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85화 (85/140)

#85화. 불구덩이일지 금구덩일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

처음부터 그들에게 30%를 던진 건 25% 이상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어느 흥정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하물며 시장에서 흥정할 때도 쓰였으니 말 다 했다.

그러나 흔한 방법이라고 해서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들이 갑작스러운 30%를 거부할 것은 당연지사였고.

흥정을 자신들이 원하는 최소한부터 시작할 것도 당연했다.

여기서 내가 피곤한 흥정을 시작했다면 이들은 두 번째 조건을 원활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아, 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하시죠.

그래서 2차 저작권에 대한 조건은 순탄하게 합의할 수 있었다.

25%면 손해는커녕 다른 나라의 어느 작품보다 5%를 더 받는 좋은 조건이었으니 계약서는 온전히 우리에게 유리한 쪽이었다.

그들은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25%에 합의하는 것이 일련의 목표였는지 계약서는 금방 준비되었다.

전해성과 같이 계약서를 꼼꼼히 더블 체크한 뒤.

문제가 없다는 걸 판단하고, 그들에게 다시 전달했다.

-자,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미국 출장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아, 출발하기 전에 이 말을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피아. 사실 신 감독은 <왕국 : 역병의 시작>의 시즌 2를 집필 중입니다.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네? 시즌 2요?! 세상에······.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그녀의 마지막 표정은 잊을 수 없었다.

소피아는 마치 괴물을 마주한 것 같은 눈 코 입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

최세준은 최근 꽤 흥미로운 시나리오를 발견해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뺀질 나게 들락거리던 시나리오 마켓에서 본 작품이었는데.

처음엔 별생각 없이 클릭한 것이었으나 첫 장을 읽자마자 바로 예약을 걸었다.

시나리오 마켓의 유료 회원은 작가가 올린 본문을 읽고, 괜찮은 작품에 예약을 걸면 그 순서대로 작가와 접촉할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고민해보겠다는 답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제작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최세준은 YJ E&M 소속이었다.

최근 YJ E&M이 영화 제작을 위해 시나리오를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작가들 사이에서 돌고 있었고, 이미 계약한 작가의 규모도 꽤 되었다.

이 흥미로운 시나리오 작가도 자신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이거 봐라.

예약을 걸어놓은 지 채 30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채팅이 왔다.

깜박이는 채팅 알람을 보며 최세준은 생각했다.

배인규 회장의 지시가 내려온 지도 벌써 한 달.

팀원들이 올린 시나리오를 팀장 선에서 한 번.

그 위 부장 선에서 한 번.

마지막으로 임원 선에서 한 번 추려 지금까지 몇 차례를 올렸으나 배인규가 시나리오를 고르는 눈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시나리오는 유명감독부터 신인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었고, 장르도 다양했는데 말이다.

최세준은 이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분명 회장님이 원하는 장르가 있을 거야.’

로맨스, 공포, 드라마, 액션, 코미디, 스릴러 등등.

올라간 수많은 장르 중 딱 하나 없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재난영화.

외국에선 <허리케인>, <아마겟돈>, <인디펜던스 데이> 등과 같은 재난 물이 끊임없이 개봉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선 아직 이렇다 할 재난영화가 나온 적이 없다.

예산이나 기술적인 문제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시도에 겁을 먹기 마련이다.

수익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는 상업영화판에서 불구덩이일지 금구덩일지 모를 구덩이에 먼저 뛰어드는 영화사는 흔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재난 물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들도 없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진 재난영화라는 이 <안전지대>는 흔한 장르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이거라면 분명 혹하실 거야.’

채팅 알림을 클릭한 뒤 작가에게 신분을 알리고, 계약 의사를 밝혔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YJ E&M 최세준 과장입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도 이름을 밝혀야 하나요?]

가끔 이런 내향적인 작가들이 있긴 하다.

[아니요. 계약서 작성할 때 말씀해주셔도 괜찮습니다. 계약은 본인 이름으로 하셔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네. 그럼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으실까요?]

당연히 작가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좋습니다.]

작가와 미팅 약속을 잡고, 이번엔 애증의 관계인 팀장을 찾아갔다.

팀장실까지 이어지는 골목골목마다 다른 팀들의 곡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그들은 오늘도 고통받는 모양이다.

자신은 칭찬받을 생각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똑똑-.

두드리고 들어간 팀장실의 팀장은 잔뜩 심술이 난 얼굴이었다.

“팀장님!”

“왜! 시나리오 가지고 오는 거 아니면 나 찾지 말랬지?!”

“찾았습니다!!”

“뭐?”

그 말에도 팀장의 미간은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왜 빈손이야!”

최세준은 조용히 팀장 책상으로 가서는 시나리오 마켓 사이트를 접속했다.

팀장은 순간 놀래서는 큰 소리가 쏙 들어갔다.

“자네 지금 뭐 하나?”

“찾은 거 보여드리려고요!”

자신의 아이디로 접속해 방금까지 이야기를 나눈 작가의 시나리오를 열었다.

시나리오는 계약이 완료될 때까지 출력할 수 없다.

그래서 보통은 컨택 한 뒤 보고하기 전에 계약을 완료하는 순서다.

“이번엔 진짜로 괜찮은 거니까 이거 다 보시면 알려주세요. 내일 작가랑 미팅도 잡았습니다.”

그제야 팀장의 미간이 조금 누그러졌다.

“미팅을 잡았다고?”

“예! 마지막으로 속는다 생각하시고, 읽고 보십시오.”

팀장은 최세준이 방금까지 앉아 있던 자신의 의자에 슬그머니 앉았다.

“최 과장. 너 이번에도 아니면 진짜 고과에 반영할 거야!”

이제 저런 협박은 최세준에게 통하지 않았다.

“미팅 잡은 거 칭찬하실걸요. 팀장님 마음에 쏙 드실 겁니다.”

그는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이 <안전지대>로 자신이 동기보다 훨씬 앞설 미래를 말이다.

*

<망자와 함께>가 최종 스코어 800만으로 극장에서 내려왔고.

국내 추가 수익은 약 42억 정도였다.

국내 수익만 총 112억이었으니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박지연이 정산 서류를 잘 정리해 가져다줬는데, 그 수치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이래서 다들 영화판에 뛰어드는구나.

생각이 절로 들었다.

컴플릭스는 계약을 마무리한 뒤 1차 제작비를 송금해왔다.

곧바로 신서영은 배우 캐스팅을 시작으로 <왕국 : 역병의 시작> 프리에 돌입했고.

그 기간은 대략 5개월로 지금이 10월 초였으니 내년 3월 초 크랭크 인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로써 아라비안필름에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사업은 이와 같았다.

후반 마무리 작업 중인 <어울림>.

프리 진행 중인 <처절한 인생>과 이제 막 시작한 <왕국 : 역병의 시작>까지.

사실상 계속 두 영화를 겹쳐 동시에 준비하고 있었기에 무리는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양상철의 전화가 슬슬 오면 좋겠-.

지잉-.

지잉-.

그도 양반은 못 될 위인인가 보다.

[양상철 대표]

“예. 대표님.”

전화기 너머로 잔뜩 신이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 대표! 찾았어요!

신은 내게 회귀라는 선물을 주면서 운도 같이 준 것이 분명하다.

타이밍이 또 이렇게도 맞아떨어졌으니 말이다.

“땅을 찾으신 겁니까?”

-신 대표는 역시 척하면 척이네요!

“위치가 어딥니까?”

-미사리요. 땅 주인이 8명으로 나뉘긴 하는데, 오늘 모두 합의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미사리라, 위치도 괜찮다.

“고생하셨습니다. 계약을 빠르게 하고 싶은데 조만간 한번 뵙죠.”

-어이구, 신 대표는 무슨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 땅 가격을 묻지도 않고, 결정합니까. 허허.

“당연하죠. 대표님께서 터무니없는 가격의 땅을 제게 보여주실 리는 없지 않습니까.”

-이것 참!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그럼 만나기 전에 내 직원한테 땅 위치랑 이것저것 서류랑 해서 보내 놓으라고 하겠습니다.

그가 전화를 끊으려 길래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요청한 지 약 2달 만의 성과였으니 그가 얼마나 이 땅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했는지 눈에 선했다.

그러나 그는 호통치듯 답했다.

-무슨 소립니까?! 이건 내가 지금까지 신 대표에게 받은 것들에 대한 답례예요. 땅을 사주는 것도 아닌데 우리 사이에 너무 예의 차리지는 맙시다.

양상철의 허허! 웃음소리는 전화를 끊으면서도 들렸다.

기분 좋은 통화를 마치고, 나는 정말로 안심했다.

다행히도 <왕국 : 역병의 시작>의 프리가 시작될 무렵 원하던 땅을 찾았으니 말이다.

잠시 생각을 하다 신서영과 차 PD를 방으로 불렀다.

“차 PD님. 잘 아시겠지만, 이번에는 <어울림>보다 더 힘든 촬영이 될 겁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 : 역병의 시작>은 좀비가 나오는 데다 시대물이다.

좀비 떼 씬 촬영이 빈번할 것이며.

그런 날에는 보조 출연자들을 좀비로 변신시키기 위해 분장팀, 의상팀, 제작팀이 촬영 몇 시간 전부터 나와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타 팀과의 시간 계산도 따로 해야 할 것이고.

여러모로 차 PD가 신경 쓸 게 많아진다.

그뿐이 아니었다.

구한말 설정에 따라 지뢰를 설치해 둔 다음 좀비들이 지나갈 때 터뜨리는 장면, 좀비들이 불에 타는 장면, 와이어를 매달아야 할 장면들도 꽤 있었다.

차 PD는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이었다.

“언제 또 좀비 물을 찍어 보겠습니까.”

그래. 차 PD 경력이면 알아서 잘할 것이다.

“아, 그리고 오픈 세트 말입니다.”

이번 영화는 구한말을 시대 배경으로 하는 만큼 거리가 형성되어 있는 오픈 세트장이 필요했다.

“안 그래도 전국적으로 서치 중입니다. 후보 결정되는 대로 신 감독님한테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차 PD는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로 신서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감독님. 거리 모습이랑 출연하는 건물 외관 원하시는 대로 미술팀이랑 상의하시면 됩니다.”

“네?”

신서영도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잠깐 답답했으나.

그래. 전혀 생각지 못할 수도 있지.

나는 둘에게 또박또박 전달했다.

“오픈 세트 전체. 저희가 지을 겁니다.”

차 PD가 화들짝 놀랐다.

“예?! 전체를요?! 어디에다 말씀이십니까?”

“미사리 쪽이 될 것 같습니다. 세트팀 작업 들어가기 전에는 정리 끝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시고요.”

그는 그래도 더 물을 게 남았는지 격양된 목소리였다.

“하지만! 대표님! 그렇게 되면 예산이 오버 될 텐데요?!”

“괜찮습니다. 오버 되는 예산 아라비안필름에서 지불할 겁니다.”

신서영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대표님. 제가 잘은 모르지만, 굳이 세트장을 저희 돈 써 가면서까지 지을 이유가 있을까요? 그게 혹시 영화를 위해서라면 제가 주어진 상황에 맞춰 보겠습니다.”

물론 영화의 퀄리티도 중요하긴 했으나 나는 전혀 이런 이유에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뭐 이렇게 생각하게 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아닙니다. 감독님은 영화에만 신경 써주세요. 책임은 제가 집니다.”

그 말에 신서영이 말했다.

“하아······. 정말 대표님 열정은 못 당하겠네요.”

차 PD도 그 말을 옹호했다.

“그러게요. 영화를 위해서 구한말 세트 지을 생각을 하시다니······.”

둘은 뭔가 굉장한 오해를 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딴생각 중이었다.

음, 입장료는 얼마가 좋으려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