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일말의 양심
최세준 과장을 비롯한 YJ E&M의 전 직원은 최근 위에서 내려온 당황스러운 미션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와. 미치겠다. 갑자기 회장님이 다이렉트로 이런 지시를 내리면 다른 업무는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그러니까. 지금 다들 마비잖아. 마비.”
휴게실에서 불만을 늘어놓던 둘은 각각 기획 1팀과 2팀의 과장이었다.
둘은 같은 해 입사한 동기였는데.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휴게실 소파에 누워있던 최세준을 못 본 모양이다.
최세준은 눈은 그대로 둔 채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서 기획 1팀은 괜찮은 시나리오 좀 찾았어?”
“찾았겠어? 애들 굴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업무 강도가 너무 빡세서 막말로 정신도 온전치 않은 애들이 괜찮은 시나리오를 무슨 수로 찾겠냐고.”
열흘 전.
배인규 회장이 내린 지시는 밑도 끝도 없었다.
누구든 자신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와 감독을 데리고 오는 직원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따를 거라는 것.
그 직원의 범위는 팀, 직급 모두 상관없었다.
그저 YJ E&M의 정직원이면 됐다.
당연히 한바탕 난리가 났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부터, 보상은 무엇일까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각 팀의 팀장들은 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비상 회의에 돌입했다.
보상도 보상이지만, 선정된 직원은 무려 배인규 회장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고.
그 직원의 상사, 부하직원까지도 덕을 톡톡히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개인전처럼 보였으나 아니었다.
팀장들은 야근까지 종용하며 시나리오를 찾으라고 닦달했고.
그 때문에 최세준은 입사 이래로 가장 강도 높은 업무를 하고 있었다.
기획 1팀과 2팀의 과장도 서로의 팀장에게 염탐해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에이, 그래도 뭐 하나 있겠지! 소문 돌던데?”
“아, 무슨 소리야! 진짜 없다니까. 그러는 2팀도 허 대리가 뭐 하나 찾았다고 하더니만. 그거 뭐야?”
기획 2팀 과장이 대뜸 소리를 질렀다.
“아! 이 자식이! 내가 그걸 어떻게 알려주냐! 너야말로 그것만 딱 말해봐! 있어? 없어!”
“지도 까놓지를 않으면서, 뭘 나보고 말하래. 우리 사이가 진짜 이것밖에 안 되냐? 딱 장르만 알려주면 더는 안 물어볼게!”
“장르는 무슨! 이 스파이 놈아!”
그 뒤로는 몇 차례 욕이 오고 갔다.
이 얼마나 기구한 인생인가.
사회에선 모두가 적이라더니.
동기에게도 가면을 쓰고 의중을 떠봐야 하니 말이다.
“크흠.”
최세준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헛기침을 해댔다.
“어! 최 과장?! 너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아~까부터 있었지.”
“뭐?! 배급팀 것도 까고 가 그럼!”
최세준은 자신의 동기인 둘에게 검지를 쭉 내밀어 저어 보였다.
“아직 한참 멀었다. 멀었어. 휴게실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하냐. 혹시 신입들 노가리 까고 있을까 봐 누워있었더니. 과장이라는 놈들이.”
그는 쯧쯧거리며 휴게실을 그대로 나가버렸다.
뒤에선 그를 부르는 고성이 날아왔다.
“야! 그러는 너는 과장이란 놈이 신입 귀동냥을 자랑이랍시고 말하냐?!”
최세준은 고성을 신경도 쓰지 않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우리 팀은 뭘 올려야 하나.’
아직 괜찮은 시나리오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배급팀의 속사정을 말이다.
*
소피아의 메일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자신이 위에 보고했고,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지만 윗선에서 나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
정확히 ‘긍정적인(positively)’이라는 단어가 있었기에 흔쾌히 다시 방문하겠다고 답장했다.
계약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먼 타국에서 사람을 불러들이진 않을 것이다.
또 내 조건이 많은 혼란을 주었을 테니 나를 직접 보고 확신을 얻어야 할 테지.
하여튼 이번엔 작가이자 연출을 맡을 신서영과 함께 가겠다 전했다.
신서영도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져야 할 때가 왔다.
“대표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같이 짠하시죠.”
도건우를 만난 게 불과 며칠 전인 것 같은데 오늘 또 마주하게 되었다.
급하게 예약한 사무실 근처 횟집.
한쪽 벽에는 나경이 걸겠다고 요란을 떨던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망자와 함께> 500만 돌파! 이제 시작이다!]
요 며칠 사이 500만을 간당간당 넘을까 말까 하더니 오늘 딱 넘었다.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의 최종 스코어가 480만이었으니 아라비안필름에서 첫 500만을 돌파한 영화가 나온 것이다.
당연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고, 참석 가능한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모아 작은 파티를 열었다.
<망자와 함께>는 여러모로 많은 수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필름마켓 수익이 약 62억이었고.
500만을 넘긴 현재 국내 극장 수입만 해도 70억에 다다랐다.
영화관람료가 최근 8,000원에서 9,000원으로 올랐기에 수익이 더 늘기도 했다.
또 내년 이맘때쯤 미리 찍어둔 2도 개봉할 테니 들어올 수익을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물론 해외 추가 수익은 논외다.
모든 해외 판권 계약을 추가 수익 분배로 했기 때문에 이 또한 꽤 쏠쏠할 것이다.
회계팀이 각 나라에서 보내오는 리포트를 열심히 검토 중이었으니 이건 또 이대로 기다리면 됐다.
같은 테이블에서 소주를 홀짝이던 신서영에게 내일 인센티브 입금이 될 거라는 것과 미국 일정을 이야기하려다 그만뒀다.
‘내일 하지 뭐.’
절대 그녀가 또 이상 행동을 보일까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
어두컴컴한 방.
그 방은 언제 치웠는지 모를 쾌쾌한 냄새가 진동했고, 바닥엔 빈 병과 과자 부스러기들이 가득 굴러다녔다.
컴퓨터 책상에 앉아 등허리를 벅벅 긁어대던 남자는 푸른빛을 쏘아대는 모니터를 유심히 살폈다.
그의 이름은 이주호.
국내 굴지 대기업 YJ E&M 상무였던 이의 아들이자 운서대 영화과에서 촉망받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현실은 참혹하기만 하다.
아버지인 이학송은 뇌물을 받아먹다가 잘려서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그나마 모아둔 돈과 작은 집으로 옮겨 남는 차익으로 작은 치킨집을 차렸지만.
생활이 예전과 같을 순 없었다.
아버지는 거실에 앉아 혼자 소주를 기울이는 일이 잦아졌고.
어머니는 ‘돈’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갑작스럽게 달라진 집안 환경에 이주호는 매사 불만이 많아졌다.
결국 지금의 상황은 오직 자신이 천재 감독이 되어야만 타개할 수 있고.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데에는 자신보다 한참 뒤처진 실력의 허훈이라는 놈과 아버지를 내친 YJ E&M 때문이라는 이유 모를 망상에 빠진 상태였다.
급기야 이주호는 이 둘에게 복수하겠다는 다짐을 하고야 만다.
그러려면 우선 자신이 천재 감독이 되어야 하지만, 이주호는 졸업 후 시나리오를 완전히 놓았다.
망상에만 빠졌다 뿐이지 노력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는커녕 컴퓨터게임 속 자신의 캐릭터를 놓지 않았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았는지 그는 하루의 일과인 게임을 시작하기 전.
항상 작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트를 둘러보곤 했다.
요즘 어떤 장르, 분위기의 시나리오들이 잘 팔리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고.
영화계에 무슨 이슈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사실 쓸데없는 일이었다.
글을 쓰지 않는데 동향 파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쨌든 그러던 중 그는 뭔가를 발견하게 된다.
‘응? YJ E&M?’
그 게시물의 제목은 이랬다.
[ㅇㅈㅇㅇㅇ 연락받으신 분?]
아버지가 잘린 후 YJ E&M에 대한 소식은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보고 있었다.
그는 홀린 듯이 그 게시글을 클릭했다.
[최근 ㅇㅈㅇㅇㅇ에서 공격적으로 시나리오 산다는 소릴 들었는데, 어제 저한테도 연락이 왔거든요? 이 사람들 왜 이러는지 아시는 분?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여기 한 번도 영화 제작 직접 한 적 없잖아요?
대기업이라서 계약 사기당할 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히 계약했다가 제작은커녕 계약금만 받고, 시나리오 날리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ㅇㅈㅇㅇㅇ은 YJ E&M의 초성이 분명했다.
작성자의 말대로 YJ E&M은 아직 영화를 직접 제작한 적이 없고, 투자 배급 위주로 돈을 벌던 회사였다.
그런 회사에서 시나리오를 공격적으로 사들이고 있다니.
잠시 이유에 대해 생각하던 이주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여기서 입봉하면 대박인 건데.’
게임 외에는 어느 것도 관심 없던 이주호에게 오랜만에 생기가 도는 순간이었다.
허훈은 졸업 후 웬 작은 영화사에서 입봉한 걸로 알고 있다.
처음엔 자기 수준에 참 딱 맞는 영화사를 만났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영화제에서 상도 받으며 꽤 잘 나가기 시작했고.
졸업 후 영화에 대한 재미가 현저하게 떨어져 영화관을 찾지 않았으나 그의 영화는 직접 가서 보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 이주호는 영화에 대한 흥미를 더 잃어버리고 말았다.
허훈은 성장한 게 분명했다.
졸업 작품으로 대결하던 때에는 자신이 조금 더 월등했다면 지금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치로 올라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입봉은커녕 초라한 방구석 게임 폐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 상황을 한 번에 반전시킬 기회가 왔다.
YJ E&M에서 입봉해 흥행하면 아버지를 내친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또 단숨에 허훈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아니다.
대등한 위치가 뭐냐.
그를 뛰어넘을 수도 있었다.
‘시나리오 마켓에 올리면 연락이 온단 말이지.’
학교 다닐 적에도 교수님들의 총애와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자신이었다.
그때의 실력을 발휘해 올리기만 하면 자신에도 연락은 분명 올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써 놓은 시나리오가 없다는 것.
아마도 YJ E&M에서는 자신들 눈에 차는 시나리오가 나오면 지금의 공격적인 태도를 싹 바꿀 것이다.
선택된 시나리오를 영화로 제작하는 것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이겠지.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시나리오를 올려야 한다.
하는데······.
게임만 해대던 머릿속에 상상하던 소재나 이야기가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다 이주호는 문득 최근에 눈여겨봤던 글이 생각났다.
그것은 한 블로그에 매일 올라오던 글이었다.
블로거는 어떤 이야기를 담담하게 올렸는데 너무 재밌게 읽었던 기억에 매일 그 블로그를 찾는 것도 하루 중 일과였다.
‘그게 영화로 만들면 연출하기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잠시 후.
이주호는 소름 끼치게 미소 지었고.
그 머릿속엔 자신의 방처럼 어두운 존재들이 득실대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아라비안필름 사무실.
“응? 나경 씨 뭐 봐요?”
나는 그녀가 웬 블로그 글을 키득거리면서 읽고 있길래 물었다.
나경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아! 대표님! 놀았던 건 아니고요!”
“가끔 일하다 놀아도 돼요.”
“에? 아니에요! 업무 시간엔 일해야죠! 하여튼 여기 블로그 주인이 매일 글을 올리는데 너무 재밌어서요. 혹시나 이걸 시나리오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고민 중이었어요.”
나경은 신서영의 만화를 발견했을 정도로 이야기를 찾는 눈이 좋았다.
“그래요? 그렇게 재밌어요?”
근처에서 의자를 끌고 와 그녀 옆에 앉았다.
“네! 이게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의 심리를 담담하게 풀어낸 건데 저는 이걸 시나리오로 바꾸면서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신이 나서 이 블로그의 글이 재밌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나도 곧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지금까지 올라온 블로그 글을 모두 읽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