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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86화 (86/140)

#86화. 알아서 굴러가는 눈덩이

올해 22살인 금현석은 학교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한 시간을 집중하다 보니 목덜미가 아려왔다.

스트레칭이라도 하려고 올려다본 하늘에는 햇빛이 들어왔다 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위를 덮고 있던 나무 한 그루의 달린 잎들이 스스스스-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햇빛을 가리는 중이다.

금현석은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지진의 여파는 저 멀리 무수히 모여있던 사람들에게까지 닿았다. 그들이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높은 가을 하늘 바람에 몸을 맡긴 나뭇잎과도 같았다.]

금현석은 1년 전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틈틈이 하나의 글을 올리고 있었다.

글쓰기는 책을 좋아하는 그가 자신도 이런 멋진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시작했는데.

대학생인 그에게는 말 그대로 취미였다.

그런데 최근 이 글을 본 한 영화사에서 영화화 제안을 받으면서 그의 마음은 완전히 흔들렸다.

‘내 글이 영화라니······.’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니, 말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금현석은 지금의 학업을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런 자신이 어떻게 영화화하는 작업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에게 거절의 답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어렸다.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는 건 그 나이대의 불문율과도 같았다.

그래서 우선 학교를 졸업한 뒤에 제대로 도전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혹시나 그때는 영화화가 물 건너가더라도 책으로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대사 위주 글에 묘사라는 걸 넣어보려고 노력 중인 것이다.

그러나 묘사라는 것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감각이 있어야 가능한 영역이었다.

어쩔 수 없이 주변을 관찰하며 그 모습을 글에 대입해보니 이제야 조금씩 되는 것도 같았다.

그때.

근처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불렀다.

“현석아! 너 다음 수업 ‘미래 로봇의 이해’ 아니야?”

그는 자신의 동기였다.

“응? 맞아!”

“근데 거기서 뭐해? 늦었어! 우리!”

그 말에 시간을 확인해보니 정말 수업 시간이 임박했다.

“나 먼저 간다! 빨리 와!”

“같이 가!”

동기는 그의 부르짖음에도 멀어졌고.

금현석은 널려있던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다급해진 그가 일어나자 벤치에 가려져 있던 잠바 뒤에 새겨진 글씨가 보인다.

[KAIST]

그는 방금까지 동기가 있던 방향으로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

양상철이 보낸 10만 평 부지 관련 서류들을 확인해본 결과.

이 땅은 우리에게 딱 알맞은 땅이었다.

옆으로 바로 한강이 흐르고 있어 경치도 좋았고, 서울에 인접해 교통도 좋았다.

거기다 쓰레기 매립지가 주변에 들어선다는 소식 때문에 주변 시세보다 훨씬 쌌다.

내가 아는 미래엔 이 근처에 쓰레기 매립지가 들어서지 않는다.

그러니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어쨌든 오픈 세트를 지으려면 계약이 완료되어야 했기에 빠르게 양상철을 만났다.

그와 만난 당일.

양상철은 직접 미사리로 나를 데리고 가서는 땅을 확인시켜줬고, 계약 진행까지 도왔다.

그리고 오늘은 한주건설 안용덕 팀장과의 미팅이 있는 날이다.

“잘 지내셨어요?”

그는 얼굴이 약간 탄 듯했다.

요즘은 영업 외에 현장도 살피는 모양이다.

“그럼요. 대표님은 더 멋져지셨습니다.”

최근 예정우가 하도 옷을 차려입고 다니라는 통에 신경을 좀 쓰고 다닌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표정이 여유롭다는 게 크겠지만.

멋쩍게 웃고는 카페에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그와는 이미 여러 번의 미팅 경험이 있었기에 업무 이야기를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번엔 세트장을 지으신다고요?”

“예. 마시리 쪽에 지을 예정이고, 규모는 약 1만 2천 평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와, 꽤 넓네요?”

“촬영에 필요한 구간이 좀 많아서요. 그런데 지금 들어서 있는 폐건물도 좀 있고, 평탄화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용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작업은 영화팀에서 하기 힘들죠. 저희가 그 부분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몇 가지 더 있습니다. 이 세트장을 촬영 후에 관광지로 개발할 예정이라서요.”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좋은 생각이네요.”

안용덕의 말은 곧바로 이어졌다.

“어쩌다 알게 됐는데, 촬영에 쓰이는 세트는 끝난 뒤에 그대로 허문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그 말에 한 번 웃어 보였다.

“그렇죠. 그래서 이번엔 활용해보고자 합니다. 들어갈 건물이 약 200여 동인 데, 대부분 가건물로 밖에서 관람할 용도로 지을 예정이고, 7~8동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건축할 예정할 겁니다.”

건물을 영화 세트장으로만 사용하는 것과 실제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짓는 것은 아예 다르다.

“그럼 그 부분을 맡으면 되겠군요.”

“맞습니다. 골조 튼튼하게 해서 지어주세요. 내부는 기본적인 마감만 해주시면 됩니다. 인테리어는 저희 쪽에서 하겠습니다.”

이 건물들은 나중에 기념품 숍 등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틈틈이 메모하던 그에게 몇 가지를 덧붙였다.

“그리고 전체적인 세트장 구조검사랑 허가까지 맡아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구조검사에 대한 비용은 따로 지불하겠습니다.”

“대표님은 참 이런 게 좋습니다. 보통 돈이 많이 드니까 어물쩍 지나치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건 역시 안전이죠.”

맞다.

두 번, 세 번 강조해도 나쁘지 않은 부분이었다.

*

안용덕 팀장과의 만남이 있던 이틀 뒤.

또 한 명의 사람을 만났다.

“과장님. 저번에 배 회장님 시사회장 오신 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장난식의 농담이었는데 최세준 과장은 아연실색했다.

“어휴! 그 건은 정말 저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제가 바로 연락을 드렸죠.”

“농담입니다. 잘 지나갔으니 됐죠.”

<어울림>의 후반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항상 만나왔던 최세준 과장과의 미팅은 직원들에게 지시해도 됐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오늘도 직접 나섰다.

“그나저나 대표님. 제가 수중 세트장 매출 꾸준히 올려드리는 건 알고 계시죠?! 다음 작품도 저희랑 계속하셔야 합니다? 하하!”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었으나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훤히 보였다.

언제든 우리가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아주 바람직한 자세였다.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저렇게까지 하는데 말이라도 해줄 수 있지.

“그럼요. 당연하지요.”

우리는 가면을 벗지 않은 채 서로를 보며 방긋 웃었다.

“이번 작품은 개봉 시기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어울림>은 국내보단 해외 성적이 좋다.

하지만 해외에서 신드롬을 일으키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이건 내가 뭘 해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었으니 차라리 빨리 개봉하는 편이 좋았다.

“후반이 아마도 11월 초쯤 끝날 것 같습니다. 그럼 바로 시사회부터 진행하고, 중순쯤 개봉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그 말에 최세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는 마켓이나 영화제에 출품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울림>은 흥행, 수출, 영화제 모두 우리가 할 일이 없었다.

말 그대로 알아서 굴러가는 눈덩이였다.

“예. 이번에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국내 배급에만 신경 써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눈덩이를 그대로 보고만 있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보다 굿즈 제작을 좀 하고 싶은데요.”

“굿즈요?”

“예. <어울림>은 아이들 겨냥한 영화이니 ‘현서(이서아)’랑 동물들 캐릭터화해서 극장에서 같이 팔면 수익이 꽤 될 것 같습니다.”

“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최세준은 가지고 온 노트북에 내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타이핑하는 중이었다.

방금의 굿즈 사업도 열심히 적는 중이었는데, 아주 입이 귀에 걸리기 직전이다.

그 모습을 보니 회사에 자신의 아이디어마냥 말할 것이 눈에 훤했다.

절대로 그렇게 내줄 생각은 없다.

“대신 캐릭터는 저희 쪽에서 디자인하겠습니다. YJ E&M에선 유통만 도와주시면 될 듯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내 말에 한껏 힘이 빠지는 걸 보니 예상이 맞았나 보다.

그러나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다음 사항을 전달했다.

“그리고 홍보 방향 말입니다.”

그는 힘이 빠진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떤 방향이 좋을까요?”

“당연히 아이들보단 엄마들을 잡는 것이 좋겠죠.”

“엄마들이라, 맘카페 같은 곳을 공략해볼까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맘카페는 오히려 반감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쪽으로?”

“제 생각에는 젊은 엄마들에게 영향력이 큰 파워 블로거를 섭외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는 동감하며 이 부분도 노트북에 타이핑을 완료했다.

이로써 오늘 내가 그에게 할 예정이었던 <어울림>에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끝났다.

이제부터는 개인적으로 궁금한 이야기를 물을 차례였다.

“최 과장님. 그런데 말입니다.”

말하고 보니 웬 교양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떠오르는 말이었으나 상관없었다.

“예?”

“YJ에서 영화 제작 중이라는 소문이 돌던데요?”

최세준의 분위기는 놀라울 정도로 급변했다.

“아! 들으셨습니까?!”

그 모습은 뭐랄까.

뭔가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코뿔소 같았다.

사실 무척이나 궁금했다.

전생에서 영화를 제작하지 않던 YJ E&M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꾼 이유와 이들은 도대체 어떤 영화를 첫 영화로 제작할 것인가.

그러니 코뿔소를 더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무려 YJ에서 첫 영화를 제작한다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소문이 파다합니다. 도대체 무슨 영화를 제작하는 겁니까?”

최세준은 임금님 귀라도 내게 실토하듯 아주아주 조심스러웠다.

“이건 정말 대표님한테만 알려드리는 겁니다. 어디 가서 절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새끼손가락이라도 내밀 기세였다.

순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으나 영화를 제작하는 순간 YJ E&M은 경쟁사가 된다.

경쟁사의 정보가 곧 넘어오기 직전인데 못할 건 또 뭐겠나.

“당연합니다. 어디 가서 이야기할 곳도 없습니다.”

거짓말이었다.

고개만 돌리면 이야기할 곳 천지였다.

“휴우. 알겠습니다. 사실 배인규 회장님의 특별 지시였습니다.”

이건 예상했다.

배인규 회장의 직접적인 지시가 아니었다면 일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추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것보다 배 회장의 의중이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어차피 최세준도 모를 테니 말이다.

대충 놀란 척을 해주자.

“예?! 정말입니까?”

그의 어깨가 잔뜩 올라가더니 으쓱였다.

“예! 그래서 저희도 정말 한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작품은 결정 난 겁니까?”

“그게 또······. 하하! 이거 참!”

뭔데 저러는 거지.

“하하! 저희 배급팀에서 올린 시나리오가 채택됐지 뭡니까!”

그제야 그가 자랑스러운 코뿔소 얼굴이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를 한 번 더 올려 세워주고.

“와! 대단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장르가 뭔지만 살짝 말씀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너무 궁금해서 말입니다.”

이건 내가 최세준이라도 풀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대로 혹시 모르니 물은 것이다.

역시 입을 쉬지 않던 그가 이번에는 살짝 망설였다.

뭐, 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마음을 접으려던 그때.

“재난 영화입니다.”

원하던 답이 나왔다.

음, 그런데 재난 영화?

“완전 블록버스터예요. 블록버스터.”

순간적으로 일전에 봤던 그 글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래서 더 멈추지 않았다.

“역시 YJ라 예산 짱짱한 장르로 제작하는군요!”

“하하, 뭐 그런 셈이죠. 예산은 200억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진 재난이라서요. 그보다도······.”

얄팍하게 버티고 있던 그 입은 결국 터져 정보를 술술 불기 시작했다.

“이게 말입니다. 신인 작가인데, 심리 묘사가 아주 장난이 아닙니다. 또 전개가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그렇게 한참 그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최세준이 말하고 있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 블로그 글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아니, 주인공의 이름조차 똑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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