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87화 (87/140)

#87화. 표절은 선 넘었지

최세준은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제육볶음을 앞에 두고도 말이다.

‘너무 떠들어댔나.’

그는 원래도 말이 많다.

그런데 그날은 유독 말을 많이 한 것 같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평소에는 철저하게 일 이야기만 하던 신바드 대표가 무슨 일인지 자신을 추켜세워주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다.

사실 <안전지대>에 대한 이야기는 YJ E&M에서도 극비에 부쳐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200억을 투자한 사업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밥알을 하나 톡 건져 입으로 넣고는 더 깊은 걱정에 빠졌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신바드 대표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해 이 사실이 영화판에 떠돌기라도 한다면 분명 회사에선 직원들을 추궁할 것이다.

그러다 자신이 말했다는 것이 걸리기라도 한다면······.

인사고과가 무엇이냐.

해고당할 수도 있는 큰 사건이었다.

고개를 힘껏 저었다.

아니다.

신바드 대표가 자신과 한 약속을 어기지도 않을뿐더러 애초에 몇백 명이나 되는 직원 중 자신을 콕 집어 잡아낸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래. 이제부터라도 조심하면 되지.’

그렇게 정신승리를 한 최세준은 제육볶음 쪼가리를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팀장이 살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최 과장. 오늘 왜 이렇게 밥을 깨작거려?”

팀장은 <안전지대>가 채택되고 난 뒤부터 최세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배인규 회장 눈에 든 최세준을 확실히 자신의 라인으로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입맛이 조금 없네요.”

그러자 팀장은 큼지막한 고깃덩어리 하나를 최세준 밥그릇에 올렸다.

“안되지! 안돼! 우리 팀 에이스가 입맛이 없으면! 최 과장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만 해! 내가 쏠게! 저녁에 먹으러 가자고!”

그런 그가 부담스럽기도 했으나 전에 구박하던 거에 비하면 낫다.

“그럼 팀장님 좋아하시는 회사 앞 포차 가시죠. 거기 우동 먹고 싶습니다.”

우동 따위는 전혀 먹고 싶지 않았으나 진짜로 먹고 싶은 소고기를 이야기하면 팀장의 표정이 썩을 게 뻔했다.

“와! 최 과장! 오늘 내가 포차 가고 싶었던 건 어떻게 알고오?!”

어떻게 알긴.

팀장이 쏜다는 날은 어느 메뉴에 장소를 말하든 돌고 돌아 결국 포차로 결정된다.

“역시 우리 최 과장은 내 마음을 너무 잘 안다니까? 기분이다! 오늘 칼퇴 하자!”

꼴랑 포차 쏘면서 이번 생색은 또 얼마나 갈지.

사회생활이란 게 참으로 씁쓸했다.

최세준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팀장님!”

흡족한 미소의 팀장은 다시 밥을 먹으려다가 물었다.

“아! 그런데 우리 <안전지대> 저작권 신청은 들어갔지?”

아차, 최세준은 깜박하고 있었다.

원래 배급팀인 그의 업무에는 저작권 등록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안전지대>가 채택되면서 배인규 회장은 배급팀에게 제작 총괄 업무를 맡겼다.

PD를 포함한 감독, 스태프 등을 꾸리는 모든 전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애초에 YJ E&M에 제작을 도맡아 하는 팀이 없었으니 그냥 ‘너희가 해봐라’ 식으로 떠넘긴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실정이니 배급팀은 현재 제작사에서 하는 모든 일을 맡고 있었다.

다행인 건 전폭적인 지지로 배급팀에 인사 이동된 직원이 5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인사팀은 사람이 더 필요하면 말하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실수는 항상 일어나기 마련.

하물며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에는 그 확률이 높아진다.

“그럼요! 했습니다!”

조건반사적인 대답이 나갔다.

겨우 텐션이 높아진 팀장의 기분을 굳이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등록이야 사무실 들어가서 하면 된다.

최세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

최세준과의 만남에서 나는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첫 번째.

블로그 주인이 자신의 글을 YJ E&M과 직접 계약한 것인데 우리한테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거절한 것.

두 번째.

누군가가 블로그 글을 보고 시나리오화한 뒤 YJ E&M과 계약을 한 것.

둘 중엔 후자가 더 유력했다.

블로그 주인이 굳이 계약했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었으며 첫 번째 가설이 맞다면 최세준이 내게 말했을 것이다.

자신이 보석 같은 글을 무려 블로그에서 찾아냈다는 둥 자랑하면서 말이다.

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런데 분명 그는 신인 작가라고 했다.

물론 블로그 주인이 직접 시나리오화해서 계약한 뒤 블로그를 일절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가설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누군가가 표절했는데 그걸 최세준이 발견했고, 계약한 뒤 촬영 준비 중이라면?

오히려 이 가설이 딱 들어맞았다.

전자든 후자든 블로그 주인에게 꼭 확인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후자라면 표절이란 심각한 사안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대표실을 나가 나경에게 다가갔다.

“나경 씨. 그 블로그 말입니다.”

“블로그요?”

나경은 이미 블로그 주인에게서 퇴짜를 맞고, 다른 시나리오를 찾고 있었다.

그러니 잊었을 법도 한데 자신이 되물은 다음 정확히 2초 뒤에 손뼉까지 쳐가며 말을 이었다.

“아! 그 블로그요!”

“예. 혹시 다시 연락 한번 해줄래요?”

“응? 다시요?”

그녀는 잔뜩 궁금한 얼굴이었으나 아직 정확하지 않은 가설을 모두 이야기하긴 좀 그랬다.

“제가 그 이야기를 어디에서 본 것 같아서요.”

최대한 간략하게 말했으나 그 파장은 대단했다.

“네에? 그럼 그 글이 표절이라도 당했다는 말씀이세요?!”

나경이 깜짝 놀라 큰 목청을 자랑하자 주변 직원들까지 놀랐다.

“에? 누가 표절을 했어요?”

“아니, 표절은 선 넘었지!”

아마도 그들은 나경의 익숙한 목청보다는 ‘표절’이라는 단어에 꽂힌 듯했다.

그만큼 이쪽 판에서 ‘표절’은 언제나 민감하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네! 표절이라면 말도 안 돼요!”

잔뜩 흥분한 그녀에게 전했다.

“그분이 놀랄 수 있으니까 너무 심각하게 말하지는 말고, 혹시 우리가 연락하기 전이든 후든 계약한 곳이 있는지만 확인해주세요.”

나경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넵! 알겠습니다!!”

*

안타깝게도 나경에게 온 답은 내 두 번째 가설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

-대표님. 계약한 곳은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를 직접 만나봐야 했다.

전화나 메일로 이야기하기에는 사태가 중대했다.

나경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대충 공유하고, 블로그 주인과 만날 수 있게 연락해달라고 전했다.

그리고 오늘.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두툼한 코트를 꺼내 입고, 향한 곳은 서울역 근처의 한 카페.

블로그 주인에게 만나기 편한 장소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곳이라고 말했단다.

그곳엔 나경과 임윤서 사건 때 안면을 튼 박재익 변호사까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야기하다 나올 법적인 문제에 대해 즉각적으로 자세히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고.

변호사라고 하면 블로그 주인의 신뢰도가 높아질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셋이서 약속 상대를 기다리길 10분.

딸랑-.

카페 입구에 달린 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다.

들어온 사람은 20대 초반의 젊은 남성.

그는 두툼한 패딩에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채 큰 배낭을 메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닐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응? 전화가 왔어요!”

나경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

“여보세요?”

20대 남성이 그 모습을 확인하고, 우리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만나기로 한 아라비안필름 관계자분들 맞습니까?”

나경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블로그 주인님?”

정체 모를 호칭에 그가 풉 하고 웃었다.

“네. 금현석이라고 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길을 조금 헤맸어요.”

그렇게 우리는 논란의 중심인 금현석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차분히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에게 알렸고.

금현석은 다행히도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대표님 말씀은 YJ에서 제 블로그 글을 무단으로 도용해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확신하진 못하지만, 관계자에게 듣기로는 그렇습니다.”

사실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면 없다.

최세준에게 들은 말이 전부였으나 그 내용이 너무나도 똑같은 걸 어떻게 하겠는가.

YJ에서 지금 준비 중인 영화의 시나리오를 달라고 한들 그들이 쉽게 내줄 리도 없다.

또 공론화하면 분명 이들은 교묘하게 빠져나갈 것이다.

표절이 맞지만, 표절이 아니도록 시나리오를 수정할 게 뻔했다.

금현석은 이번에 박재익에게 물었다.

“변호사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이런 일 전문 변호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법적으로는 처벌할 수는 없습니까?”

그러자 박재익은 내 생각과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아직은요. 대표님 말씀만 들어보면 우선 두 글의 유사성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로 영화가 개봉한 것도 아니고, 책으로 출간된 것도,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당장에 법적 처벌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박재익의 답에 금현석은 그저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자신의 글이 도용당했다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는 그의 태도가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처음 우리 제안을 거절한 것도 그렇고, 작가로서의 꿈이 아예 없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도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가 없는데······.

“이런 일을 알게 된 이상 원작자에게 알리는 게 도리라서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좋은 글이든 나쁜 글이든 대기업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창작물을 가져다 쓸 권리는 없는 거니까요.”

내 말에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잠시 그를 기다렸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는 듯하다.

처벌 의사든 싸우고자 하는 의지든 원작자에게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나설 필요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저희는 알려드렸으니 이만-.”

그렇게 일어서려던 그때.

“잠시만요.”

금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에 빠지면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요.”

그 말을 듣는데 누군가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괴짜의 향이 폴폴 난다.

하여튼 그건 차치하고.

“그렇게 골똘히 한 생각에 결론은 뭡니까.”

어느새 바닥을 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작가에 대한 제 열망이 얼마나 큰지 객관적으로 생각해봤습니다.”

그 표정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분명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런데 글을 뺏겼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화나네요. 아, 물론 과학적으로 화를 낸다고 해서 그 화가 풀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화를 ‘표출’하면 그러지 않았을 때보다 ‘공격적’으로 변하기 마련이죠.”

갑자기 이놈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당황스러웠다.

“아, 잠시 딴 길로 샜네요. 어쨌든 저는 이 ‘화’를 이번엔 표출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겁니까?”

“뺏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

내가 원하는 대답은 이런 종류였다.

이 정도 마음가짐 정도는 있어야 명분이 생긴다.

“앞으로도 글을 계속 쓸 생각이 있다면 꼭 그런 마음가짐으로 쓰세요. 자신이 먼저 지킬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금현석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도와주시는 겁니까?”

“예. 하지만 일전에 말씀드린 영화화를 저희와 계약하시는 조건입니다. 그래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가야 할 곳이 있어요.”

모두를 일으켜 세우자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어디를 말입니까?”

“당연한 거 하러 가야죠.”

누누이 강조하지만, 저작권 등록은 정말 필수 중에도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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