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정말로 할 수 있게 된다
“대표님! 메일 확인 부탁드립니다!”
출근하자마자 정 PD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우렁차게 답을 해주곤 대표실로 들어가 메일함을 확인했다.
“드디어 너도 시작이구나.”
정 PD가 보낸 것은 <처절한 인생>의 예산서.
액셀 표를 쭉쭉 내려보니 그 맨 밑에는 90억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흐음. 딱 적당하다.
100억이 넘어가면 이래저래 준비할 서류도 많아지고, 복잡해진다.
현재 회사에서 바로 운용할 수 있는 금액도 그 언저리였기에 딱 맞았다.
예산서를 훑어보고는 대표실 문을 열고 나가 허훈과 정 PD를 불렀다.
“두 분 잠깐만 보시죠.”
둘을 부른 이유는 <처절한 인생>의 진행 방향을 간략하게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정 PD에게 말했다.
“수중 액션 스케줄 나오면 예 이사님께 공유 부탁드릴게요. 세트장 일정 미리 비워둬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번 작품은 도로 촬영 분량 있으니까 관련 관공서 철저하게 준비해주시고. 나오는 총기 소품이 많아서 이 부분도 꼼꼼히 체크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정 PD는 내 말을 열심히 메모하다 답했다.
“예. 대표님.”
다음은 허훈.
“감독님. 우진(이안)은 요즘 액션 스쿨에서 산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너무 열심히 해서 성한 곳이 없다고 무술 감독님이 걱정하셨어요.”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조금 주의 줄 필요도 있겠다.
“그건 제가 말하겠습니다. 콘티 작가님은 어떠세요?”
<처절한 인생> 콘티 작업을 위해 외주 작가를 섭외했다.
“제가 전달한 대로 찰떡같이 그려주셔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번 영화는 어쨌든 무술이 관건이라 무술 감독님이 사무실에 많이 오가실 겁니다. 그때마다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세요.”
허훈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베테랑 감독님이라 척하면 척이시더라고요.”
특별히 우리나라 무술팀 중 탑으로 모셔왔다.
“자,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처절한 인생>의 프리가 시작되었다.
*
“저······. 양 대표님. 제가 벌써 이런 자리에 참석해도 되는 겁니까?”
옆자리에 있던 양상철이 웃었다.
“당연하지요! 허허!”
내가 있던 곳은 강남의 한우 집.
그곳에서도 가장 큰 룸 안이었다.
근처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참 많이도 보였다.
한보배, 한다훈, 도건우, 임윤서, 그린 애플, 최근에 계약한 이안까지.
그렇다.
오늘은 화분 엔터 소속 연예인끼리의 친목을 위한 회식 자리였다.
화분 엔터의 비상장주식을 넘겨받은 후라서 그런지 뭔가 마음가짐이 이상했다.
차라리 그 전이었다면 그냥 놀러 온 거라 생각하고 말 것인데, 지금은 왠지 이들 모두를 신경 써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있었다.
“대표님! 오늘 오실 줄 몰랐어요!”
네. 저도 몰랐습니다.
하마터면 한보배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뻔했다.
아직은 소속 연예인들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이들은 아직 내가 회사 지분을 받았다는 걸 모른다.
“그러게요. 제가 참석해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네요.”
뒷머리를 긁고 있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오셔도 되죠! 대표님은 화분 식구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리고 저희 2차는 꼭 노래방이거든요? 2차도 가셔야 해요? 오늘 재밌겠다! 그치? 다훈아!”
옆에서 고기를 먹고 있던 한다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청 재밌겠다! 그런데요. 대표님.”
“응?”
한다훈은 내게 조금 부끄럽다는 듯 물었다.
“진짜로 제 얼굴이 미국에도 나오고, 영국에도 나오고, 스위스에서도 나와요?”
<망자와 함께>의 세계적인 인기가 잘 실감 나지 않은가 보다.
“그럼. 나중에 다훈이 외국 나가면 사람들이 막 알아볼걸?”
“에? 정말요?!”
한다훈은 고기를 먹던 젓가락을 내려놓곤 근심 어린 얼굴로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 혼잣말은 ‘안 되는데, 영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나.’ 대충 이런 종류였다.
귀여운 자식.
“다훈아, 배우한테 영어 진짜 중요해. 저기 아람 누나 보이지? 저 누나도 영어 못했으면 히어로 못했다?”
내 말에 한다훈은 사색이 되었다가 느닷없이 의지에 불탔다.
“저 그 만화 진짜 좋아해요! 그럼 대표님 말은 저도 영어 잘하게 되면 할리우드도 갈 수 있다는 말이네요?!”
“당연하지!”
이제 막 배우 활동을 시작한 한다훈에게 허황된 꿈을 심어주려는 게 아니다.
이미 우리 쪽에선 그 꿈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 점점 생겨났고.
그가 못할 거라곤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되새기면 정말로 할 수 있게 된다.
“와! 그럼 저 내일부터 영어 공부 열심히 할게요!”
그리고 모든 생을 통틀어 느끼는 거지만.
영어 공부 열심히 해둔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다.
옆에 있던 한보배가 깜짝 놀랐다.
“영어는 그렇게도 공부하기 싫어하더니?”
한다훈이 다급하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에이, 누나. 내가 이과였잖아. 그리고 그건 좀 비밀로.”
한다훈은 어느새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고등학생 시절을 배우가 아닌 학생으로 보낸 뒤에 데뷔해서.
옆에 있던 도건우는 왠지 대화에 끼고 싶은데 못 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우 씨가 가장 잘 알겠네요.”
그는 내 말에 즉답했다.
“그럼요. 다훈아. 영어는 필수다. 필수. 아, 그리고 너 학교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 그거 다시는 못 만들 추억이니까. 고등학교 동창이랑도 연락 끊지 말고.”
도건우가 누군가에게 이렇듯 다정한 조언을 하다니.
정말 세상 두 번 살고 볼 일이다.
<망자와 함께>에서 같이 호흡을 맞춘 한다훈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한다훈은 그의 말을 듣고 생각이 많아지는 얼굴이었다.
“형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맞겠죠. 알겠어요!”
피식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도건우만 한다훈을 좋게 본 것이 아닌 것 같다.
“이야, 건우가 이런 이미지인 줄은 이제야 알았네.”
임윤서였다.
도건우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제가 왜요?”
“아니, 같이 작품 해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소문보다 굉장히 자상하다고.”
분명 임윤서의 말은 그를 칭찬하는 내용이었다.
전생에서 그녀를 겪은 나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피식 비웃는 느낌이 강했다.
임윤서는 오해를 많이 사는 에티튜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칭찬도 비난처럼 하는 사람.
그냥 그녀의 성격이 그랬다.
도건우를 보니 역시 오해를 단단히 한 얼굴이다.
그래도 보통 사람 같았으면 다툼을 피하려고 대충 넘어갔을 텐데, 상대는 도건우였다.
“누나야말로 소문이 장난 아니던데요?”
둘의 까칠함은 대중들만 모를 뿐.
연예계에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거 소문 아닌데? 나는 원래 그래.”
오십보백보라는 말.
사실 화분 엔터로 둘을 묶어둘 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둘 다 성격이 좀 그렇기도 했고, 전생에서 같이 출연한 토크쇼에선 서로를 웃으면서 돌려 깠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땐 왜 저러나 하고 말았는데.
지금 보니 그냥 성격 자체가 맞지 않았다.
왜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과 반대인 사람.
둘은 딱 그 격이었다.
“아, 그렇다면 인정.”
오가는 말은 많지 않았으나 기 싸움이 대단했다.
옆을 보니 양상철의 시선은 안절부절못하며 둘을 오가기만 했다.
주위 사람들의 시큰둥한 반응을 보니 이 둘이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음, 정리가 좀 필요하겠네.
“소문은 두 분 다 만만치 않으시던데요.”
둘은 내 말에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나를 쳐다봤다.
“대표님?”
“응? 대표님. 그건 말이 너무······.”
임윤서는 심하다고 하고 싶었던 걸까.
“윤서 씨는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 스태프들이 아직도 칭찬해요. 그렇게 군말 없이 스케줄 소화하는 여배우 처음 봤다고. 윤서 씨가 까칠하긴 하지만 그것도 다 이유가 있을 때만이잖아요?”
그녀는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수긍했다.
“그, 그럼요! 저는 절대 그냥 뭐라고 하는 성격이 아니에요! 프로는 프로다워야 하는 거잖아요?”
프로는 프로다워야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임윤서의 어깨는 금세 의기양양해졌다.
도건우를 향한 그녀의 표정은 마치 ‘그것 봐! 내가 이런 사람이야!’라는 것 같았다.
그 표정을 본 도건우의 입가가 씰룩거리길래 얼른 뒷말을 붙였다.
“그리고 건우 씨도요. <망자와 함께> 촬영하면서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어요. 쫄쫄이 입은 상대방 보면서 연기하기가 어디 쉽습니까? 스태프들이 하나같이 건우 씨 고생 많이 한 거 알고 있다더군요.”
“응? 정말요?”
“그럼요!”
내 말에 도건우의 표정도 금방 풀어졌다.
참 이쪽 사람들 단순해서 다행이다.
그렇게 둘의 분위기를 풀어놓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양상철이 나를 무슨 외계인 보듯 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그러자 그가 멍하니 물었다.
“신 대표. 도대체 못 하는 게 뭡니까?”
*
다음 날 아침.
나는 숙취에 시달리며 일어났다.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다들 어찌나 술을 잘 먹던지.
양상철부터 시작해서 그린 애플 멤버들까지.
주량으로 연예인 뽑나 생각할 정도였다.
끙끙거리며 주방으로 나가 물부터 벌컥벌컥 마시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보자기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저, 대표님. 이거 제가 준비한 선물인데요.
아람은 어쩌다 회식 자리에 내가 온다는 걸 알게 됐고.
꿀을 준비했다고 한다.
-저희 아버지가 목청 꿀 채취를 하시거든요. 감사한 분 드리라고 주셨어요. 이거 야생 꿀이라 몸에 진짜 진짜 좋아요. 매일 1~2수저씩 물에 타서 드세요. 아셨죠?
얼떨결에 받아오긴 했는데.
보자기 채 그대로 올려놓고 잠이 들었다.
보자기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니 안에는 진한 남색의 매끈한 항아리가 하나 나왔다.
‘꽤 비싸겠는데?’
야생 꿀이라고 하면 직접 벌집이 있는 나무를 찾아다닌다고 들었다.
보통 고생스러운 일이 아닐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조금 부담스럽다.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바뀌었다.
그래. 이 정도는 받아도 되겠지.
항아리를 열어 물기 없는 수저로 꿀을 한 숟가락 떴다.
불투명한 꾸덕함은 꿀벌들이 얼마나 벌집을 오갔을지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항아리는 다시 닫아두고, 꿀물을 타서는 거실 소파로 가서 호로록호로록 음미했다.
“으아, 살 것 같다.”
그제야 숙취가 내려가는 느낌이다.
어젯밤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 임윤서를 붙잡고 이야기를 좀 했던 것 같다.
-윤서 씨. 액션 스쿨 다녀본 적 있습니까?
난데없는 내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몸 쓰는 거 진짜 싫어해요.
맞다. 그녀는 전생에도 이랬다.
그런 그녀가 액션을 소화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열의와 열정이 전부였다.
해내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다.
그러고 또 뭐라고 했더라.
-곧 다니게 될 테니까 대근육 운동이라도 해두시죠. 나중에 갑자기 하려고 하면 체력적으로 힘들 겁니다. 아, 그리고 다훈이만 영어 공부할 게 아니에요. 윤서 씨도 당장 원어민 강사 붙여서 공부하세요.
고개가 절로 숙어졌다.
별말을 다 했네.
진심 어린 걱정이었으나 그녀에겐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호호. 대표님. 농담하신 거죠?
그래도 도건우에게 한 것처럼 쏴붙이진 않아 다행이다.
그녀와의 신뢰를 미리 쌓아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했다.
뭐, 여하튼 나는 미리 말했다.
얼마나 힘든 영화를 준비 중인지.
주말이었으나 집에서도 업무는 계속됐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 앞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펼쳤다.
우선은 메일함부터.
어제 퇴근하면서 확인을 했는데도 13개의 메일이 와있었다.
혹시 급하게 답장해야 할 것이 있나 찾으려는데 맨 마지막에 도착한 메일의 발신자가 눈에 띄었다.
[Sophia]
왔다. 컴플릭스의 답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