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80화 (80/140)

#80화. 행복하면 된 거다

<망자와 함께>가 개봉했다.

『저승사자 도건우. 올여름 휩쓸겠다. 팬들 기대 최고조』

『영화 ‘망자와 함께’ 87개국 판매. 국내 관객 관심 폭발』

『베일에 싸였던 ‘망자와 함께’ CG. 사후세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 냈을까』

이미 감독 노흥기, 주연 도건우로 제작될 시점부터 화제 몰이를 톡톡히 했으니 개봉 후 기사가 쏟아지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망자와 함께>는 쾌조의 스타트를 보였다.

그리고 그 주에 끝에는 <어울림>이 마지막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표님. 오셨어요!”

현장을 찾은 나를 차 PD가 반갑게 맞았다.

스태프들은 드디어 크랭크업이란 사실에 한껏 고조된 기분으로 촬영을 준비 중이었다.

내가 보이면 그 분위기가 깨질 걸 알기에 한 발치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다.

“예. PD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크랭크업하면 일주일 정도 쉬고 오라고 하려다가 그만뒀다.

차 PD가 거절할 걸 뻔히 알았기 때문이다.

쉬어야 하면 어련히 알아서 보고할 것이다.

“아닙니다.”

그러더니 그는 내게 일일 촬영 계획표를 건넸다.

“음, 오늘 촬영 일찍 끝나겠네요?”

막촬이라 그런지 센스 있는 조감독이 분량을 많이 빼놓지 않았다.

“예. 에필로그라서 금방 끝날 겁니다.”

에필로그는 성인이 된 ‘현서’가 다시 동물원을 찾는 장면이었다.

성인 역할에는 특별한 사람이 캐스팅되었다.

바로 그린 애플의 비주얼을 맡고 있던 가빈이었는데.

현장의 들뜸은 현직 걸그룹이 출연한다는 사실의 비중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어울림>은 마지막 날까지 멀리서 봐도 희극이 아니었다.

가빈은 노흥기의 디렉팅을 유심히 들으면서도 안고 있던 라운이의 털을 의식의 흐름대로 쓰다듬고 있었으며.

노흥기도 가빈에게 하는 디렉팅 시간보다 자신의 반려묘 라운이에게 하는 디렉팅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집에서도 볼 텐데.

뭐가 저리도 할 말이 많을까.

하여튼 마지막 날인 데다 촬영 분량도 많이 없어서였는지.

노흥기의 아내와 아들 내외, 손자인 노승우까지 총출동해 현장은 더 복잡한 상황이었다.

“서아 누나!”

“응! 승우야!”

“누나! 소방차 보여줄까?! 소방차! 부웅-!”

노승우는 외동이라 들었는데, 이서아를 참 잘 따랐다.

“아니! 소방차는 별로! 할머니랑 놀래!”

그렇다고 이서아가 노승우를 잘 챙겨준다는 건 아니었다.

그냥 노승우가 일방적으로 졸졸 따라다녔다.

“아이구, 우리 서아! 할머니 기억해요?”

노흥기 아내도 오랜만에 이서아의 애교를 만끽했다.

그래, 희극이고, 비극인 게 뭐가 중요한가.

행복하면 됐지.

그렇게 이 비극을 합리화할 무렵.

“대표님.”

옆을 돌아보니 이서아의 엄마 강주리가 날 보고 있었다.

“아, 어머님. 오랜만에 뵙네요. 촬영 내내 서아 케어 잘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해야죠. 서아가 이 작품 촬영하는 동안 너무 행복해했어요.”

“서아는 연기를 좋아하니까 당연한 일인 거죠.”

강주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모든 작품에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사실 아역이라는 게 그 나이대 아이에겐 버거울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때마다 그만둬도 된다고 하긴 했는데 서아가 그만두는 건 절대 싫다고 욕심을 부리더라고요.”

하긴 한국에서 아역은 그저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아이일 뿐이었다.

회귀하기 전에야 그 처우 개선이 이뤄지기 시작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역 때문에 조금이라도 촬영 시간이 딜레이 되면 바로 투입할 수 있는 후보군까지 캐스팅하곤 했으니까.

그만큼 아이들에게도 자비란 없는 혹독한 세계였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어울림>을 찍게 된 거구나.

“이 작품은 뭔가 서아에게 힐링이 됐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정말 감사해요. 호호.”

전생에서 <어울림> 아역의 끝이 좋지 않았던 것과 굳이 비교하자면 이번 생은 좋게 마무리된 것 같다.

“다행입니다. 이제 이 영화로 전 세계 아이들이 힐링하게 될 거예요.”

우리는 저 멀리서 스태프들과 장난치며 뛰어다니는 이서아를 바라봤다.

아이는 아주 해맑게 웃고 있었다.

“아! 카메라 삼초오오온! 서아가 잡으러 간다앗!”

그래. 행복하면 된 거다.

*

쨍한 햇빛이 작열하는 8월.

본격적인 더위가 찾아오며 휴가철이 되었다.

<어울림>의 촬영은 행복하게 끝났고.

후반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망자와 함께> 첫 주 스코어가 나왔다.

“자! 다들 너무 놀라지는 말아요!”

YJ E&M에서의 연락을 받은 나경이 스코어 발표를 위해 우리를 사무실 한곳에 모았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우리는 그녀에게 원성 섞인 말을 한마디씩 했다.

“아! 대리님! 빨리! 빨리 좀요!”

“궁금해 죽겠어! 나 대리!”

“이런 걸로 권력 가지기. 있어요?!”

나경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최종 우승자 발표를 앞둔 사람처럼 직원들을 농락했다.

“특히 재민 씨! 심장 부여잡으시고! 자 그럼 발표 갑니다!”

그녀는 근처에 준비해 둔 화이트보드를 돌돌 소리 내며 끌고 왔다.

화이트보드에는 큰 종이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뒤에 첫 주 스코어를 써놓은 모양이다.

나경은 붙여놓은 종이를 몇 번 들썩이며 한 번 더 좌중의 몰입을 최고조로 올려놓은 뒤.

펄럭-.

“짜란! 100만이 넘었습니다!”

스코어를 발표했다.

종이 뒤에는 큰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102만]

“히익! 정말요? 102만?!”

“진짜?! 100만 넘었다고?!”

모두가 얼싸안고 기뻐했다.

나도 옆에서 팔짝팔짝 뛰는 사람들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아라비안필름에서 처음으로 첫 주 스코어 100만을 넘긴 영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자 흥행 돌풍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이었다.

며칠 뒤 해외 곳곳에서의 개봉이 시작되며 흥행 돌풍은 전 세계적으로 번졌다.

[오, 한국인들의 긍지는 다 저 사후세계에서 나오는 건가?]

[저승사자가 저렇게 잘생기면 어떡하죠. 따라갈 수도 없었잖아요. ㅜㅜ]

[여러분. 그거 아세요? 이거 1, 2편 동시 제작이라 내년에는 2편이 개봉합니다!]

[카메오들 찾는 재미가 쏠쏠하던뎈ㅋㅋㅋ]

[역시 이래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인들은 죽어서도 쉬지 못한다!]

[신입 저승사자! 한다훈은 잘생겨서 유죄!]

[움직이는 숲 세트를 직접 흙 퍼 나르고, 제작했다는 기사 보고 진짜 놀랐다. 우리나라 영화계가 밝구나. 밝아.]

반응도 당연히 전 세계적으로 터졌다.

*

소피아는 손에 들린 팸플릿을 유심히 봤다.

그 안에는 요상한 배경 앞으로 세 명의 동양인 남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서선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With the soul]

<망자와 함께>의 외국어 제목이었다.

그녀는 어젯밤 <망자와 함께>가 개봉하자마자 극장을 찾았다.

평이 좋았기에 한껏 기대를 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영화를 끝까지 감상했다.

다 보고 난 뒤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이게 뭐야?!’

어느 나라도 사후세계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곳은 없었다.

죽어서도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변호해야 한다니.

아라비안필름 덕분에 한국에 대한 호기심은 점점 커져만 갔고.

급기야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한국을 서치하는 일이 취미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한국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언제나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간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고.

이 영화는 그 말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왜 그들은 이렇게도 열심히 살아가는 걸까.’

한국인의 사상과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었으나 영화가 주는 감동은 그대로 자신에게 전해졌다.

이건 분명 자신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리라.

그러다 문득 핸섬하고, 매너 있던 그 대표가 떠올랐다.

‘역시 그의 확신은 진짜였어.’

이미 그의 말은 전 세계적으로 오르고 있는 관객 수치로 증명되고 있었다.

아직 초반이라 조심스럽긴 했으나 어쨌든 기대작은 확실했다.

막말로 이 영화가 어디까지 올라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소피아의 진짜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걸 위에 보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신들이 그토록 황당한 조건까지 들어줘야 할 이유가 있나.

대표의 성품이 좋았던 건 좋았던 것이고, 업무는 또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공과 사를 정확히 구분해 이것저것 이익을 따져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하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야.’

소피아의 결론은.

보고해야 한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달력을 들었다.

‘하필이면 또 오늘이 수요일이네.’

저번에도 그랬다.

어쩜 이렇게도 타이밍이 딱딱 맞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래. 보고도 안 해보고 포기하는 건 내가 아니지.’

만약 그녀가 한국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았다면 지금 외칠 말은 이것이었을 거다.

못 먹어도 고다!

그렇게 그녀는 이날을 위해 준비해 둔 보고서와 서랍 안에 고이 모셔둔 시나리오를 밖으로 꺼냈다.

*

“신 대표! 여깁니다. 여기!”

그곳은 홍대 근처 대폿집이었다.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던 양상철은 언제나처럼 반갑게 나를 맞았다.

그런 그 앞에 앉아 나도 반가움을 표현했다.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그러게요. 미국에서 보고 처음이죠?”

요란했던 미국 출장이 벌써 3달 전이다.

“예. 시간이 정말 잘 가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자자 안주랑 술은 미리 주문했습니다.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요. 허허.”

테이블엔 문어숙회와 모둠전이 올려져 있었다.

빈 잔을 채우던 양상철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아 참! 내가 아람이 촬영 무사히 끝났다고 말했습니까?”

내가 고개를 젓자 그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이고! 그랬습니까?! 내가 이렇게도 정신이 없습니다! 아주 순탄하게 잘 끝났고, 곧 귀국합니다. 허허.”

혹시나 눈엣가시처럼 현장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그거 정말 다행입니다. 한고비 넘겼네요.”

“다 신 대표 덕분이죠!”

“그럼 이제 그린 애플 녹음 들어가는 겁니까?”

그는 문어숙회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사랑 안무도 완료했고, 본격적으로 연습하면서 녹음도 같이 진행할 겁니다. 준비되면 앨범은 전 세계 동시 발매할 거고요.”

그의 말에 흐뭇하게 웃었다.

“이번에 빌보드 상위권 가면 정말 한국 최초 아닙니까?”

“그렇게 되겠죠. 생각해보니 이것도 다 신 대표 덕분이네요. 허허.”

우리는 잔을 털어 비웠고, 그는 내게 다시 술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사실 다별이가 작사의 소질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신 대표가 보내준 음악을 듣는데 냅다 자신이 가사를 써보겠다면서 나서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랬습니까?”

“그럼요! 영감이란 게 정말 있나 봐요. 문득 떠오르는?”

영감이라는 단어에 신서영이 떠올랐다.

“예. 저는 있다고 봅니다.”

내가 갑자기 심각하게 이야기하자 그가 털털하게 웃었다.

“허허! 신 대표 주변에도 많이 있죠?! 왠지 아라비안필름 직원들은 다 하나같이 좋은 쪽으로 괴짜인 것 같던데?”

음, 이런 소문까지 퍼지는 건 조금 곤란한데······.

아니다. 괴짜 집단이라.

나쁘지 않으려나.

“다들 열심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하.”

“어쨌든 이게 전부 다 신 대표 덕분이에요.”

도대체 오늘 덕분이라는 말을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다.

나야 하려고 했던 부탁을 쉽게 할 수 있어 좋긴 하다만.

“그럼 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죠.”

“부탁이요? 당연합니다! 내가 신 대표 부탁은 백 개라도 들어줄 수 있지요. 허허.”

“경기도에 10만 평 정도의 땅이 필요합니다. 모두 저희 회사 명의로 돌릴 수 있는 부지가 있으면 좀 소개해주세요.”

“10만 평이요? 그거야 당장 내일이라도 찾아볼 수 있지요. 그런데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미안하지만 아직은 그에게도 밝힐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내 반응에 양상철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휴. 아닙니다! 신 대표가 다 생각이 있겠지요! 땅은 걱정하지 말아요! 찾아봐 줄 수 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그 때문에 안심이 되었다.

“아! 그리고 저희 이번에 허훈 감독 차기작에 신인 배우 캐스팅했는데 아직 소속사가 없더라고요. 한번 만나보시죠? 꽤 괜찮은 배우입니다.”

나는 그가 내 말에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양상철은······.

“신 대표가 추천하는 배우는 훌륭하겠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제가 이제는 너무 미안해서 안 되겠습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도움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아까부터 양상철은 어딘가 이상했다.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질 않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가만히 있자 그는 괜찮다는 눈짓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이제는 그 빚을 점점 갚으려고요.”

“예?”

무슨 빚은 갚는다는 걸까.

“내년 상반기에 그린 애플 새 앨범 발매하고 하반기쯤 화분 엔터 상장 준비하고 있습니다.”

상장이라니?

전생에서 화분 엔터의 상장 시기는 아직 멀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기업 가치에 비해 늦은 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 생에는 그 시기가 앞당겨진 걸까?

그런데 그가 내게 화분 엔터 상장 이야기를 왜 하는 거지.

여러모로 고개는 갸웃거려졌다.

“이 대폿집은 상민이와 참 자주 왔던 곳입니다.”

이번엔 산에 들어갔다던 양상민의 이야기까지 나오기 시작한다.

“저, 대표님.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 하는 이야기의 의중을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가 가득 찬 잔을 내게 들며 활짝 웃었다.

그 얼굴에 접힌 세월의 흔적이 딱 알맞아 보였다.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

생각이 들 정도로.

“상장 전에 상민이가 가지고 있던 지분을 신 대표에게 넘기고 싶어요. 이건 선물이 아닌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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