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92화 (92/140)

#92화. 배우로 향하는 계단

-대표님께 제일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의 강주리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서아가 청룡영화제 후보에 올랐습니다. 신인여우상, 여우주연상 두 부문에서요.

-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고 한 거지.

이런 이야기를 진짜로 듣다니, 놀라웠다.

결과적으로는 상을 못 받게 될 수도 있지만, 이서아는 수상을 떠나서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아역배우가 된 것이다.

물론 둘 중 하나의 상이라도 타게 되면 최연소 수상자가 되기도 하겠지.

“어머, 우리 서아 드레스 잘 어울리는 것 좀 봐!”

이서아는 나은이 미리 준비해 둔 유아용 드레스들을 이것저것 입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아는 어떤 게 제일 마음에 들어?”

아이는 최종 후보까지 오른 5벌의 의상 앞에서 행복한 고민에 빠진 눈치였다.

“으음······. 나은 이모! 잠시만요!”

강주리와 대화를 통해 시상식 드레스는 나앤케이에서 협찬받기로 했고.

오늘은 최종 피팅을 위해 나경까지 합세해 나앤케이를 찾은 날이었다.

<어울림> 촬영 당시 커트 머리였던 이서아의 머리는 어느새 단발이 되어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길이가 되어 있었다.

“서아 머리가 많이 자랐네요?”

내 물음에 강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와 같이 멀찍이서 드레스 삼매경에 빠진 서아를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네. 그런데 이번엔 서아의 의지였어요. 연기를 계속하고 싶대요. 어떤 배역을 맡을지 모르니 머리는 기르겠다고 하네요.”

배역을 위해 머리를 기른다······.

이서아는 아역배우가 아닌 배우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선 모양이다.

“좋은 마인드네요. 차기작은 준비 중이십니까?”

“확실히 <어울림> 개봉 후에 들어오는 시나리오는 많아졌어요. 다 보여주고 있는데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서아가 정말로 하고 싶은 영화에만 출연하려고요.”

아역배우는 부모의 역할이 너무나도 중요하다.

아직 정신적으로 미성숙하기에 꾸준한 교육이 필요하다.

인지도가 생기고, 주변 스태프들의 대우를 받다 보면 아이들은 착각하게 된다.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구나.

지금에야 배우들의 인성 논란이 없으나 미래엔 인성이 캐스팅에도 영향을 미친다.

감독들도 성격 나쁜 배우들이랑 하기 싫어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강주리는 이서아에게 강한 교육을 하는 편이었다.

현장에서 아이가 무슨 잘못을 하면 단호하게 혼내던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서아 잘 될 겁니다.”

내 진심이 닿았는지 강주리가 미소 지었다.

“저는 서아가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미소는 진정으로 딸을 위하는 엄마의 사랑이었다.

“저는 이거! 이거 입을래요!”

그때 아이가 콕 집어 고른 의상은 의외였다.

“응? 우리 서아 이거 입는다구?”

“네!!”

씩씩한 아이의 얼굴에는 방금 엄마의 표정이 언뜻 보였다.

“공주 드레스는 별로야?”

나은이 들어 보인 옷은 드레스보단 귀여운 원피스에 가까웠다.

디자인이 굉장히 특이했는데 뒤에 지퍼가 달려 하나로 입을 수 있는 옷이었으나 앞면은 마치 투피스를 입은 것처럼 보이는 옷이었다.

상의는 턱시도 느낌으로 셔츠와 재킷, 넥 라인에는 나비넥타이까지 붙어 있었고.

하의는 검은색 미니스커트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전체적인 컬러는 흰색과 검은색이 조화롭게 부분적으로 배치된 그런 옷이었다.

“치렁치렁한 것보다는 이게 더 레드카펫 걷기에 편할 것 같아요!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이게 제일 이뿌기도 하고요!”

그것도 맞는 말이다.

자기 눈에 예쁘고, 편한 옷 입으면 되는 거지. 뭐.

우리는 모두 이서아 의견에 따라 만장일치로 의상을 확정했다.

*

요즘 들어 인천공항을 자주 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무려 리암 스미스가 우리 영화 준비를 위해 정식 입국하는 날인데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권현미는 오늘 외부 미팅 일정이 있어 나경과 함께 그를 마중하기 위해 나왔다.

“어디 보자. 나오는 데 얼마나 걸리시려나아.”

비행기 도착 현황판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나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엊그제 나앤케이에서 나은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은 대표님. 매번 감사합니다. 앞뒤 안 보고 무조건 해주는 협찬이라는 게 쉽지만은 않지 않습니까.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저 앞뒤 보고 협찬해드리는 건데요? 저희 브랜드 인지도랑 매출이 얼마나 뛰었는지 정확히 모르시죠? 아시면 정말 깜짝 놀라실 겁니다. 오히려 제가 대표님께 감사드려야죠.

이렇게 말해도 그녀의 도움은 초창기부터 줄곧 한결같았다.

그 변함없는 도움은 인지도와 매출 때문만이 아닐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한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대표님 처음에 찾아오셨을 때 말씀드렸던 것 같긴 한데.

그때만 해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몰랐다.

-나경이가 주변 사람을 제게 소개해 준 게 처음이었어요.

다행히도 이야기의 당사자는 멀리서 이서아와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가요?

내 물음에 그녀는 과거를 회상했다.

-네. 사실 나경이는 중학생 때 학교 폭력을 당했었거든요.

-예?

뜻밖의 단어에 놀랐다.

항상 밝은 나경에게서 떠올리기 힘든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어두웠어요. 저렇게까지 밝아진 건 다 영화를 시작하면서부터예요.

학폭의 무서움은 회귀 전에 간접적으로 느껴본 것이 다라 나경이 얼마나 힘겨운 학창 시절을 보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영화가 그런 순기능을 하기도 했다니 정말로 다행이다.

-그래서 그렇게 기뻐하셨군요.

사실 곱씹어 생각해보면 나은이 생판 모르는 우리를 위해 밤낮 새워 의상 제작까지 해주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던 대목이었다.

-네. 그리고 나경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영화를 지금까지도 좋아할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은의 진심은 내게 와닿았다.

뭐든 좋아하는 걸 일로써 접근하면 하기 싫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건 내가 잘해서라기보단 나경이 잘해준 것이다.

-아닙니다. 일을 즐기면서 한다는 게 나경 씨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나도 내 진심을 그녀에게 알렸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을 준비했는데 오늘 도착할 거예요.

응? 선물?

나은은 선물의 정체에 대해선 나앤케이를 나설 때까지 알려주지 않았고.

그날 저녁 우리 집엔 약 10벌의 핸드메이드 옷이 도착했다.

모두 나앤케이의 상표가 정갈하게 달린 모습이었다.

“어! 그런데 이거 나앤케이 옷 아니에요?!”

나은이 보내온 옷들은 또 하나같이 캐주얼한 게 딱 내 취향이어서 그 뒤로 자주 입고 다녔다.

나경은 그때마다 언니의 옷을 하나하나 찰떡같이 알아보는 중이다.

“저번에 가셨을 때 쇼핑 많이 하셨나 보다! 맞죠! 대표님?”

설마 나은이 이렇게 많은 옷을 선물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경이 밝히고 싶지 않을 이야기를 들은 것일 수도 있으니 굳이 말하진 않았다.

“예. 오랜만에 돈 좀 썼습니다. 하하.”

그때.

“어! 저분 아니에요?!”

미리 사진으로 확인한 리암 스미스의 얼굴을 찰떡같이 알아본 나경이 소리쳤고.

“신바드 대표님!”

그 소리에 또 우리를 정확히 찾은 리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저것보다 환하게 웃을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밝게 미소 지으며 양팔을 흔들고 있었다.

“리암!”

나도 그에게 반가운 손을 흔들며 생각했다.

자, 이제 <기적>의 크랭크인이 정확히 3주 남았다.

정면 돌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

노흥기와 이서아의 레드카펫 행진은 성공적이었다.

마치 할아버지와 손녀를 연상케 하는 케미를 보여줬으며 사람들은 그 밝은 에너지에 열광했다.

영화제가 생방송으로 진행되다 보니 둘의 레드카펫 사진이 첨부된 기사가 빗발쳤고.

특히나 이서아의 수상 여부로 연결된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이서아, 아역의 핸디캡을 벗을 것인가?』

『올해 파격적인 행보의 청룡영화제에서 유심히 봐야 할 것』

『최초 타이틀을 가져갈 아역배우의 범상치 않은 드레스』

『거장 노흥기 감독도 꼼짝 못 하는 이서아. 수상 가능할까?』

나는 관계자로서 시상식이 진행되는 국립극장을 찾았고.

1부가 끝나 광고 시간에 맞춰 잠시 노흥기와 이서아의 자리를 찾았다.

“서아야! 아까 레드카펫에서 아주 씩씩하게 걷던데?!”

쏟아지는 관심에 혹시나 긴장하고 있을까 봐 찾았는데 이서아는 쌩쌩한 얼굴이었다.

“정말요?! 대표님! 혹시 제 사진 찍어주셨어요?!”

“사진? 사진은 왜?”

“학교 가서 친구들한테 자랑하려고요!”

이미 그 친구들은 널 생방송으로 봤을 거야.

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아직은 순수한 아이의 마음을 간직해주자.

“당연하지! 엄마한테 사진 100장 보내 놓을 테니까 집에 가서 천천히 봐.”

“네!! 와! 신난다!”

이서아는 신이 난 마음을 한껏 표현하고 있었다.

의자가 높아 땅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앞뒤로 한껏 까닥거리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서아야. 혹시 상은 못 받더라도 괜찮으니까 속상해 하지마. 알았지?”

제일 걱정하는 건 괜히 후보에만 올라 기대했다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아 실망감이 크진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다른 언니, 이모들이랑 여기 같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잘한 거랬어요.”

역시 강주리의 교육은 현명했다.

“그리고 이건 대표님한테만 알려드리는 비밀인데요.”

이서아는 나를 잡아끌더니 작은 손으로 내 귀를 가린 채 귓속말을 시작했다.

“엄마가요. 어디를 가든 항상 겸손하라고 해서 자랑을 못 했는데에. 저는 학교에서도 상 많이 받아서 사실 안 받아도 돼요오.”

아이의 허세에 하마터면 큰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서아야. 감독님은? 감독님은 안 알려주는 비밀 같은 거야?”

옆에서 노흥기가 우리의 이야기를 궁금해했으나 이서아의 작은 검지는 자신의 입을 세로로 막고 있었다.

비밀을 지키라는 뜻이다.

“감독님은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나는 여전히 궁금한 얼굴의 노흥기를 뒤로하고, 나만 아는 비밀을 간직한 채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곧이어 영화제 2부 막이 오르며 걸그룹의 축하 무대가 이어졌고.

기다리던 신인여우상의 시상이 시작되었다.

시상자는 전년도 수상자인 송소리.

그녀는 화려한 금빛 탑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또각또각 스탠드 마이크 앞으로 가서 섰다.

“안녕하세요. 송소리입니다. 수상한 지 벌써 1년이나 지났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수상하는 영광을 또다시 얻기 위해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하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입을 가리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 신인여우상의 후보들은 역대급으로 쟁쟁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후보부터 만나보시죠.”

송소리의 신호에 따라 뒷배경으로 있던 큰 스크린에서는 영상이 플레이되었다.

신인여우상 후보 배우들의 영화 클립들이 짤막하게 지나갔고.

마지막엔 각각 지정 좌석에 앉아 있던 5명의 후보 얼굴이 5분할로 나뉘어 화면에 나타났다.

다들 긴장되는 마음은 같은지.

억지로 웃음을 짓고 있어 입꼬리를 파르르 떠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이서아는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천진난만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사이 송소리는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은색 봉투를 열었다.

“그럼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그녀는 봉투에 있던 카드를 조심히 꺼내 들었다.

“수상자는 <어울림>의 이서아 양. 축하드립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어린 신인여우상 수상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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