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89화 (89/140)

#89화. 아카데미가 사랑한 촬영 감독

“여기 차 누가 들여보냈어?! 지금 들어오면 안 된다니까!!”

음, 오랜만에 현장에서 큰소리를 들어보는군.

2주 전.

<처절한 인생>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특별히 궁금한 것이 있어 현장을 찾았는데.

눈앞에는 4차선 도로를 막으며 차들을 돌려보내는 제작팀의 모습이 보였다.

모든 촬영이 힘들지만.

도로 촬영은 특히나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스태프들이 예민할 수밖에 없다.

도로를 막을 때는 당연히 경찰과 구청의 협조를 받는다.

몇 주 전부터 주변 상인들과 주민들에게 안내하고, 플래카드까지 곳곳에 걸어놓는 등 준비도 철저하게 한다.

하지만 촬영 당일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온 스태프들이 그 변수를 만들지 않으려고 현장 곳곳을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조감독님! 감독님이 찾으세요!”

“소품 차 하나는 왜 안 오는데! 빨리 와야 해! 시간 없어!”

“무술 감독님 보신 분!”

“여기 이안 씨 상처 연결 안 맞아요! 분장팀! 와서 맞춰주세요!”

“야! 촬영팀 빨리 안 뛰어! 오늘 집에 안 갈 거야?!”

그 목소리 중에서도 가장 으뜸은 역시 고덕현이었고.

촬영팀은 그의 지시에 따라 혼신의 뜀박질로 카메라를 세팅 중이었다.

나는 그냥 촬영만 확인하고, 조용히 왔다 가려고 했다.

그런데 소리를 빽빽 지르며 고개를 돌려대던 고덕현과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어! 신 대표님!!”

그 소리에 전쟁통 같던 현장이 잠시 조용해지더니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어! 대표님-!”

다들 한마디씩 하려고 입을 움찔거리길래 다급히 손을 저었다.

“인사는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촬영 준비 마저 하시죠!”

그러자 그곳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순식간에 다시 전쟁통이 되었다.

고덕현은 그 전쟁통에 끼지 않고, 내게로 걸어왔다.

“잘 지내셨어요? <어울림>보다는 조금 더 힘드시죠?”

그의 표정은 ‘말해 뭐해.’라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뛰어다녀서 그런지 집에 가면 삭신이 다 쑤십니다!”

이상한 건 어째 동물원에서 마주쳤던 날보다 표정이 밝다는 것이다.

“그래도 애들이랑 동물 찍는 것보다는 낫네요! 말 안 통하는 배우들은 없잖아요?”

하긴 그래서 <어울림>이 힘든 영화였지.

“하하.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아라비안필름은 또 다른 작품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미국에서 투자받았다면서요?”

<왕국 : 역병의 시작>에 대한 언론 보도는 아직 하지 않았으나 영화판에는 소문이 스멀스멀 퍼지고 있었다.

“예. 그런데 아마 <처절한 인생> 촬영 끝난 뒤에 바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당연하지요! 아직 창창합니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 감독님은······?”

“아, 신 감독님 단독 연출입니다. 6화 분량의 드라마로 제작돼서 전 세계 유통될 예정이고요.”

“신 감독이요?! 아휴. 그럼 또 내가 가서 도와줘야지요! 내용은 대충 어떻습니까?”

그 물음에 내 웃음이 어색해졌다.

좀비······.

허허, 좀비······.

라고 도저히 지금은 말 못 하겠다.

<처절한 인생> 쫑파티 정도에서 말해야지.

“음, 아마도 공포라고나 할까요?”

말하면서 양심이 조금 찔렸다.

“오! 기대되네요! 서스펜스 막 그런 겁니까?!”

“하하, 네. 뭐, 그럴 것 같습니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좀비가 나오면 당연히 공포스럽고, 그 상황은 불안과 긴박함을 동반해 서스펜스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고덕현은 <왕국 : 역병의 시작>의 상당한 관심과 기대를 보인 뒤 촬영을 위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번엔 현장이 조금 안정화되었는지 정 PD가 자신이 타온 커피 한 잔을 건넸다.

“어휴. 안 추우세요? 대표님?”

지금은 12월 초로 상당히 쌀쌀한 날씨였다.

게다가 오늘 같은 야외 촬영은 밖에서 내내 떨어야 했기에 롱패딩은 벌써 스태프들 사이에서 교복이었다.

“예. 괜찮습니다. 이안 씨 컨디션은 좀 어떻습니까?”

사실 오늘 촬영장을 찾은 것은 우진(이안)의 카 체이싱 장면을 보고 싶어서였다.

“너무 좋습니다. 리허설 때 날아다니더라고요.”

이안은 전생에서도 <처절한 인생>의 액션 대부분을 직접 소화했었다.

“다행이네요.”

“말도 마세요. 무술 감독님이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운전 실력이 전문 무술팀보다도 낫데요.”

그걸 알고 데리고 온 것이니 당연했다.

전생에 <처절한 인생> 무술 감독이 남긴 아주 유명한 말이 있다.

‘이안이 액션을 잘했다기보다 그보다 잘하는 무술팀이 없었다.’

“다른 액션들도 웬만하면 대역 없이 가는데 이게 모니터 해보면 예술입니다.”

현실의 무술과 영상 매체에서의 무술은 차이가 크다.

현실은 동작을 최소화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목표라면.

영상에서의 무술은 보여주기식의 무용과도 같았다.

팔, 다리를 과장해서 돌리고, 맞는 사람과의 합도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몸 쓰는 거 하나는 진짜 예술이에요. 대표님도 대단하시다니까요? 어떻게 이안 씨가 저럴 줄 알고, 한눈에 콕 집어서 데려오신 겁니까?”

“그냥 눈에 띄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요. 퍼레이드랑 액션은 너무 매치하기 힘들잖아요?”

그 질문엔 웃음으로 답하며 어물쩍 넘어갔다.

그러자 정 PD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근데 이안 씨. 놀이공원에서 보신 거 맞죠?”

“음, 그렇죠?”

그의 눈이 가늘어지고,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갔다.

뭐야, 표정이 왜 저렇게 되는 건데.

“그럼 놀이공원을 혼자 가셨을 리는 없고······.”

문득 그날 탔던 바이킹의 울렁거림이 떠올랐다.

“누구랑 가셨어요?! 혹시 여자친구?!”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꼬투리 잡힐 게 뻔했으니 말을 아꼈다.

“친구랑 갔습니다.”

정 PD는 이번엔 친구에 대해 추궁하려 했지만.

“액션!!”

조감독의 우렁찬 사인 덕분에 하지 못했다.

부와아아앙-!

궁금했던 이안의 카 체이싱이 시작되었고.

끼이익-!

끼긱-!

굉음만이 들려오던 현장엔 1분이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컷!”

다시 울려 퍼진 조감독의 사인과 함께 나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무술 감독이 이안을 왜 그리도 극찬했는지를 말이다.

*

한 달 후.

“음, 예산이 역시 크긴 하네요.”

내 말에 당당하던 권현미 얼굴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제가 한국 시스템을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할리우드 재난 영화의 10분에 1 수준입니다.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산이라고 생각해요.”

권현미가 뽑아 온 <기적>의 예산은 180억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말이 맞았다.

예산서를 꼼꼼히 살펴봐도 이보다 적정 금액으로 뽑아올 수 없겠다 싶을 정도다.

권현미는 내 첫 말을 오해한 모양이다.

“아, 예산을 더 줄이라고 말씀드린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저는 이 이상 줄여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거든요.”

어차피 투자는 직접 할 것이기에 상관없었다.

배급에 대한 문제가 조금 생길 것 같긴 하지만······.

그때.

“대표님. 혹시 저희 컨택 중인 촬영 감독님이 있나요?”

권현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왕국 : 역병의 시작>과 <기적>의 촬영 기간은 겹치기에 고덕현은 데리고 올 수 없다.

대안으로 사람을 찾는 중이었으나 마땅한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던 상황이었다.

“아니요. 혹시 추천하실 분이 있으신 겁니까?”

“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촬영 감독이 있는데 한국에 관심이 대단하더라고? 기회가 있으면 꼭 불러 달라고 해서요.”

친하게 지내던 촬영 감독?

“그래요? 혹시 필모가 어떻게 됩니까?”

“음, 전작이라고 한다면 <스파클링>이랑 <배틀>이 그래도 유명하겠네요.”

나는 권현미가 순간 나를 놀리나 싶었다.

“예? 그럼 방금 말한 친하게 지낸다던 촬영 감독이 혹시 리암 스미스입니까?”

그녀의 환한 이가 다시 드러났다.

“어! 아시네요? 맞아요. 리암!”

어이가 없었다.

근접한 미래의 일이긴 했지만.

아카데미가 사랑한 촬영 감독 리암 스미스를 그녀는 무슨 동네 소꿉친구 말하듯이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리암 스미스는 호주 출신의 젊은 촬영 감독으로 전도유망한 기대주였다.

물론, 이건 지금 시대가 평가하는 그였고.

그는 3~4년 내로 큰 성장을 이룩한다.

내가 회귀하기 전에 리암은 이런 수식어가 붙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아카데미가 가장 사랑하는 촬영 감독.

그 영상의 특징은 다양한 색채가 아우러져 통통 튀듯 생동적인 느낌을 낸다는 것이었다.

또 대부분의 촬영 감독이 같은 감독과 작업을 이어가지만, 그와 작업하려는 감독은 너무나도 많아 그때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감독과 작품을 이어갔다.

그러니 그는 더욱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스타일의 감독과 합을 맞추며 그들의 장점만을 따와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촬영에도 접목해버린 것이다.

회귀 직전에는 그의 영상미가 절정의 다다랐다는 평가도 있었다.

다시는 없을 극찬이었다.

그런 그인데 이번 생에 이렇게도 뜬금없이 인연이 닿다니?

권현미에겐 당연히 긍정적인 의사를 밝혔다.

단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그런데 리암 스미스 임금을 예산 안에 책정할 수 있습니까?

돈이었다.

아직 전생에서 알고 있던 리암 스미스는 아니었으나 촬영 감독으로 이제 막 올라가고 있던 기대주였다.

당연히 우리가 줄 수 있는 돈은 할리우드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적을 것이다.

-한국으로 와달라고 하면 임금을 깎고서라도 올 겁니다. 대신.

뭔가 어마어마한 조건이 붙을까 봐 괜스레 침을 꿀꺽 삼켰다.

-아마도 촬영이 없을 때는 저나 대표님이 데리고 다니면서 관광이라도 시켜줘야 할 거예요.

-관광이요?

긴장했던 것이 어이없을 정도로 난데없었다.

-네. 말씀드렸잖아요. 한국에 관심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흥미로운 곳곳을 데려가 주기만 한다면 불만은 전혀 없을 겁니다.

관광이야 무조건 해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영상미를 뽑아낼 수만 있다면 휴일 반납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권현미는 리암에게서 답이 오면 알려주기로 했다.

확답을 받기까지는 못 해도 며칠이 걸릴 테지만, 이다지도 설레는 일이 없었다.

♬♩♫♪♬

콧노래를 절로 흥얼거리며 대표실에 앉아 있다 보니 오랜만에 직원들 소고기 회식이라도 시켜줘야겠다 싶어서 밖으로 나갔다.

오후 2시.

점심을 먹은 뒤 한껏 나른해질 시간.

직원들은 식곤증에 시달리다가 내가 나오자 다들 화들짝 놀라는 눈치였다.

‘어이쿠!’, ‘큼큽!’, ‘쓰읍.’ 등등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다들 내일 회식 괜찮으세요? 혹시 약속 있으신 분들은 참석 안 하셔도-.”

띠리리링-!

그때.

내 목소리가 들려오던 사무실에 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벨 소리.

나경이 그 전화를 받을까 말까, 눈치 보길래 얼른 손짓했다.

“받으셔도 됩니다. 끊고 다시 이야기하죠.”

“넵!”

달칵-.

“네. 아라비안필름입니다.”

그렇게 전화를 받는 나경은 네네, 대답만 하더니 이내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띠리리링-!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

이번엔 이 과장이 수화기를 들었다.

“네. 아라비안필름 이재민입니다.”

또 이번엔 노트북을 유심히 보던 누군가가.

“에에?!”

요상한 소리를 내었다.

평화롭던 사무실이 순식간에 극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예?! 아니? 저희 영화를요?”

“어느 나라요? 아니, 한국어 할 줄 아는 분 없습니까?!”

“해성 씨! 여기 메일 번역 좀 해주세요!”

무슨 영문인 줄 몰라 가만히 보고만 있던 중.

그새 전화를 끊은 나경이 내게 쏜살같이 튀어왔다.

“대표님!! 멕시코에서 <어울림> 판권을 사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 뒤를 잇는 다른 목소리들.

“대표님! 여기도요! 아, 죄송한데 어디라고 하셨죠? 아아, 싱가폴이랍니다!”

“회사 메일로도 많이 왔습니다! 온 곳은 우크라이나, 포르투갈, 또-!”

어느새 거대해진 눈덩이가 숨기고 있던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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