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81화 (81/140)

#81화. 쐐기를 박을 손 하나

“소피아. 정말로 이런 요구를 한 제작사가 있단 말이야?”

소피아는 자신의 보스가 의구심을 품어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네. 보스.”

보스는 그런 그녀를 보기보단 보고서와 시나리오를 다시 한번 살폈다.

그녀는 평소 자신의 전화에 통화음을 세 번 이상 넘긴 적이 없었으며 이메일에 대한 답은 항상 10분 내였다.

그만큼 매사에 철두철미한 부하직원이었다.

또 자신이 시킨 일은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해석해 군말 없이 최대한 빨리 처리했고.

그뿐 아니라 사교성이 좋아서 주변 동료들과의 불화 따윈 들려오지도 않았다.

자기 생각은 얼마나 논리정연하게 발언하는지, 그녀가 회의에 참석하거나 보고하러 올 때면 자신도 긴장하기 일쑤였다.

그런 그녀가 가지고 온 보고서는 당연히 완벽했다.

시나리오 또한 보고서를 왜 이리도 공들여 만들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흥미로웠다.

“이런 허무맹랑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주간 회의까지 올린 거네?”

보고서에 덩그러니 적힌 조건은 어이가 없었다.

제작비 30%의 추가 금액 지급과 2차 저작권을 포기할 수 없다.

소피아는 멍청하지 않다.

이 조건은 분명 회사에서 들어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가정할 수 있는 건.

이 조건을 들고 올 만큼 다른 무언가에서 확신을 얻었다는 것.

“왜 그런 건지 알려줄래. 소피아?”

소피아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으나 면접을 볼 때보다 더 떨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이 브리핑으로 작품의 운명이 갈릴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네. 보스. 최근 북미를 강타한 <망자와 함께>라는 영화를 아십니까?”

“응. 알고 있어.”

“우선 여기 계신 모든 분께 오늘 퇴근 후 당장 그 영화를 관람하길 추천합니다. <왕국 : 역병의 시작>의 제작사가 제작한 영화거든요.”

보스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그 영화를 제작한 제작사라고?”

“네. 아라비안필름 작품 중 가장 성공할 영화가 될 거라 생각됩니다. 총 87개국에 판매되었으며 개봉한 나라에서의 초반 스코어가 좋아요. 어제 직접 관람한 바에 의하면 그 속도를 유지할 것 같습니다. 전 세계에서 먹힌다는 거죠.”

“흐음.”

소피아는 쉬지 않았다.

“<망자와 함께>를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한국의 토속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후세계가 배경입니다. 아시겠지만, 세계적인 흥행으로 가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소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건 그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하고, 고민했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물입니다.”

“그럼 그들이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모든 사안을 철저히 계산한 뒤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거야?”

사업이 생각하는 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느 분야든 기획 단계부터 해외를 겨냥하자고 해서 그 뜻대로 되기는 모래사장에서 다이아몬드를 발견하는 것만큼 힘들다.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나라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도 하고.

몇백억을 투자하고도 자국에서조차 외면받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 소피아의 말엔 어폐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조금의 물러섬이 없었다.

“네. 제가 접촉한 아라비안필름 직원들의 열정은 남달랐습니다. 세계 어느 제작사에서도 본 적 없는 열정이었어요.”

“소피아. 열정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어.”

“당연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의 상황은 철저한 계산 하에 이루어진 거예요.”

“그럼 그 계산을 도대체 누가 했다는 거야.”

소피아가 살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그 중심에 아라비안필름 대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

보스는 궁금증에 미간을 찌푸렸는데 소피아는 오히려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보스는 영화를 만들면서 누구도 확실할 수 없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불확실한 것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그는 확답했다.

“당연히 그 작품의 흥망 유무지. 이거야말로 극장에 걸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으니까.”

“맞습니다. 그 자체가 마치 도박과 같죠. 그래서 저희가 매번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돈을 걸고, 내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회의실 내부에 잠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도박을 즐겼던 수학자들이 확률 공식을 찾기 시작했다는 거?”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모든 도박에는 승리 확률이 있습니다. 도박사는 이를 근거로 베팅하죠. 아! 제가 말씀드리는 모든 도박은 합법적인 거라는 걸 알려드립니다.”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제작사 대표는 첫 미팅 당시 제게 확신하며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마치 자신은 모든 수를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말이죠.”

그녀는 잠시 앞에 앉은 보스를 포함한 좌중을 둘러봤다.

“저는 이 확신이 모든 확률을 철저하게 계산하고, 고민하고, 치열하게 비교해가며 한 선택에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희에게 이런 조건을 베팅 한 거죠.”

소피아의 단단한 목소리는 묘한 신뢰감이 되어 회의실 사람들을 서서히 감화시켰다.

그렇게 모두의 고개가 점차 끄덕거리기 시작한 그때.

쐐기를 박을 손 하나가 쑥 올라왔다.

“저기······. 제가 엊그제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그는 입사한 지 이제 막 3개월 차이던 덴버였다.

보스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소피아 말을 듣다 보니 확실히 생각났어요. 저 아라비안필름 제작사 대표. 최근 블랙 스튜디오에 방문했어요.”

회의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블랙 스튜디오에 한국 제작사 대표가 왜?”

그 물음에 덴버는 양쪽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확한 이유는 저도 모르는데, 중요한 건 두바이 왕세자 함자와 동행했다고 합니다.”

“뭐?!”

갑자기 등장한 두 글자의 이름에 회의실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

같은 시각 한국.

배인규 회장은 자신의 집 서재에 앉아 있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보름 전 맞닥뜨린 신선한 충격.

<망자와 함께>였다.

영화를 본 감상평은 이랬다.

오랜만에 본 영화다운 영화였다.

자신도 한때는 영화를 돈이 아닌 작품으로 대할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처음 영화관이라는 곳을 갔을 때만 해도 배인규는 아주 어렸다.

그 시절 영화관의 기억은 별로 좋지 않았다.

자욱한 담배 연기와 사방에서 풍기던 지린내, 가끔 출몰하는 쥐새끼까지.

화면은 또 얼마나 지지직거리던지 필름까지 툭하면 끊어져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던 풍경이었다.

그러나 어린 배인규는 그저 영화가 너무 좋았다.

늘 스크린 너머를 동경해왔다.

그렇게 조금 넉넉했던 형편으로 영화과를 입학할 수 있었고.

그나마 대학교 재학 중까지는 영화를 작품으로 대했던 것 같다.

그 마음가짐은 졸업 이후부터 달라졌고.

영화를 볼 때 더는 어린 시절 두근거림을 느낄 새가 없었다.

아니, 느낄 수 없었던 것이 맞다.

그가 영화를 돈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배인규가 정말로 오랜만에 그 사근한 심장 박동을 느꼈으니 이 얼마나 충격이었겠나.

신바드라는 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대로였으나 <망자와 함께>에 대한 평가는 가히 높이 살만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자신은 해외 판권을 도대체 왜 넘겨준 걸까.

김 비서의 보고에 따르면 <망자와 함께>가 팔린 국가에서의 흥행은 확실시된 사실이었다.

그 판단이 못내 아쉬웠다.

자신은 사업을 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수익적인 면을 볼 수밖에 없지만, 그것보단 자존심이 상했다.

또 들어보니 <망자와 함께>는 예산도 3억이나 세이브했다고 한다.

무슨 이런 괴물 같은 놈이 있나 싶었다.

어쨌든 이번 판은 자신이 확실하게 패배한 것이다.

배인규는 절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잠 못 이루고, 서재에서 이런 궁상을 떨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생각을 정리한 그는 당장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벽 1시였으나 그에게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네. 회장님.

김 비서가 자다 일어나 목소리를 가다듬었는지 아니면 지금까지 깨어있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김 비서. 지금까지 우리가 직접 제작한 영화가 있던가?”

-아직 없습니다. 회장님.

김 비서의 즉각적인 대답에 그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이참에 영화 하나 만들어보자고. 그것도 돈 빵빵하게 투자한 블록버스터로.”

그 말이 김 비서에게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와 같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 알겠습니다. 각 부서에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제야 배인규는 흡족하게 전화를 끊었다.

‘신바드라고?’

영화를 직접 제작하는 건 소모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YJ E&M에서는 일 잘하는 제작사를 고르면 되었다.

이런 끔찍한 패배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들이 직접 영화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임이 분명하리라.

<망자와 함께> 같은 영화 정도는 자신들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

두고 봐라.

다음번엔 보란 듯이 놈의 빳빳한 고개를 진심으로 숙이게 만들어 놓고 말겠다.

배인규는 혼자서 잔뜩 열을 올렸다.

*

-상장 전에 상민이가 가지고 있던 지분을 신 대표에게 넘기고 싶어요. 이건 선물이 아닌 부탁입니다.

이틀 전 나는 양상철에게서 파격적인 제안을 들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대표님. 이건 제가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했으나 그는 확고했다.

-부탁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신 대표 얼굴을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화분 엔터의 미래는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전생과 달라진 그린 애플의 성공으로 그녀들은 이제 세계인의 귀를 즐겁게 해줄 일만 남았다.

가까운 미래에 화분 엔터로 드리우는 어둠이 있기도 했지만, 그건 내가 알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그러니 이 지분은 상장 후 나에게 굉장한 수익으로 돌아올 것이다.

또 그가 덧붙인 말이 있었다.

-대주주가 되면 경영에도 참여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신 대표가 아라비안필름 업무로 바쁠 테니 중요한 안건에만 의사를 표현해도 무방해요.

경영에도 참여하라니.

-지금까지 내가 신 대표에게 조언을 구하고, 신 대표가 해준 정도라도 충분하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한 말이었을 테지만, 무지 부담됐다.

이거 참.

지금까지 사례를 바라고 그를 도왔던 건 아니다.

단지, 그린 애플의 성공으로 낙수효과를 좀 보려던 것뿐이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뭔가를 받으니 입가에 미소가 자연스레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사업을 좀 더 손쉽게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들어와요.”

내 대답에 들어온 이는 나경.

“대표님. 좀 이상한 일이 있는데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이상한 일?

“예. 무슨 일인데요?”

나경은 내 책상 앞으로 와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 시나리오 마켓에 괜찮은 시나리오를 발견해서 연락하면 죄다 접촉 중인 곳이 있다더라고요.”

“그래요?”

나경과 이 과장은 현재 아라비안필름에서 제작할 시나리오를 찾고 있었다.

“네. 그런데 그게 한두 건이 아니라 뭔가 이상해서 주변에 아는 지인의 지인들한테까지 영화 관련된 사람들한테는 다 묻고 다녔거든요?”

음, 누가 시나리오 사재기라도 하는 건가?

“그런데요?”

“알아냈어요!”

“응? 뭘 말입니까?”

나경은 마치 범인을 발견한 탐정 만화의 주인공 같았다.

“YJ E&M에서 지금 영화 제작을 추진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예?”

처음 나경의 말을 들을 때만 해도.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라고 생각했으나 YJ E&M이 나오는 순간 수상한 기운이 훅 밀려왔다.

그것도 엄청나게 수상하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 YJ E&M이 직접 영화를 제작하는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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