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칼날의 방향
리암 스미스는 서울에서 이틀간 묵고 우리와 계약서까지 작성한 뒤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계약 조항 중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이것이었다.
크랭크인 3주 전.
촬영 준비를 위해 한국에 다시 들어왔을 때 일주일에 한 번은 서울 관광을 시켜줄 것.
권현미와 나는 3일의 시간만 그에게 할애하면 되었다.
또 자신과 손발이 맞는 조수 한 명을 더 데리고 오기로 했으며 현장 통역으로 전해성에게 소개받은 사람을 붙여주기로 했다.
모두가 윈윈하는 흡족한 계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배웅하는 날.
우리는 고이 접힌 한 종이를 전해 받으며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응? 이게 뭐야?
권현미의 물음에 리암은 대답도 하지 않고, 씩 웃더니 가버렸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종이를 펼쳐보고는 우리는 서로의 눈을 의심했다.
종이엔 그가 평소에 가보고 싶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들이 빼곡히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권현미는 내게 게임을 제안했고.
-음, 대표님? 혹시 가위바위보 잘하세요?
-좋습니다.
나는 승낙했다.
그렇게 우리는 비장하게 가위바위보를 시작했으며 정확히 25번째를 했을 무렵 그 장소들은 모두 내게로 떠밀려 와 있었다.
그때 기억났다.
전생에서 나는 가위바위보를 유독 못 했던 것을.
*
<어울림>의 판권은 약 한 달 만에 총 97개국에 판매되었다.
선판매된 것까지 합하면 120개국에 우리 영화가 개봉하는 것이다.
국내 최종 스코어는 600만에 그쳤지만,
해외 성적은 <망자와 함께>보다도 좋았다.
그만큼 전 세계 아이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이다.
수익은 당연히 어마어마한 수치로 따라왔다.
직접투자를 한 덕분에 국내 수익만 200억이 넘었고.
지금까지 정산된 굿즈 판매금과 해외 판권 등의 수익은 약 220억 정도였다.
하지만 이 둘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정산 중이었기에 수익은 복리의 마법처럼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1월 중순이 되면서 채용 인원들의 최종면접이 끝났다.
이들은 2월 초 출근해 각 팀에 충원될 예정으로 총 14명의 새로운 얼굴이었고.
회사 직원들은 이로써 30명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직원들을 관리할 사람이 있어야 했기에 남양주 세트장을 돌보던 예정우의 본사 출근을 지시했다.
남양주 세트장은 이제부터 예정우가 잘 가르치고 있던 윤지훈이 전문 인력 3명과 관리할 것이다.
“이사님.”
“네. 대표님.”
우리는 모닝커피를 마시며 간단한 업무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채용은 이번처럼 매년 진행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진행 전에 채용 인원이랑 정리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회사의 규모는 점점 커질 것이다.
또 앞으로 제작될 영화들의 사무실도 매번 임대하는 것보다 구역을 나누어 우리와 같이 사용하는 쪽이 편하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좁은 사무실이었다.
“아무래도 사무실 옮겨야 할 것 같죠?”
“네. 이번에 새로 채용한 직원들 출근하면 포화 상태일 것 같습니다.”
“여기 계약이 언제까지입니까?”
“5월 중순요.”
음, 지금이 1월 중순이니 4달 정도 남았구나.
“그럼 이사 갈 곳 좀 알아봅시다.”
“네. 이번엔 지금 사무실의 한 2배 정도면 될까요?”
2배라고 한다면 고작 120평이다.
“아니요.”
이사도 자주 다니면 힘들다.
전생에서 쫓겨나듯 내몰려본 적도 있어 집 없는 설움을 잘 알고 있었다.
사무실은 어떻게 보면 직원들이 집보다도 오래 머무는 공간이니 아늑했으면 좋겠고.
“빌딩 하나 삽시다.”
내 말에 예정우가 깜짝 놀랐다.
“아예 매입하신다고요?!”
빌딩을 사면 임대 수익에다 무조건 값이 오른다.
그러니 자본이 있는 지금 사두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래서 밀려오는 걱정스러움에 갈매기 눈썹이 된 예정우를 모른 척했다.
“예. 지하 주차장도 있고, 지상으론 6층 정도면 딱 좋겠네요!”
예정우를 내보낸 뒤에는 권현미를 불렀다.
“권 PD님. <기적> 캐스팅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기적>은 크랭크인까지 2달 반 정도 남았는데 평범한 공무원인 주인공에는 도건우를 일찌감치 캐스팅했다.
노흥기가 <망자와 함께>에서 그의 연기를 좋게 봤는지 이번엔 완전히 다른 이미지의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고집한 결과였다.
아마도 도건우는 일종의 페르소나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당연히 제작자로서 연출과 연기로 탑을 찍은 둘의 두 번째 만남은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어쨌든 빠르게 확정된 주연과는 달리 조연 캐스팅이 늦어지고 있었다.
“조심하려고 배우들과 직접 미팅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걸리네요.”
<기적>은 YJ E&M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아주 극비로 준비 중이다.
요즘도 뜨문뜨문 떠보는 최세준 과장에 의하면 그들은 <기적>의 존재를 알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저 안개 너머 실루엣 정도만 추측하고 있을 뿐.
무슨 내용인지. 어떤 배우를 캐스팅했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래서 권현미는 노흥기가 오케이 한 배우들과 직접 미팅을 잡아 외부 발설 금지 서약서를 받은 뒤에야 영화 정보를 알려주는 중이다.
시나리오도 그 자리에서만 읽어볼 수 있었으며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아, 들고 나갈 수 있는 경우는 딱 한 가지.
출연 계약서에 서명했을 경우뿐이다.
그녀도 대충 내막을 알고 있었기에 이토록 조심하는 것이다.
한순간의 방심에 YJ E&M을 겨누고 있던 칼날의 방향이 우리를 향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서울 어디에 있는 건물을 사도 가격은 오를 테지만, 특히 강남 쪽은 5년만 지나도 수익률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빌딩의 매입가격은 최대 100억이었다.
예정우가 이 돈으로 강남에서 지하 3층, 지상 6층의 빌딩을 찾아오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은 강남역 메인 도로에 접한 건물은 아니었으나 도보로 약 7분 거리에 있었고.
무엇보다 우리가 사무실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구조의 건물이었다.
상가들이 입주하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주차장이 지하 3층까지 있어 다른 빌딩에 비해 손님이나 직원들의 차를 주차하기 수월했다.
또 건물이 지어진 지 약 15년이 지난 뒤라 노후한 부분도 있었으나 그만큼 구조가 옛날식으로 널찍널찍했다.
가격이 신축 빌딩보다 저렴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향후 5년 정도 지나면 빌딩을 다른 용도로 쓸 계획도 있었지만, 내부는 깨끗하게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이 빌딩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빌딩 주인이 그 바로 옆 부지를 지상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정우는 두 필지 모두 매입하는 걸로 주인과 쇼부를 봤고.
우리는 총 93억 5천만 원에 리모델링까지 의뢰할 수 있었다.
한주건설 안용덕 팀장은 회사에서 리모델링만 진행하는 의뢰를 받지 않지만, 단골인 우리를 위해 특별히 신경 써서 해주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렇듯 빠르게 일 처리를 끝내자 새로운 얼굴들의 출근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십니까!”
군기가 바짝 든 신입부터.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살짝 여유가 보이는 경력직까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신바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 소고기 회식 어떻습니까?”
“넵! 좋습니다!”
“고오오오기!!”
살벌한 업무에 치여 미루고 미루던 광란의 회식을 할 수 있었다.
*
“우우~ 소! 파! 걸! 우우~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내가 아냐~”
모두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점심시간.
나경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박지연이 물었다.
“어! 이번에 나온 그린 애플 신곡이죠?! 진짜 좋지 않아요?”
나경은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난 것이 좋았는지 활짝 웃었다.
“네!! 진짜! 너무 좋아요!”
“이번엔 진짜 빌보드 1위 할 것 같아요! 그렇죠? 대표님!”
그린 애플의 정규 3.5집 앨범이 드디어 전 세계 동시 발매되었다.
그중에서도 천상현 작곡, 다별 작사의 ‘so far girl’은 곧바로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는 등 무서운 저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게요. 잘 됐으면 좋겠네요.”
나경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나저나 음악 감독님 이제 너무 잘 나가셔서 섭외하기 힘들어지는 거 아니에요?!”
핸드폰에는 ‘so far girl’ 빌보드 진입 소식을 알리는 기사가 도배되어 있었다.
개중에는 작곡가인 천상현을 말하고 있는 기사도 있었다.
나경이 핸드폰을 가져가서는 뭔가를 쓱쓱 조작하더니 내게 다시 내밀었다.
“이거 보세요! 지금 난리도 아니에요! 작곡한 사람 누구냐고 하면서요!”
정말로 그곳에는 100여 개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이거 작곡한 사람 누군지 아시는 분?!]
[노래 완전 좋아요! 80년대 팝인 거 같으면서도 아닌 거 같으면서도! 내공이 장난 아니신 분 같은데?]
[해외에서도 비슷하게 생각하더라고요. 몸값 확 오르실 듯?]
[이런 풍의 노래 유행했으면 좋겠어요 ㅜㅜ 요새 이 노래만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겠음 ㅜㅜ]
[이분! 원래 가수였어요! 작곡한 노래가 소파걸 이전에는 자기 노래밖에 없어욧!]
[다들 틀렸습니다. 천상현 씨 최근에 영화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습니다. 해외에서 상도 받았을걸요?]
[에?! 그 영화가 뭡니까?!]
천상현의 정체(?)가 점점 밝혀지면서 그 관심이 참여했던 영화로까지 뻗치고 있었다.
덕분에 VOD 등의 부가 수익이 소소하게 오르는 중이다.
“와. 진짜 빌보드 여파가 장난 아니네요?”
어느새 머리를 들이민 박지연이 가세하자 나경은 호언장담했다.
“제 감인데! 1위도 해볼 만할 것 같아요!”
“그래도 1위는 좀 힘들지 않을까요?”
둘의 이야기를 듣던 주변이 같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 내기합시다!”
“오! 재밌겠는데요? 그린 애플 몇 위 하나?”
“제일 근접한 사람한테 돈 몰아주기!”
“등수가 같으면 어떻게 해요?”
“음, 그럼 몇 주 지속하는지까지 정하자!”
이 사람들.
영화 스코어 내기도 한 번을 안 하길래 그런 거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만.
제일 먼저 나경이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며 손을 들었다.
“저는! 1위! 잠깐이라도 올라가 보자아!!”
“와, 나경 대리님. 그런 어마어마한 조건인데 만 원밖에 안 걸어요?”
그러자 나경이 푸른색 지폐 4장을 더 꺼내 들었다.
“오케이! 총 5만 원 겁니다!”
나경은 장난이라도 도박하면 안 되겠다.
그 뒤로도 직원들은 저마다 3위, 50위, 20위 등등 각양각색의 순위와 돈을 내놓았다.
“자! 그럼 대표님은! 과연?!”
어느새 사회를 보고 있던 나경의 눈빛에 나는 조용히 지갑에서 5만 원권 지폐 6장을 꺼냈다.
“1위, 9주 연속이요.”
“에에?!”
내 손에서 펄럭이는 따끈따끈한 신사임당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고.
사무실 내 모두의 눈빛은 황당한 하이에나와 같았다.
그중 멍하니 나를 보던 나경은 누가 옆에서 땡이라도 친 것처럼 호탕하게 웃어제꼈다.
“에이! 대표님! 그건 너무 가셨다! 이건 뭐, 서아가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고 하는 거랑 비슷한 맥락 아닌가요?”
나를 무시하는 느낌의 발언이라기보다는 정말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하는 말이었다.
“혹시 모르죠? 둘 다 이루어질지도?”
나는 진짜로 간절함을 내비친 것뿐이었다.
그런데.
지잉-.
지잉-.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에는 놀라운 이름이 떠 있었다.
[강주리_이서아 맘]
아니, 타이밍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