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입소문이란 힘
<어울림> 후반이 끝났다.
기술, 배급, 언론, 관객 시사회 일정을 빠르게 잡았고, 긍정적인 반응도 끌어냈다.
그리고 오늘은.
차가운 바깥과는 확연히 다르게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지잉-.
최세준 과장의 문자다.
[영화 어울림 리뷰, 재미와 교육을 한 번에!]
엄청난 파워블로거를 섭외했다는 연락을 해오더니 글이 올라온 모양이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링크를 클릭했다.
바로 뜨는 것은 <어울림>의 메인 포스터.
푸릇푸릇한 작은 동산 잔디밭에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고 앉아 있는 이서아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행복하게 웃고 있다.
아이의 주변에는 코로 물을 뿌리는 코끼리.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원숭이.
목이 너무 길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기린.
작은 몸짓과는 안 어울리게 근엄한 자세로 앉아 있는 길고양이 라운이까지.
그 외에도 하마, 호랑이, 얼룩말, 공작새 등 20여 마리 동물들이 출연하는 단체 사진이었다.
이 포스터는 모두 각자 우리에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포착해 합성한 것이다.
동물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으로 보이기 위해 작업했지만, 자세 등에 대해서는 일절 손을 댄 것이 없었다.
애초에 구상한 모습을 찍기 위해 엄청난 대기시간을 소모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울림>은 이렇듯 포스터 하나를 찍더라도 손이 많이 가는 영화였다.
그 포스터 밑으로는 블로거가 직접 작성한 리뷰가 곧바로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비비키즈입니다! 요즘 날이 점점 쌀쌀해지고 있죠?
매번 가지고 오던 옷으로도 아이를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지만, 한 번쯤은 마음을 데워주는 게 어떨까 싶어서 영화 한 편을 가지고 왔어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영화는 바로오오!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어울림입니다!
줄거리를 잠깐 소개해드리자면 이렇습니다.
현서(이서아)는 어려서부터 동물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인지한 날.
부모님께 사실을 알리지만, 현서가 가게 된 곳은 병원이었죠.
이때부터 현서는 자신의 비밀을 혼자만 간직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에 처음으로 간 동물원에서 현서는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동물들이 괴로워한다는 걸 말이죠.
결국 우리의 주인공 현서는 동물원에서 만난 길고양이와 함께 동물들을 탈출시킬 모종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과연 현서는 동물 친구들을 무사히 탈출시킬 수 있을까요?
이 영화는 원래 영국의 교육용 애니메이션이었다고 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을 한국의 한 제작사가 눈여겨보고, 리메이크한 작품이죠.
원래도 교육용으로 만들진 만큼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아이들에게 생명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대해야 하는지를 재밌게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도 영화에 대한 설명이길래 스크롤을 쭉쭉 내리다가 글이 마무리되려는 시점에서 멈췄다.
직원들이 밤낮 설쳐가면서 구상해 외주를 맡겼던 ‘현서’와 라운이의 캐릭터 인형의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인형들은 리뷰를 작성하며 소정의 선물로 받은 것들인데요! 캐릭터화를 정말 귀엽게 해놓아서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저희 아이들도 보자마자 좋아한 인형이었습니다!
*주의* 영화를 보고 나온 아이들이라면 무조건 사달라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혹시라도 부담되시는 분들은 영화가 끝난 뒤 아이의 눈을 가리고 극장을 빠져나가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눈을 찡긋거리는 대왕 이모티콘)
그럼 지금까지 비비키즈였습니다!!]
글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영화 설명도 좋았지만, 마지막 굿즈 구매를 강요하지 않은 것이 가장 좋았다.
원래 좋은 물건도 사라고 하면 더 사기 싫은 법이다.
블로거가 딱 적당하게 홍보를 해준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글이 올라가고 얼마 후.
<어울림>은 국내와 선판매되었던 23개국에 동시 개봉되었고.
엄마들 사이에서 퍼진 입소문이란 힘을 통해 아이 주먹만 했던 작은 눈덩이는 언덕 아래로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
금현석과 계약서 도장을 찍었다.
정확히는 금현석의 블로그 글을 원작으로 제작할 영화 판권을 샀다.
그는 알고 보니 카이스트 기계공학과를 재학 중이던 수재였다.
어쩐지 ‘과학적으로’라는 단어를 쓸 때부터 이상했는데.
이과, 문과 구분이 없는 천재였던 것이다.
금현석은 글도 글이지만, 학업은 도저히 놓을 수 없다며 우리에게 영화를 잘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영화가 다 만들어질 때까지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네? 노흥기 감독님이 연출하신다고요?!
<어울림> 후반까지 끝난 노흥기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을 예정이라는 말을 전하자 그가 보인 반응이었다.
-그럼 제가 원하면 감독님 시나리오 작업하실 때 참여할 수 있나요?! 노 감독님 영화 진짜 다 좋아하는데!!
하긴 영화 좋아하는 사람치고 노흥기 감독 까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 연륜 때문에 금현석의 글을 맡긴 거기도 하고.
-예. 가능합니다. 그럼 노 감독님께 그렇게 말씀드려놓을게요.
노흥기 감독도 원작자에게 묻고 싶은 게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싶어서 흔쾌히 오케이 했다.
-그런데 이거 혹시 제목은 있습니까?
내 물음에 금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목은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래서 우선 <기적(가제)>으로 정했다.
지칭할 제목이 있긴 해야 했으니까.
최세준에게는 틈틈이 안부와 <어울림>을 핑계로 전화를 걸었다.
대체로 <안전지대> 일정을 물었고.
그에 따르면 <안전지대>는 약 6개월의 프리 기간을 거친 뒤 내년 4월 중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촬영 기간은 총 5개월.
아마도 후반은 3개월 이상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내 예상으로 <안전지대>는 내년 내 개봉이 힘들다.
금현석의 블로그 글은 전부 출력하여 저작권 등록을 마쳤고.
혹시나 YJ E&M 쪽에서 등록한 것이 있는지 확인해봤는데 찾을 수 없었다.
블로그 글은 정확히 소설이나 시나리오라고 지칭할 수 없었으나 표절을 한 상대방에게 내밀 수 있는 무기 중 하나였다.
노흥기의 시나리오화가 끝나는 대로 등록할 예정이었으니 무기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어쨌든 이런 조치를 취했으나 여론이 있으니 개봉은 무조건 우리가 먼저 해야 했다.
그러니 <기적(가제)>은 내년 안으로 개봉 시기를 맞출 생각이다.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면 못할 것도 없다.
노흥기에게는 연출을 맡기면서 내막을 대충 알려줬다.
-뭐요? 표절?!
그도 창작자였기에 처음 내 말을 들었을 때 굉장히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는 각색 속도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살짝 무서우리만큼.
그가 내게 시나리오 초고를 품에 안겨준 것이 정확히 6일 뒤였기 때문이다.
나중에 듣기로는 금현석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합숙까지 시키면서 같이 작업했다고 한다.
역시 노장의 카리스마는 죽지 않는 법이다.
*
눈덩이의 부피가 꽤나 커졌다.
<어울림>은 개봉 첫 주 스코어 80만으로 장르 특성에 비하면 엄청난 성적이었고.
속도에 불이 붙고 있었다.
[<어울림> 보신 분? 주말에 보고 왔는데, 애들이 너무 좋아하네요.]
[저희 집은 결국 인형 하나씩 손에 들려줬습니다. 어찌나 가지고 싶어 하던지.]
[재밌나 보네요? 아들이 보고 싶다고 하던데, 이번 주에 예약해야겠습니다!]
[티슈 챙기세요. 애들이 보고 싶다고 해서 갔는데 제가 눈물 찍어냈습니다. ㅜㅜ 생각하니 아직도 슬포여 ㅜㅜ]
엄마들뿐만 아니라 20, 30대 커플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고양이 나만 없어······.]
[가빈 나올 때 내적 함성 지르신 분?! 도대체 이분들은 그린 애플 섭외를 어떻게 한 겁니까!!]
[우리 관은 내적 함성이 아니라 외적 함성이었음. 가빈 언니 외모에 남녀 할 거 없이 다 헉했잖아요.]
[저는 현서 역의 이서아 양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남녀 구분이 없는?]
[동감합니다. 그리고 저 여기 촬영할 때 전주 동물원 갔었는데, 현장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이런 영화들이 잘 되어야 함.]
역시나 가끔은 이런 댓글도 있었다.
[근데 진짜 동물원에서 촬영한 거면 동물 학대 아님?]
그럼 또 이런 댓글이 금세 달렸다.
[무슨 소립니까?! 이 영화 일부러 동물보호협회 직원까지 현장에 상주시킨 걸로 압니다! 좀 알고 이야기합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기사로도 내지 않은 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요즘 세상의 비밀은 영화판에만 없던 게 아닌 모양이다.
*
<기적(가제)>의 콘티 작업이 시작되면서 정 PD에게 PD 한 명을 더 소개받았다.
이번에 소개받은 사람은 30대 중반의 여자 PD였는데 <기적>을 맡기기에 아주 적합한 사람이었다.
해외에서 스태프로 일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영화산업 자체의 풀이 할리우드보다 작았기에 기술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국내에서 어떤 대접을 받겠는가.
특히나 <기적>은 재난 물 특성의 기술력이 절실히 필요했기에 해외 자문까지 생각하던 중이었다.
한 가지 의문인 건 그런 사람이 왜 우리 회사와 일하고 싶어 하냐는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바드입니다.”
“네. 권현미입니다.”
그녀는 길게 늘어뜨린 굵은 파마머리에, 큰 링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화장이 진하지는 않았는데, 속눈썹이 굉장히 풍성하며 길었고, 태닝한 듯 건강미 넘치는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저희랑 일하고 싶으신 이유가 뭔가요?”
나로선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어서 물은 것이었는데, 그녀는 내 질문에 활짝 웃었다.
인상적인 거 하나 더 추가다.
치아가 굉장히 하얗고, 가지런했다.
“역시 듣던 대로 성격이 급하시네요.”
듣던 대로?
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다는 거지.
“정 PD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까?”
“아니요. 정 PD는 학교 후배예요. 여기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먼저 찾았습니다. 아라비안필름과 연결해달라고.”
아니, 그러니까 왜?
요즘 나는 최세준을 통해 정보를 빼 오는 등의 수를 쓰고 있었기에 나 또한 조심하고 있었다.
혹시나 우리 회사를 견제하는 사람들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그럼 제가 정 PD님한테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한 시기와 그 시기가 맞물린 겁니까?”
권현미가 싱긋 웃었다.
“그런 셈이죠?”
그러더니 그녀의 몸이 맞은편에 있던 내 쪽으로 한껏 기울였다.
“궁금하실 테니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제가 이곳에 일하고 싶은 이유는 당연히 대표님 때문입니다.”
“저 때문에요?”
권현미는 어딘가 신이 난 얼굴이었다.
“네! 대표님은 제 속을 뻥 뚫어주신 분이거든요!”
하하, 그래. 이젠 인정하자.
끼리끼리 논다고.
나도 괴짜였던 것이다.
그러니 맨 이런 사람들과 엮이는 거겠지.
“저는 권 PD님을 정말로 처음 뵙는 것 같은데요?”
“혹시 제니퍼라고 기억하세요?”
제니퍼?
음, 제니퍼라고 한다면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흔한 이름 10위권 안에는 들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내가 최근 만난 제니퍼가 있긴 하다.
“설마 블랙 스튜디오?”
그러자 권현미는 머릿속 형광등이 반짝 켜진 것 같은 리액션을 선보였다.
“댓츠 롸잇! 역시 기억하시네요?! 제니퍼한테 엿을 제대로 먹였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 평생소원이 제니퍼 몰락하는 모습 보고, 미국 땅 뜨는 거였는데 그걸 대표님이 해주셨다니까요?!”
그녀가 어찌나 활짝 웃던지 하얀 치아가 반짝였다.
함자와 함께 블랙 스튜디오를 방문한 이후로 제니퍼와 마크가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는 아예 들은 바가 없었다.
“제니퍼랑 어떤 사이였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오! 절대 저를 제니퍼와 무슨 사이로 엮지 마세요. 엮이는 순간 불운이 찾아오곤 해서요.”
몰락하는 걸 보고 싶었다면서 무슨 사이인지 묻지도 말라니.
권현미는 나를 보며 생글생글 잘도 웃고 있었다.
그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스파이만 아니면 됐다.
뭐, 제니퍼 덕분에 제 발로 굴러온 인재를 낚아챈 셈이기도 하고.
“좋습니다. 출근은 언제부터 가능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