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예견되어 있던 순서
“대표님. 준비 다 되셨어요?”
나경이 대표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와선 물었다.
“예. 거의 다 됐습니다. 30분 뒤에 다 같이 출발하시죠.”
오늘은 <망자와 함께> 기술 시사회 날이라 시간에 맞춰 직원들과 같이 극장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전달해 놓을게요.”
그녀가 뒤로 돌아선 순간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 나경 씨. 서영 감독님 좀 불러줄래요?”
나경이 고개를 끄덕인 뒤 나갔고.
곧 신서영이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예. 잠깐 앉으시죠.”
그녀는 내 말에 최근 대표실에 놓은 푹신한 소파에 앉았고, 나도 뒤따랐다.
“벌써 기술 시사네요. 감독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신서영은 어딘가 복잡 미묘한 얼굴이었다.
“대표님이랑 노 감독님 덕분에 여기까지 온 거죠.”
“저보다는 노 감독님 역할이 컸죠.”
노흥기는 <어울림> 촬영 중간에도 <망자와 함께> 후반을 꼼꼼히 살폈다.
물론 그는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를 철저하게 신서영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게 놔두었다.
“그래도 편집은 신 감독님 힘으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머리 깨지는 줄 알았어요.”
그녀가 소탈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무슨 할 말 있으셨던 거 아니에요?”
그렇다.
그녀를 부른 건 할 이야기가 있어서다,
“<왕국 : 역병의 시작> 말입니다.”
신서영은 내가 그녀의 시나리오를 컴플릭스라는 미국 기업에 보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소피아와 진행한 미팅은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녀에게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기분을 최대한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얼마나 많은 감독이 작은 소식 하나에도 울고 웃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 내 입에서 나온 <왕국 : 역병의 시작>은 그녀로선 오랜만일 것이다.
반가운 소식에 그녀의 눈살이 살짝 접혀 들어갔다.
“무슨 연락이 온 건가요?”
“사실은 미국 출장 중 연락이 왔었습니다. 마침 근처에 있어 담당자와 미팅도 무사히 하고 왔고요.”
“오! 정말요?”
그녀는 내 말에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우선 저희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했고요. 조건이 받아들여지면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지, 진짜요?”
“아직 연락이 온 건 아닌데, 곧 올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망자와 함께> 한국 개봉은 이틀 뒤였고.
날짜가 조금씩 다르긴 했으나 해외 판매된 나라에서도 하나둘 개봉을 시작할 것이다.
그럼 기다리던 소피아의 연락이 오겠지.
당장에 오케이 연락이 아니더라도 한 번 더 미팅할 수 있겠냐는 그런 긍정적인 연락 말이다.
그러나 이런 본격적인 물살을 타기 전에 원작자인 신서영의 의중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감독님께 여쭤보려고-. 응?”
그런데 그녀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감독님?”
“미국이라니······.”
신서영은 이미 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눈치였다.
누가 봐도 꽃밭에 가 있는 표정이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허둥지둥하는 모습이더니.
“이거 어쩌죠?! 제가 아직 미국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아!”
급기야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가 떠오른다아!!”
다급하게 소파에서 일어난 것이다.
“예? 뭐 가요? 그보다 어디 가시려고요? 곧 시사회 가야 하는데?”
“아! 시사회는 가야죠! 참!”
신서영은 시사회 관련 대답은 재깍하더니 손톱을 물어뜯으며 대표실 이곳저곳을 걸어 다녔다.
“죄송해요. 어디 가려는 건 아니고, 제가 생각 정리할 때 걸어야 해서.”
그러더니 걸음은 멈추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들어 무언가를 무아지경으로 적어댔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이지.
사실 그녀에게 물으려던 건.
<망자와 함께> 후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휴식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또 이번 작품이야말로 그녀의 단독 입봉 작품일 텐데 그에 대해 생각은 어떤지 등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녀에겐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감독님. 진짜 걱정돼서 그러는데 괜찮으신 거 맞죠?”
핸드폰만 뚫어지게 보던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네? 아! 완전 괜찮아요! 잠깐 뭐가 생각나서요!”
아까부터 뭐가 그리도 떠오르고 생각났다는 건지.
빙그레 웃던 신서영은 그 답을 해줬다.
“시즌 2 스토리가 반짝 생각났지 뭐예요?!”
“시즌 2요?”
“네! 제목은 <왕국 : 시간의 비밀>이요!”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녀의 영감은 굉장히 갑작스레 찾아오며 당장 어딘가로 표출하지 않으면 금방 까먹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
사무실에서 한바탕 소동을 겪고, 우리는 시사회장으로 향했다.
기술 시사회는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들을 초대해 개봉 전 함께 보는 시사회다.
<망자와 함께> 촬영이 끝나고, 대부분 스태프가 <어울림>으로 넘어갔기에 고로 오늘은 <어울림>의 휴차 날이기도 했다.
극장 입구엔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대표님! 얼굴이 더 좋아지셨네요!”
“현장에도 자주 오시죠?! 동물원 냄새도 맡다 보면 적응됩니다!”
“그나저나 다음 작품은 또 언제 들어가십니까?”
나를 맞아주는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꼼꼼히 인사하다 보니 시사회 시간은 어느새 15분 후가 되었다.
슬슬 들어가 봐야 하나 싶던 그때.
“대표님!”
누군가가 나를 부르기에 돌아보니 사색이 된 정 PD와 차 PD가 보였다.
느낌이 쎄하다.
둘은 최근 서로의 스케줄이 달라 방금까지 오랜만의 만남을 반가워하며 안부를 묻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서로 앞다퉈 내게 달려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YJ E&M 배인규 회장님이 지금 시사회장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예?”
배인규의 배자도 듣지 못했던 건 그들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비서라는 사람이 갑자기 전화해서는 도착한다고 말하고는 딱 끊어버리던데요?”
물론 배인규 회장이 오든 그 할아버지가 오든.
미리 이야기만 해줬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배인규도 자신의 회사에서 투자 배급하는 영화를 보고 싶었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굉장히 이성적이고 철저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지금의 행동은 지극히 감성적이다.
뭐 어쨌든 갑작스러운 변덕이라도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비서 쪽에 다시 연락해서 회장님 선호하는 좌석 열이랑 관람하는 인원 좀 물어봐 주세요. 그 자리 스태프에게는 양해 좀 구합시다.”
“네!”
정 PD와 차 PD는 순식간에 내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다행히 큰 극장을 섭외한 덕분에 좌석이 조금 남는 상황이었고.
자리를 바꿔줘야 하는 스태프는 아까 살갑게 인사를 나눈 그립 실장이었기에 군말 없이 바꿔줬다.
그렇게 약 10분 만에 상황이 얼추 정리되었고.
때마침 저 멀리 걸어오는 한 무리가 보였다.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지만, 사진으로 본 적이 있어 바로 알 수 있었다.
배인규 회장이다.
그는 170 정도 돼 보이는 키에 깨끗하게 넘긴 희끗희끗한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깔끔한 네이비색 맞춤 정장을 입은 외양과 검정 구두를 신은 걸음걸이는 자신감이 넘쳤다.
배인규는 뚜벅뚜벅 걸어오며 별 표정 없이 나를 빤히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 뒤로는 비서, 경호원 세 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노흥기와 신서영, 고덕현에게도 다급히 배인규 회장의 방문을 알린 상태였기에 현재는 정 PD, 차 PD와 함께 주르륵 서 있는 모습이었다.
배인규는 내 앞에 딱 멈춰 서서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에게 꾸벅 인사했다.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신바드입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건 마치 ‘네가 그놈?’이라는 느낌이었다.
나를 못마땅해하는 눈치길래 ‘그래. 그럴 수 있지.’ 수긍했다.
“그래. 반갑네. 내가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어서 말이야.”
“예. 잘 오셨습니다.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내 말에 배인규는 손을 뻗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아니야. 됐어. 김 비서. 들어가지.”
그렇게 그는 김 비서라고 불리는 여자와 함께 경호원 한 명의 경호를 받으며 극장 안으로 사라졌다.
그들을 보던 노흥기 감독은 지금의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로 말했다.
“뭐야? 회장이면 단가. 보자마자 반말을 해. 거, 초면에 눈빛도 영 안 좋네. 참.”
아마도 배인규는 <망자와 함께> 해외 판권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영화계에는 비밀이 없다.
하물며 배인규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나라와 계약을 할 때마다 실시간으로 보고받았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어차피 이건 예견되어 있던 순서였다.
해외 판권을 넘겨받았을 때부터 그와의 관계는 틀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니 내겐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인 거다.
“하하. 영화 시작하겠습니다. 얼른 들어가시죠.”
그렇게 사람들과 어두컴컴한 극장 안으로 향했다.
*
배인규는 김 비서의 안내로 손쉽게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뭐야? H 열? 김 비서가 알려줬나?”
“도착 직전에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사실 오늘 시사회에 갑작스레 방문한 건.
신바드라는 자가 얼마나 당황하는지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직접 시사회를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누구든 자신의 방문을 당황스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당황은커녕 감독들과 PD들까지 대기 시켜 놓고는 자신을 기다렸다.
또 분명 자신의 자리가 없었을 텐데.
그 사이에 선호하는 위치까지 김 비서에게 물었단다.
대처 능력이 꽤 좋았다.
자리에 앉은 배인규는 막 극장 안으로 들어오는 신바드 일행을 유심히 살폈다.
‘도건우랑 노흥기 감독 꿰찼다고 할 때부터 예삿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한 놈이 분명했다.
자신을 마주하는 사람은 우선 긴장부터 하기 마련인데, 신바드는 그런 기색조차 없었다.
젊은 시절.
주변에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겠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던 배 회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놈을 보니 딱 그 말이 떠오는 건 왜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는 중에 어느새 장 내는 영화를 시작하려는지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놈의 영화. 얼마나 괜찮길래 다들 이렇게 난린지 직접 확인해주마.’
배인규는 영화가 잘되면 분명 자신도 좋아해야 할 일이었으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런 기분으로 영화가 눈에 제대로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런데······.
콰아아아앙-!
‘응? 이게 뭐야?!’
영화는 보통 키 스태프들의 이름이 나오는 오프닝이 있다.
이 시간은 약 3분 정도로 가끔은 관객들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도 한다.
<망자와 함께>는 그 부분을 과감히 삭제했는지 투자 배급사와 제작사 오프닝 영상 뒤로 스크린이 밝아지자마자 한 건물이 폭발하는 장면부터 시작했다.
퍼엉-!
-빨리! 도, 도망쳐!!
시작부터 폭발 신을 내보내며 눈과 귀를 붙잡으니 몰입이 안 되는 게 더 이상했다.
배인규는 영화에 집중하느라 더는 하던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신바드가 어떤 놈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스크린에는 한 번도 표현된 적 없던 사후세계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영화를 사업이 아닌 그저 재미로만 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