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90화 (90/140)

#90화. 돈보다 중요한 건

[탈출한 동물들은 다들 어딘가에서 잘 살아가고 있겠지?]

[동물들이 야생에 적응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세상에 나오자마자 죽었을지도. 하지만 인간은 그들을 가둬놓을 권리가 없다.]

[드라마 장르의 탈을 쓴 사회 고발 영화]

[성인이 된 현서가 여전히 동물들의 탈출을 돕는 에필로드 장면은 소름이었다. 동물원은 없어져야 할 공간.]

[감독이 영화에 넣어놓은 메시지는 모두가 힘을 합쳐 현서가 되길 원하는 바람이다.]

해외 영화 평론 사이트에 올라온 <어울림>의 평가들이었다.

선판매된 23개국에서 입소문이 알음알음 나더니 결국 일이 터졌다.

전 세계에서 오는 문의 메일, 전화 등등.

심지어는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그들의 문의는 딱 한 가지였다.

<어울림>의 상영판권을 사고 싶다는 것.

소고기 파티는 당연히 연기되었고.

결국 남양주에 있던 예정우와 윤지훈까지 당분간 학동 사무실로 출근하기로 했다.

“지연 과장님! 그리스 계약서 처리됐나요?!”

“네! 그런데 아직 계약금 입금이 안 됐어요!”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연락해볼게요!”

“아, 맞다! 재민 씨! 룩셈부르크랑 말레이시아는 어떻게 됐어요?!”

그 뒤로도 베네수엘라, 불가리아, 엘살바도르 등등 여러 국가가 직원들 입에서 오고 갔다.

“예정우 이사님. 잠시만요.”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예정우를 방으로 잠깐 불렀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그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정신이 없는 걸 알고 있었으니 요점만 간단하게 말했다.

“직원들 조금 더 채용합시다. 마켓까지 관리할 해외팀 경력직이랑 신입 공고 내주시고, 나경 씨랑 재민 씨는 기획 1, 2팀으로 나눠서 밑에 직원들 붙여줄까 싶은데 어떠세요?”

회사가 커지고 있음을 몸소 느끼고 있던 예정우였기에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오, 좋죠. 그럼 바로 공고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는 한 번의 전쟁통을 더 겪어야만 했다.

“예? 아, 문의요. 네네. 바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어떤 거요? 아, 마감 날짜요?”

“네. 접수 확인되셨습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회사 내 전화기는 빗발치는 채용 문의로 또다시 불이 나고 만 것이다.

*

“응? 이게 뭐야?!”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잠시 세수라도 하려고 온 화장실에서 이주호는 생전 보지 못한 흰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그는 올해 딱 30살.

아직 만으로는 20대였다.

그런데 벌써 흰머리라니?

흰머리의 개수가 최근 몇 달간 얼마나 골머리 쓰며 스트레스 받았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주호는 세수고 뭐고, 잠이 홀라당 깨버렸다.

화장실을 나와 자판기로 향했다.

동전을 딸그랑 넣어 커피를 뽑으면서 어제 참석했던 회의를 떠올렸다.

-감독님. 이건 저희 쪽에서 제시한 방향으로 가시죠. 어린아이를 초반부터 죽이는 건 관객들에게 반발심을 줄 거예요.

제작을 총괄하고 있던 YJ E&M 배급팀의 입김은 그야말로 천하무적이었다.

그중 <안전지대> 시나리오를 발견해 제작으로까지 추진한 최세준 과장은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래도 이건 등장인물에게 몰입할 수 있는 하나의 장치인데... 요?

이주호는 최세준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깨갱거릴 수밖에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사실 정상적인 루트로 입봉했거나.

<안전지대>가 철저하게 이주호 창작물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처음 YJ E&M과의 미팅에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저희는 시나리오만 사고 싶습니다. 작가님은 각본으로 참여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경력 있고, 실력 좋은 감독을 따로 앉히겠다는 소리였다.

YJ E&M 측에서는 예산도 많이 투자될 영화의 감독으로 쌩 신인을 앉히는 게 부담스러웠겠지.

그러나 이주호는 그 뜻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각본으로만 참여할 거였으면 애초에 블로그 글을 가져다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갈 데까지 갔고, 이미 잃을 것도 없었다.

그래서 강력하게 거부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연출까지 할 생각으로 쓴 시나리오예요. 시나리오만 파는 일은 없습니다.

처음 최세준은 굉장히 난감해했으나 며칠 뒤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그때 이주호는 드디어 자신에게 꽃길만 펼쳐질 거라 생각했다.

마침내 입봉하여 승승장구할 앞날만 남았다는 사실에 계약서를 잘 보지도 않고, 사인하게 된다.

하지만 앞날은 꽃길보다는 흙길에 가까웠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계약서에는 영화 연출 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문항이 있었던 것이다.

흔한 사회초년생들의 실수이자 대기업의 횡포였다.

그렇게 지금까지 YJ E&M의 태클은 사사건건 이어졌다.

이주호가 생각한 블로그 글의 장점은 전형적이지 않은 캐릭터들과 사건 진행들이었는데, YJ E&M에서는 이를 단점으로 보고 있었다.

이들은 모험을 병적으로 거부하며 장점들을 대중에게 먹힐 요소들로 하나하나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난하게 사랑받던 캐릭터와 스토리로 손해를 최대한 줄이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고친다고 해서 대중들에게 먹힐 것인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계약서까지 쓴 마당에 이주호의 발언을 듣는 이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또 학교에서 찍던 영화와 상업 영화의 무게는 너무나도 달랐다.

이주호는 이 무게를 견디기가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 전체적인 틀은 비슷했으나 자신이 끌고 가야 하는 스태프들은 10명에서 100명으로 10배 가까이 부풀었다.

이건 자신의 컨펌을 기다리는 스태프도 10배 늘었다는 뜻과 같았다.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올라간 허훈과 중간 단계 없이 한 번에 껑충 올라온 이주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생긴 것이다.

이주호는 점점 그 차이를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탈이 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얼른 자판기 커피를 챙겨 다시 YJ E&M에서 마련해 준 작업공간으로 향했다.

‘허훈 그 자식 영화 곧 나온다고 했어. 예산이 두 배 이상 차이 나는데, 이 영화 제대로 못 빼면 끝이다. 다시 못 올 기회야.’

영화는 돈이면 다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전혀 몰랐다.

영화 제작에서 돈보다 중요한 건.

프리 기간에 얼마나 철저한 준비를 하느냐. 와 이 기간에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촬영 시 어떤 난리 통이 벌어지는지를 말이다.

*

“조감독님! 이 부분 수정 좀 하겠습니다!”

촬영장에서 허훈의 카리스마는 날이 갈수록 진해지고 있었다.

수중 액션 촬영을 앞두고, 조감독과 상의하는 그 모습을 보니 이제 더는 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투명한 사랑> 촬영할 때만 해도 내게 이것저것 묻느라 바쁘던 그였는데.

지금은 천재적인 면모를 맘껏 뽐내는 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처음에 했던 심려들은 말끔히 사라졌다.

오늘 촬영하게 될 수중 액션 장면과 프롤로그 등 전생에 없던 장면들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그가 저렇게 연출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전생과는 또 다르게 영화가 잘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천재 감독 허훈을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은 1월 초.

12달 중 가장 추운 달이었다.

이런 날 수중 액션이라니.

스케줄을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었고.

수중 세트장 안의 물을 데우는 식으로 조정해서 촬영에 임하기로 했다.

촬영을 준비하며 허훈의 디렉팅을 받고 있던 이안과 조연 배우들은 오늘 물속에서 서로 뒤엉키고, 총까지 쏠 것이다.

고된 촬영이 될 것임을 알기에 그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예정우 이사님.”

근처에 있던 예정우를 잠시 불러 세웠다.

“네! 대표님!”

날쌔게 뛰어오는 그에게 물었다.

“물 온도는 몇 도에 맞춰져 있습니까?”

“34도요. 너무 물이 뜨거워도 움직이기 힘들다고 하셔서요. 오늘 오신 구조대분들이 조감독님이랑 상의해서 중간중간 쉬는 시간 충분히 가지기로 했고, 그때마다 온도는 조정할 예정입니다.”

<처절한 인생>은 모든 액션 장면에 사설 구급차와 운전기사, 간호사를 불러 상주시켰다.

혹시라도 발생할 안전사고에 대비한 것이다.

그에 따른 비용은 발생하겠지만, 당연히 나가야 할 돈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를 보내려는데 떠오른 게 있었다.

“아, 그 채용 관련해서는 어떻게 진행 중입니까?”

“채용이요? 휴우, 말도 마세요. 우리 회사 인지도가 그만큼 올라갔다는 소리니까 좋은 일이긴 한데, 지금 비상입니다.”

사무실에서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으니 대충 많이 지원했구나. 정도만 예상하고 있었다.

“경쟁률이 얼마나 되는데요?”

“지금 접수된 이력서 다 확인하고 있는데 적어도 40대 1은 될 것 같습니다.”

“40 대 1이요?!”

예상을 웃도는 수치였다.

“네. 도대체 어디서 다들 그렇게 슬금슬금 나타나는 건지. 이력서들이 끊이질 않아요! 거기다가 스펙들도 다들 좋은 쪽으로 비슷해서 서류심사가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원래도 심했던 그의 다크서클이 한껏 내려온 걸 보니 꽤 많이 시달린 모양이다.

그대로 두었다간 쿠데타라도 일으킬 얼굴이었다.

직원들을 하루빨리 채용해야 하기도하고.

나는 그의 불만 사항을 접수했다.

“그럼 채용 인원을 좀 더 늘리죠?”

*

시나리오를 읽은 리암 스미스의 답이 왔다.

-대표님. 아주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한국에 한 번 오겠다고 하네요? 괜찮으시죠?

우리와의 미팅을 위해 한국까지 온다는데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리암은 연락을 받자마자 비행기표를 예매했는지 정확히 이틀 후 한국 땅을 밟았다.

“오! 한국은 공항도 무척이나 쾌적하군요!”

권현미와 함께 마중 나간 공항에서 본 리암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의 그는 권현미를 보자마자 반가워 어쩔 줄 몰랐다.

“현미! 잘 지낸 거야?!”

그녀는 그런 그에게 과한 리액션으로 화답했다.

“그럼! 잘 지냈지! 너는?! 아, 아니다. 우선 여기 대표님부터!”

리암은 권현미가 소개하는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잡았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아라비안필름의 신바드 대표님!”

“저도 전작들 다 재밌게 봤습니다. 팬이에요.”

우리의 말에 권현미가 조금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금세 자신의 절친을 챙겼다.

“비행하느라 피곤했겠다. 우선 호텔로 가자!”

그렇게 우리는 예약해둔 종로의 한 호텔로 향했고.

리암과의 저녁 식사를 위해 근처 한식당을 찾았다.

리암은 호텔로 향하는 동안에도.

호텔에서 한식당을 찾는 동안에도.

주변을 살피며 가지고 온 카메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리암. 그렇게도 신기해?”

권현미의 물음에 그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한국에 얼마나 오고 싶었는지 몰라!”

“그렇게 오고 싶었으면 관광이라도 오지 그랬어. 나도 있는데 말이야.”

리암의 표정이 한껏 어두워졌다.

“쉴 겨를이 없었어. 제작사 대표들이 얼마나 나를 찾아다니면서 괴롭히던지. 잠깐이라도 쉴라치면 어디든 찾아와선 날 설득했다니까?”

재능이 많은 것도 피곤한 일상이구나.

“그런데 리암. 한국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생긴 겁니까?”

내 물음엔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당연히! 한국 영화 때문이죠!”

한국 영화?

그러더니 그는 익숙한 제목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음, 먼저 <투명한 사랑>이랑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 <망자와 함께>도 재밌게 봤습니다! 최근 개봉한 <어울림>도요!”

권현미는 갑자기 사레라도 걸린 듯 콜록거렸다.

“컥! 콜록! 뭐어? 아까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질 않나. 왜 이래? 리암? 나는 너한테 시나리오만 보내줬을 뿐이잖아!”

아마도 권현미는 리암에게 우리 회사명이나 전작들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자 리암이 가방에서 <기적>의 시나리오를 꺼내 들었다.

“당연히 시나리오에 적힌 제작사 이름을 봤지!”

그가 가리키는 임시 표지엔 정확히 [ARABIAN FILM]이라고 적혀있다.

전해성에게 시나리오 번역을 맡겼으니 당연히 영화 제목과 제작사 이름까지 영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아! 그렇긴 하네. 그래도 보통 제작사 이름까지 유심히 살피진 않잖아?”

리암이 고개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무슨 소리야! 그런 굉장한 영화들을 만든 제작사인데? 내가 좋아하는 한국 영화들에는 항상 이 제작사의 오프닝 영상이 나오더라고? 진정한 팬이라면 당연히 외우고 있어야지!”

아카데미가 사랑한 촬영 감독이 우리 제작사 영화의 진정한 팬이라니.

솔직히 기분 째지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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