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84화 (84/140)

#84화. 삶의 진리

내 컨펌까지 받은 나경은 곧바로 블로그 주인과 접촉을 시도했다.

직원들 사이에서 ‘추진력 갑’으로 불리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주일 뒤 그녀는 세상 침울한 표정으로 나를 찾았고.

전해온 소식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연락이 오시긴 했는데요······.

주인의 답에 따르면 자신이 블로그의 올린 글은 상업적인 기대로 쓴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취미였다고 한다.

또 자신이 현재 영화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전혀 생각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단다.

그래도 너무 단칼에 자르는 건 미안했는지 고민해보겠다는 문장으로 답신이 끝났는데.

누가 봐도 돌려서 하는 거절의 답이었다.

-나경 씨. 기획하다 보면 이런 일 다반사예요. 속상하겠지만, 어쩔 수 없죠. 뭐.

오히려 처음부터 이렇게 이야기해주는 게 편하다.

나중에 프리나 촬영 중에 변덕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네. 그럼 다른 시나리오 찾아보고 다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축 처진 어깨로 방을 나섰다.

영화를 기획할 땐 뭐니 뭐니 해도 원작자 의견이 제일 중요하다.

그들이 싫다는데 우리가 억지로 그 이야기를 가져다 쓸 순 없으니까 말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창밖을 보고 있는데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단정한 승무원의 안내에 고개를 끄덕였다.

옆 좌석에서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던 신서영이 깜짝 놀라더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중얼거리며 노트북을 덮었다.

“감독님. 집중력이 대단하시네요.”

그녀는 내 말에 멋쩍은 듯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요. 그냥 시나리오 쓸 때는 딴생각을 잘 못 해서요.”

최근 신서영은 <왕국 : 시간의 비밀> 집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마 이것도 굉장한 수작이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품는 중이다.

<왕국 : 역병의 시작>이 흥행만 제대로 하면 순탄하게 이어갈 수 있을 텐데······.

어쨌든 아직 컴플릭스와의 계약도 체결한 것이 아니니 이른 고민이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앞 좌석에 있던 전해성의 목소리였다.

그에게는 최근 회사로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우리 회사와 하는 일은 모두 재밌었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이제부터 이번처럼 통역으로서의 동행과 영화 번역, 또 해외에서 오는 서류들에 대한 번역도 도맡기로 했다.

앞으로 해외와의 교류가 많을 예정이니 실력 있는 그를 미리 섭외한 건 다행이다.

그렇게 우리는 승무원이 가져다준 저녁을 먹은 뒤 잠을 청했다.

신서영과 함께이기도 하고, 장거리 비행이다 보니 비즈니스 좌석을 예매했는데, 자꾸만 일등석에 앉아 귀국하던 때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문득 이래서 위로 올라간 사람들이 아등바등 그 높이를 유지하려고 하는 거구나.

괜한 삶의 진리를 한 번 더 깨달으며 눈을 감았다.

못내 아쉬운 다른 마음도 함께 감으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나경이 찾은 그 블로그 글.

정말로 괜찮았는데.

애써 잠들어보려 뒤척이는 동안에도 비행기는 순조롭게 캘리포니아로 향하고 있었다.

*

“됐다아!”

여전히 껌껌한 방 안에서 꾀죄죄한 몰골이던 이주호는 뭔가를 완성한 듯 두 팔까지 높이 올려 자축했다.

그 모니터에 적혀 있던 것은 근 일주일간 열심히 적은 시나리오.

아니, 정확히는 모 블로그 글을 시나리오화 한 것이다.

상업용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기간은 사람에 따라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기도 하는 작업이지만.

이주호는 글에 담긴 모든 캐릭터의 이름, 대사, 서사 등을 다 끌어왔으니 일주일밖에 소요되지 않은 것이다.

또 그 블로그 글은 사람의 심리 상태를 묘사가 아닌 대부분의 대사로 처리한 글이었기에 가능했다.

‘이제 이 시나리오로 입봉만 하면 된다!’

그는 작업을 완료하고, 대단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 시나리오는 완벽히 자신의 창작물이라는 것.

그래도 이성이 조금 살아있던 일주일 전에는 자신이 이렇게 시나리오로 만듦으로써 이 글도 빛을 보는 거라는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고.

지금은 조회 수도 몇 안 나오는 이야기의 주인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없던 제목까지 그럴싸하게 붙였다.

<안전지대>

재난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안전지대라는 인식이 있는 지진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기에 이주호 생각에 딱 알맞은 제목이었다.

이제 이걸 마켓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사이트에 접속해.

클릭.

클릭.

클릭.

시나리오를 올리는 일은 쓰는 것만큼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다.

이주호의 얼굴엔 음흉한 미소가 만연했다.

‘허훈. 기다려라. 얼마 안 남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

소피아는 주간 회의가 없는 날임에도 회의실에 보스와 함께 앉아 있었다.

둘은 현재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 누군가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날아오고 있는 세 명.

“보스. 제가 한국에 대해 좀 잘 아는데, 한국인들은 특징이 있더라고요.”

보스의 귀가 움찔했다.

비즈니스를 하는 나라의 특성을 미리 알아두는 것은 필수였으나 미팅 일정이 갑작스러워 그에겐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래? 무슨 특징?”

“그들은 예의를 중시하고, 정이 많다고 했어요.”

“음······.”

보스는 소피아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예의’, ‘정’.

그게 무엇인지 도대체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스, 지금 이해 못 했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피아는 한숨을 한번 푸욱 쉬더니 열정적인 강의를 시작했다.

“자, 보세요. 예의를 중시한다는 건-.”

약 30분간 지속된 그녀의 강의가 끝나자 그제야 보스는 약간의 감이 왔다.

“그러니까 비즈니스를 하더라도 단호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라는 거야?”

완벽한 답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저 정도면 까막눈이었던 아까 보단 낫다.

“네. 뭐,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죠. 또 성격이 급한 한국인들도 많다고 하니 보스도 너무 답답하게 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조건으로 협의하실 거예요?”

“처음엔 25%를 부를 거야. 그들이 반발하면 26, 27%로 올려보는 거지. 과연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소피아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회의 중 덴버의 발언으로 자신도 보스도 주변 지인들에게 신바드의 정체를 아는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블랙 스튜디오에 몸담았었던 사람과 연락이 닿았고.

그녀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는 동양의 떠오르는 제작사 대표예요. 무려 함자가 뒤를 봐주고 있는 사람이라고요! 블랙 스튜디오의 마녀라고 소문난 마야도 쩔쩔맸던 남자인데, 과연 컴플릭스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소피아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사실 함자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라면 제작비가 아쉽지 않겠죠. 원하는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왕국 : 역병의 시작>을 놓칠 수도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친근했던 그가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게. 협의가 잘 됐으면 좋겠는데.”

보스도 내심 걱정하는 눈치였다.

“좋은 작품과 인재를 놓치는 것보다 아쉬운 일은 없으니까.”

*

다시 만난 소피아의 표정은 아주 의미심장했다.

“잘 지내셨어요? 대표님?”

“예. 그럼요. 다시 이렇게 볼 수 있게 돼서 정말 다행입니다.”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던 그녀는 마치 내게 배신당한 시련의 얼굴이었다.

뭘 잘못했나?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내 옆에 있던 신서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이분이 혹시 신 감독님?!”

“예. 맞습니다.”

신서영의 정체를 알아낸 소피아는 그녀에게 반가운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감독님! <왕국 : 역병의 시작> 시나리오로 단숨에 팬이 됐는데 <망자와 함께>는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어요. 이렇게 먼 길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전해성이 신서영에게 요점과 뉘앙스를 정확하게 설명하니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양 볼을 붉혔다.

“그렇게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소피아는 통역이 없어도 대충 그 말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흐뭇하게 웃었다.

“꼭 같이 작업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녀는 힌트라도 준 것일까.

“그럼 이쪽으로 가시죠. 보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피아가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갔고.

회의실에는 입고 있는 정장이 곧 터질 것 같은 덩치의 흑인 남성이 앉아 있었다.

“보스. 모셔왔습니다.”

그는 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우리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표정이 풀어졌다.

“오, 반갑습니다. 아시아 기획을 총괄하고 있는 다넬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저희 요청을 흔쾌히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반갑습니다. 신바드입니다.”

다넬은 생각보다 유쾌한 사람이었다.

비즈니스적인 미소일지 몰라도 호쾌한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피아가 얼마나 이야기를 많이 하던지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그런가요? 저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회의실 자리에 앉았다.

전해성은 컴플릭스 측에서 하는 이야기를 신서영에게 빠짐없이 전달하느라 바빴고.

신서영은 그 내용을 소화하느라 바빴다.

대화는 내가 이끌어 가야만 한다.

나는 그들이 먼저 뭔가를 말하기 전에 주도권을 잡았다.

“업무에 관한 것은 본론부터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괜한 미사여구를 붙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요. 이미 이곳으로 오는 시간도 많이 소요했기에 저희를 부르신 이유를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은 내 단호한 태도에 살짝 놀란 듯 움찔하다가 오히려 반가운 기색으로 변했다.

“오, 그렇게 먼저 이야기해주시니 오히려 제안하기가 수월하겠군요.”

컴플릭스가 한국과 거래하는 것이 처음이기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할까 싶어 던진 말이기도 했고.

혹시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다행히도 내 생각은 기우였는지, 다넬은 우리를 최대한 예우하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다시 한번 만나 뵙길 원한 이유는 소피아에게 제안한 조건에 대한 합의점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대충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으나 그저 담담하게 물었다.

“구체적인 합의점을 말씀해주시죠.”

“요청하신 30%의 수익 비율을 25%으로 내리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 쪽에선 어느 나라건 아직 20% 이상의 금액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한 번에 10%를 올리는 것은 아무리 흥행이 보장된 영화라도 힘든 점이 있습니다.”

나는 조심스러운 다넬의 말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러죠. 25%에 합의하겠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내가 그 제안을 받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지.

“그러시겠죠. 아무래도 이건 좀 힘드-.”

이상한 대답을 하다가 화들짝 놀랐다.

“예?! 지금 25%에 합의하겠다고 답하신 겁니까?”

다넬의 목청에 소피아는 물론 신서영과 전해성까지 놀란 눈치였다.

“예. 대신 2차 저작권은 그대로 저희 쪽에서 갖는 걸로 유지해주시고, 계약서는 오늘 작성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우편으로 주고받는 것보다는 온 김에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내가 환하게 웃어 보이자 다넬은 입을 뻐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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