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절절한 편지
약 2시간의 기술 시사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스태프들은 영화가 끝났으나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는 동안 아무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고생한 동료들과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눈에 담기 위해서였다.
앉아서는 저마다의 감상을 내놓았는데.
아무래도 현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 편집과 음악이 가미된 영화를 보는 것은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CG 대박이다. 필름코팅 전작이 뭐였지?”
“기술도 기술인데 CG는 돈이잖아. 이 정도면 제작비 오버 됐을 수도 있겠는데?”
그들의 걱정은 고마웠으나 제작비는 예상과 알맞게 맞아떨어졌다.
오히려 3억 정도가 남았으니 선방한 축에 속했다.
신서영에 대한 칭찬도 있었다.
“CG도 좋지만, 편집이 잘 된 것 같은데?”
“그러게. 촬영할 때 조금 루즈할 것 같던 부분 다 쳐냈네. 신 감독님 감각이 장난 아니다.”
<망자와 함께>는 특히나 편집이 어려운 영화였다.
CG 작업과 병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반응처럼 영화가 중간중간 쳐지는 부분 없이 아주 깔끔하게 되어 만족스러웠다.
이런 반응도 있었다.
“나는 진짜 아라비안필름이 우리나라 향후 영화계를 끌고 갈 거라고 본다.”
“에이. 그건 좀 너무 간 듯.”
“너야말로 그 도태된 생각 좀 버려라.”
앞에 앉은 촬영팀과 조명팀은 시답잖은 이유로 서로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촬영팀이 요목조목 따져 물었고.
“표준 근로 도입한 순간부터 끝난 거야. 막말로 점심시간 한 시간 꼬박 쉬는 영화 현장이 도대체 지금 어디에 또 있냐고.”
조명팀은 금세 수긍했다.
“그건 그래.”
“우리는 예술 한답시고, 고여 있으면 안 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니까.”
그 말을 한 건 촬영팀 퍼스트였는데, 왜 고덕현이 그를 줄곧 데리고 다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드디어 스크린에 올라오는 것 없이 완전한 암흑이 되자 모두 극장을 빠져나갔고.
일정이 없는 스태프들은 준비해 둔 뒤풀이 장소로 향했다.
나는 미리 밖에 나가 있던 정 PD와 차 PD의 보고를 받았는데.
배인규 회장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다급하게 그곳을 벗어났다는 이야기였다.
“몸이 좀 안 좋아 보이시던데요?”
“그래요?”
극장이 춥기라도 했는지 둘의 목격담에 의하면 배인규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고 한다.
뭐, 나를 썩 좋아하는 눈치도 아니었고.
알아서 잘 갔겠지.
우리는 뒤풀이 장소로 가서 아직 진하게 남은 촬영의 여운을 풀어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사무실에 앉아 어젯밤 뒤풀이에서의 일을 곱씹었다.
술이 들어간 예정우는 줄곧 참았는지 하고 싶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대표님. 땅 찾는 거 너무 힘들어요.
예상은 했다만.
10만 평의 땅을 갑자기 찾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나 보다.
지금 시대엔 경기도라고 해도 그 정도 규모의 땅을 개인 한 명이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
몇 명이 공동소유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는데 그럼 여러 명을 설득해 합의해야 했으니 쉽지 않은 일이 맞다.
기업이 가지고 있는 땅이라면 더욱 우리에게 쉽게 팔 리가 없었다.
수익을 위해 움직이는 집단인데 땅을 마냥 놀리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 말이다.
팔아도 거액의 웃돈을 줘야 살 수 있을까 말까, 인 것이다.
-꼭 한두 명이 걸려요. 우선 찾아보고는 있는데 힘이 드네.
예정우의 고충이 이해가 갔다.
-우선 잠깐 중단하죠. 저도 주변에 발품 좀 팔아보겠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도움을 받는 것이 좋겠다.
상념에서 빠져나와 노트북을 열었다.
당분간 바쁘게 움직이려면 밀려있던 사무실 업무부터 처리해야 하니까.
제일 먼저 연 메일함엔 차 PD의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왕국 : 역병의 시작> 예산서 1차 가안.]
예산서가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어울림> 촬영과 어제는 <망자와 함께> 뒤풀이로 술도 그렇게 먹어놓고.
보낸 시간을 확인해보니 새벽 2시다.
집에 들어가서 한번 검토한 뒤 바로 보낸 모양이다.
차 PD는 보면 볼수록 독종이었다.
기지개를 한 번 쭈욱 폈다.
그렇다면 나도 대표로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또 이런 건 전생부터 하도 봐와서 금방 하지.”
나는 예산서를 꼼꼼하고 세심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응? 언제······?”
잠깐 핸드폰을 확인한다는 게 깜짝 놀랐다.
시간이 벌써 5시간이나 지나있었기 때문이다.
한여름이라 해가 길어서 그런지 어두워지질 않아 시간의 흐름을 더 체감하기 힘들었다.
읏차! 일어나서 허리도 한번 돌려 보고, 팔을 쭉 뻗는데.
띠링-.
노트북에서 알림이 떠올랐다.
확인해보니 메일 한 통이 막 도착했다.
메일의 제목은 이랬다.
[영원한 친구 신바드에게.]
응?
요즘은 개인적으로 메일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어서 업무용 메일 주소와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메일을 보낼 사람 중 자신을 이렇게 부를 사람은 없다.
스팸 메일인가 싶어서 삭제를 누르려다가 보낸 이의 이름이 ‘HAMZ’ 인 것이 어딘가 걸려 클릭했다.
[안녕. 나의 친구.
가끔 안부를 묻고자 하는데 문자로 내 마음을 다 알리기에는 너무 할 말이 많았어. 그래서 고민하다가 아흐마드가 받았던 명함에 있는 메일 주소로 편지를 보내. (중략) 다른 게 아니고, 글쎄 말이야! 아람이 드디어 내 메일에 답을 해줬지 뭐야?! 정말 너무너무 기쁜데 이곳엔 내 기쁨을 이해해 줄 진정한 친구가 없어. 무척이나 슬픈 일이겠지······.]
함자의 절절한 편지였다.
대략 6,000자에 다다르는 장문이었는데, 그 주제는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아람에게서 답장을 받았어! 자랑할래!]
또 자주 하는 표현이 있었는데 그건 주변에 자랑할 친구가 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문득 왕세자의 삶도 외롭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
단 몇 줄이라도 답장을 써주면 이 또한 기뻐하겠지.
나는 편지의 답을 노트북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생 글이라곤 시나리오밖에 써본 적 없던 나에게 편지는(-그것도 남자에게) 500자를 채우는 일도 버거웠다.
사실 함자에게 별로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이대로 포기하려고 할 때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다행이었다.
“예. 들어오세요.”
내 신호에 따라 들어온 이는 고진주.
그녀는 할 말이 있는지 커피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
“대표님. 잠깐 시간 되세요?”
“그럼요.”
잠시 후.
우리는 마주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마침. 딱 카페인이랑 휴식이 필요했는데 감사합니다.”
“뭘요.”
그녀를 힐끗 주시했다.
할 말이 심각한 건가. 표정이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거예요?”
“실은 딱히 드릴 말씀이 있다기보다는 고민이 좀 있어서요.”
“고민이요?”
고진주는 나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푸훗.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심각한 표정을 지었나 보다.
“하하. 다 들어드릴 테니까 허심탄회하게 털어보시죠.”
내 말에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사실 쓰고 있는 시나리오의 방향을 제가 생각하는 대로 잡는 게 맞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그녀의 시나리오를 간곡히 기다리고 있었으나 지금까진 장르조차 묻지 않았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건데, 이젠 슬슬 타이밍을 잡던 중이었다.
지금이 그 타이밍이구나.
“영화 장르가 뭡니까?”
자신의 창작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경험은 어색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 경험이 처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녀도 당연히 그랬는지 내 물음에 조심히 입을 열었다.
“장르는 액션이에요.”
응? 액션?
뭔가가 생각나려고 했으나 우선 차근히 들어보기로 했다.
“그렇군요. 간략한 내용은요?”
어차피 고민을 말하려면 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던 시나리오의 내용을 차분히 읊었다.
“음, 주인공은 불멸의 몸을 가진 여자예요. 여자는 몇백 년을 홀로 살아가고 있죠.”
여성 원톱 액션이라······.
“자신의 특성을 알아챘을 때부터 여자는 자신의 모든 신분과 비밀을 숨긴 채 킬러로 살아갑니다.
그러던 중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죠. 그런 그와 아이도 가지게 되고, 처음으로 행복한 가정을 꿈꿔요. 그렇게 둘은 작은 성당에서 서로의 사랑을 서약하게 되는데.
괴한들이 침입해요. 학살을 시작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뻔한 복수극의 초반부일지 몰라도 설정이 특이했다.
그리고 내가 들으면서 주시했던 건.
이 영화가 전생에 있던 영화일까. 아닐까.
글로 옮겨져 시나리오로 나오면 또 내용이 바뀔 테지만, 확실히 전생에서 경험했던 내용은 아니었다.
“괴한들은 빠른 일 처리 후 사라졌고, 깨어난 여자는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사실보다 배에 맞은 총알 자국에 놀라 아이부터 살리려고 병원으로 향해요.
하지만 아이를 잃죠.”
그 뒤는 당연한 복수극의 시작이었다.
마지막엔 반전까지 있는 기승전결이 완벽한 스토리였다.
그런데 그녀의 고민은 시나리오의 방향이었다.
어떤 방향을 말하는 걸까.
고진주의 입이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히 물었다.
“진주 씨. 방금 말한 대로만 시나리오 나오면 아주 좋을 것 같은데요. 혹시 고민하는 부분이 어떤 부분입니까?”
“제가 고민하는 부분은······. 액션 장면들의 연출 방향이에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액션 장면들이 왜요?”
“한국에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액션을 담고 싶은데 제가 액션을 직접 본 적도, 겪어본 것도 아니니까 진짜 구현이 되려나 걱정부터 앞서서요.”
이건 너무나도 필요 없는 걱정이었다.
그녀가 <망자와 함께>의 스크립터를 하며 많은 성장을 한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고진주는 자신이 정해둔 시야에 아직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진주 씨. 그건 전혀 걱정할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전혀요?”
“그럼요. <망자와 함께>를 찍으면서 우리가 제일 걱정한 게 뭐였어요?”
“그야, 당연히 사후세계를 어떻게 구현하느냐였죠?”
“그렇죠? 그런 사후세계도 구현해냈는데 액션영화를 못 해내겠어요?”
우물 안 개구리는 그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그, 제작비라던가, 그런 거는······.”
이래서 PD들이 존재하는 거다.
연출하는 사람들이 돈을 신경 쓰는 순간.
영화는 원래의 목표를 잃기 마련이다.
“그거야말로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진주 씨는 어떤 장면을 만들어 낼지만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물론 아까 걱정하던 구현에 대한 문제도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전문가들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역시!”
그녀의 초롱초롱한 갈색 눈동자가 다시 빛났다.
“예. 지금은 우선 찍고 싶은 장면 싹 다 넣어서 시나리오 주시면 그 뒤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한 가지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정 힘들다 싶은 건 그때 수정해도 문제 되지 않아요.”
요즘 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다분한 광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혹시나 해서 한 말이었다.
“넵!”
고개를 얼마나 대차게 흔들어대는지 하나로 묶은 머리가 위아래로 달랑달랑 흔들렸다.
어째 눈빛이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그때 뭐, 별일 있겠나 싶었다.
이야기를 모두 나눈 고진주는 한결 후련한 얼굴로 방을 나갔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방문은 귀찮은 일처럼 느껴질 만도 했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소통하는 감독이 좋다.
자신 혼자 고집을 부리거나.
문제를 끙끙 앓고 있다가 키우는 것보다 이쪽이 백배 천배 낫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하던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임윤서에게 딱이다.
전생에서 임윤서가 할리우드까지 진출했던 액션영화는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
그 영화를 기다리기보다는 방금 들은 고진주의 영화를 제대로 만들어보는 게 더 이득일 수 있었다.
깍지를 끼고는 소파에 한껏 기대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니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열심히 살아간 오늘도 저물었으나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작품에 하루하루가 기대됐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