그의 분노가 조금씩 느껴지길래 일단 웃었다.

“좀비 물일 줄은 전혀 몰랐네요?”

“그게 말이죠. 촬영 감독님······. 하하하.”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 좀 나누시죠?”

그렇게 나는 고덕현에게 잡혀 인근 삼겹살집으로 향했고.

현장에서 그의 고충을 듣느라 새벽 2시에나 귀가할 수 있었다.

*

올해 새로 생긴 해외 팀이 첫 출장을 나갔다.

주된 목적은 <처절한 인생>을 마켓에서 판매하는 것이었고.

허훈과 나는 본편 편집 전에 예고편부터 그럴듯하게 만들어 그들의 손에 쥐여 줬다.

바이어의 눈을 사로잡을 영상 자료가 아예 없는 것보다는 확실히 나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일주일간의 출장을 떠난 날.

강남역 빌딩의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완전히 끝났다.

예정우에게 우리가 사용하지 않을 1~3층의 임차인을 본격적으로 찾아볼 것을 지시하고.

직원들과 상의해서 필요한 가구들과 생필품 등을 주문했다.

또 이삿짐센터가 와서 한 번에 짐을 가져갈 예정이긴 했으나 버릴 것들은 버리고, 가져갈 것들은 슬슬 챙겨 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쁜 나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와! 대에박!”

누군가의 목소리가 조용하던 사무실의 정적을 깨트렸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또 누군가의 궁금증을 시작으로 주변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린 애플 빌보드 1위 찍었대요!”

“네?! 진짜로?!”

마침 박지연에게 뭔가를 물어보려 나와 있던 나는 그들의 웅성거림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와! 이러다가 진짜 대표님이 말한 대로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그런데 진짜 신기하다. 우리나라에서 빌보드 1위 찍는 가수를 보다니!”

신기할 만도 하다.

한국 가수가 빌보드 1위를 하는 기염은 나도 회귀 직전에야 볼 수 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린 애플은 그만큼 힘겹고도 역사적인 일을 앨범 발매 한 달 반 만에 해낸 것이다.

“정말 진심으로 믿으면 이루어지기도 하잖아요. 사실 대표님이랑 나경 대리님이 1위 이야기하실 때는 조금 과하다 싶었거든요.”

당연하게 들법한 생각이었다.

“맞아! 그런데 역시 마음은 곱게 쓰고 봐야 한다니까요? 막말로 대표님은 그린 애플이 잘된다고 뭐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잘 될 거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니셨잖아요.”

이들은 내가 화분 엔터의 지분을 받은 걸 아직 모른다.

“하긴 해봤자 아람 씨 나온 영화가 조금 더 화제 되는 거 정도일 텐데.”

그러니 방금 이야기에 모두 동조하고 있는 거겠지.

“그나저나 9주 연속도 할지 진짜 궁금하다! 그렇죠?! 대표님!”

나는 그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흠, 기자 쪽은 연락 다 돌렸고.”

최세준 과장은 야근 중이었다.

YJ E&M 직원들에게 야근은 익숙한 것이었으나 <안전지대>를 맡고 난 후부터 그의 평균 퇴근 시간은 11시였다.

한쪽 벽에 걸린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10시 30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오늘 할 일은 얼추 끝났지만.

슬쩍 일어나서 팀장실을 확인해보니 그는 아직도 퇴근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인터넷 서핑을 시작하는 최세준.

최근 일에 치여 동호회 활동을 많이 하지 못한 그였기에 카페를 찾았다.

카페는 그새 신규회원도 늘었고, 회원들의 활동이 꽤 활발해진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자유게시판에 확인하지 못한 게시글들을 하나씩 정독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은 자신들의 취미를 공유하는 수다였다.

개중에는 동호회 활동 수칙 중 개선하면 좋을 거 같은 게시글도 있었기에 부회장으로써 반영하겠다는 댓글을 달던 중.

그는 뭔가에 이끌리듯 최근 올라온 한 게시글을 클릭했다.

[재밌게 보고 있던 블로그 글이 요즘 안 올라오네요.]

[소설 같기도 하고, 대본 같기도 한 블로그 글이 있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업로드되는 날마다 열심히 읽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주인장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안 올라오네요. 다음 내용이 너무 궁금한데······. 하여튼 저만 당할 순 없으니 회원님들께 공유합니다!

시간 되시는 분들은 한번 들어가서 읽어보세요! 추천!]

다른 회원들이었다면 스킨스쿠버 다이빙 동호회 카페에서 웬 글 추천?

하고 말았겠지만, 최세준은 달랐다.

영화를 업으로 삼고 있는 그에게 ‘재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성의 단어였다.

최세준은 다시 시계로 눈을 돌렸다.

10시 40분.

어쩜 이렇게 퇴근 직전 시간은 느리게도 가는지.

한숨을 쉬며 글쓴이가 같이 올려 둔 링크를 클릭했다.

그리고······.

잠시 후 10시 59분 59초.

11시가 되기 1초 전.

팀장실의 문이 열렸다.

“응? 다들 아직도 퇴근을 안 했나? 얼른 집에들 가게. 누가 보면 내가 붙잡아 놓고 있는 줄 알겠어!”

팀장은 얄궂은 말을 던지고는 홀가분하게 사무실을 떠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최세준 때문이었는데.

그는 팀장이 가든 말든 모니터를 뚫을 기세로 보고 있다가.

“으아악! 이게 뭐야?!”

뭔가에 상당히 놀랐는지 의자에서 나뒹굴며 떨어졌다.

그는 사색이 되는 것도 모자라 시퍼레진 얼굴색에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빛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최 과장! 왜 그러나? 자네?”

당연히 근처에 있던 팀장과 그가 얼른 퇴근하기만을 기다리던 직원들은 하나같이 놀라고 말았다.

최세준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곧 옷을 탈탈 털고, 일어났다.

“아, 아닙니다.”

말과는 다르게 여전히 그의 표정은 좀 전과 같았다.

팀장은 그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싱겁기는. 다들 내일 보자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런 팀장의 등판을 보면서 최세준은 생각했다.

‘와, 사고 제대로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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