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하면 다 된다
다행히 그날 한보배의 짧은 일탈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는지 기사 한 줄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퍼레이드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안에게 명함을 건넸다.
-영화요?
그는 갑작스러운 캐스팅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명함을 받아 들었고.
혹시라도 그의 생각이 오래 걸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답변은 삼 일 뒤에 들을 수 있었다.
-저 한번 해보겠습니다. 사실 배우의 꿈을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어요. 늦은 나이라 생각하고 도전할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현재 이안의 나이는 28살로 데뷔하기에 늦은 나이긴 했다.
그러나 연기를 하는데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허훈은 당연히 내가 데리고 간 이안을 마음에 쏙 들어 했고.
우리는 그날 바로 계약을 체결했다.
지성미가 보낸 배우들의 프로필도 인물 조감독에게 넘기자 <처절한 인생>의 프리는 급물살을 탄 듯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
제니퍼는 뜨거운 햇볕 아래 선글라스를 낀 채 콤바인을 몰고 있었다.
그녀는 이 넓은 옥수수밭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뉴욕의 야경과 이곳은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었다.
띠리리리-!
콤바인 소리 때문에, 핸드폰 볼륨을 최대로 올려놨는데.
그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누구야.”
제니퍼는 발신자를 확인한 뒤 콤바인의 시동을 껐다.
“여보세요?”
-제니퍼! 잘 지내고 있어?
너 같으면 잘 지내겠냐.
따지고 물으려다가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 그만뒀다.
“옥수수를 아무리 수확해도 끝이 없어. 근데 왜 또 전화한 거야?”
마크의 전화 때문에 그녀는 블랙 스튜디오를 나왔을 때가 생각났다.
사실 마크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는 아람 측과의 미팅 전날 자신에게 경고하기도 했고.
문제가 발생했을 땐 정확한 추측도 내놓았다.
그 모든 일을 무시하고 문제를 키운 건 자신이었다.
그까지 마야의 징계를 받는 건 불합리한 일이었다.
그래서 제니퍼는 자신의 잘못을 마야에게 모두 말했고, 인정하면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회사에 끼친 손해를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한 것이다.
정이 많은 마크는 제니퍼가 짐을 싸는 날.
펑펑 울었다.
그리고는 무슨 일만 있으면 이렇게 전화를 하곤 했다.
회사에서 마음 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나 뭐라나.
-길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 그보다 제니퍼, 내가 알아냈어! 그 동양인 있잖아! 함자랑 아흐마드랑 같이 온!
이 눈치 없는 자식은 언제까지 이러려나 모르겠다.
“마크! 너 내가 회사에서 나온 이야기를 또 하고 싶은 거야? 나는 아직도 그 야경을 잊지 못하는데?!”
-야경? 무슨 야경? 하여튼! 그게 문제가 아니고, 너도 들으면 깜짝 놀랄걸?
제니퍼는 요즘 보는 책이 있었다.
‘깨달은 자’라는 책이었는데 불교의 석가모니가 해탈에 이른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래. 마크도 이러는 이유가 있겠지.’ 해탈하게 되었다.
“무슨 일인데.”
-역시! 궁금해할 줄 알았다니까!
마크는 무슨 세상을 뒤흔들 만한 비밀이라도 내놓는 듯 뜸 들이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동양인은 한국 사람이었어!
해탈의 경지가 허탈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하지만 제니퍼는 한 번 더 참아보기로 했다.
“마크. 그건 당연한 거 아니겠니? 아람이 한국인이잖아.”
드넓은 옥수수밭으로 바람이 불어와 옥수수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런가? 그런데 그뿐이 아니야! 그 남자가 한국에서 작은 영화사의 대표래!
응? 이건 좀 흥미로운 정보였다.
제니퍼는 한껏 퍼져 있던 자세를 바로잡아 고쳐 앉았다.
“계속해봐.”
-근데 그 영화사 이름이 뭔 줄 알아?
“뭔데?”
-아라비안필름.
“뭐어?!”
아라비안필름은 자신이 블랙 스튜디오에서 한창 인정받고 있던 작년부터 가끔 들려오던 곳이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나 이쪽 판은 정보 싸움이다.
어느 나라의 어떤 제작사와 감독이 만든 어떤 장르의 영화가 있다더라.
흥행이 될 만한 작품은 잡아야 돈이 되니까.
소문을 타기 마련이다.
아라비안필름도 마찬가지였다.
<투명한 사랑>,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 등의 영화로 상도 받고,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아시아에서 떠오르는 제작사로 급부상했다.
그 남자가 그 제작사의 대표였다니?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인가 했는데, 이제야 이야기의 앞뒤가 맞았다.
-너 그건 알지? 함자가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을 구입해서 화제가 됐던 거?
“당연하지! 한바탕 난리 났었잖아.”
아흐마드가 유럽 필름마켓에 출연해 아라비안필름의 영화를 샀다는 건 영화인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일은 아라비안필름을 더 유명해지게 만들었다.
“가만! 그렇다는 건!”
-그래! 이번에 함자는 그 대표를 데리고 우리 회사를 직접 찾았어. 그 이유가 뭐 때문이겠어? 아무래도 그 영화사를 제대로 밀어주려는 게 아닐까?
블랙 스튜디오의 영향력은 가히 어마어마했다.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아무리 비공식적인 미팅이었다고 해도 같이 방문했다는 사실부터가 이상한 일인 것이다.
함자가 뒤를 봐주는 제작사라니.
마크가 덧붙이는 말은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야 제니퍼. 그런 아라비안필름에서 이번에 차기작을 들고 마켓에 나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경쟁이 얼마나 치열할지 예상도 할 수 없다고!
옥수수밭에 불던 바람은 점점 더 거세져 제니퍼의 머리카락을 헤까닥 뒤집었다.
제니퍼는 산발의 된 자신의 머리는 신경 쓸 틈도 없이 마크에게 소리쳤다.
“대박이다!”
이 소식은 분명 현재 영화계에 휘몰아칠 돌풍이 되고도 남을 이야기였다.
*
나경은 콧노래가 자꾸 나와 큰일이었다.
시드니 필름마켓에서의 성과가 예상을 한참 웃도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고된 일정에 상하이로 넘어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재민과 전해성은 곯아떨어진 상태였으나 본인의 정신만은 온전했다.
노트북을 열어 저장해 둔 메일을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했는데.
상하이 필름마켓에 신청된 사전 미팅의 수를 확인한 그녀는 눈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히익! 이게 다 몇 개야? 하나, 두울······.’
총 46건으로 이걸 다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투명한 사랑>과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으로 아라비안필름이 슬슬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맞지만.
뭔가 이상하긴 했다.
부스를 방문하는 바이어들의 태도가 적극적이어도 너무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꼭 저희가 사 가겠습니다.
-지금 바로 계약서를 쓸 수 있습니까?
-혹시 아라비안필름이 준비하고 있는 차기작도 있나요?
심지어는 차기작 문의도 끊이질 않았다.
마켓에선 종종 시놉시스나 감독, 배우 라인업만으로 영화가 팔리는 경우가 있다고 들어보기만 했지.
설마 자신들의 제작사인 아라비안필름 이름 하나만 보고 차기작을 계약하겠다는 바이어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아쉬운 점은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해 준비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역시 자신들의 수장 신바드 대표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드니에서의 일을 보고하니 상하이에서는 전략을 좀 바꿔보자 제안했고.
현재 한국에서 촬영 중인 <어울림>과 허훈의 차기작 <처절한 인생>도 계약하고 싶다는 바이어가 있다면 선판매를 해보자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시드니보다 상하이의 사전 미팅 신청이 더 많아지게 된 것이다.
당연히 셋의 할 일도 많아졌다.
그래도 나경은 힘들지 않았다.
‘내 손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어.’
이미 시드니에서 신바드와 약속한 목표치의 반을 넘게 채웠다.
그러니 한국에 돌아가서는 정말 하고 싶던 일을 드디어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찬 상태였다.
자신은 현재 입사 4년 차였다.
만약 다른 영화사의 기획팀으로 입사했다면 절대로 경험해보지 못했을 업무를 많이 하는 중이다.
더불어 이제는 기획까지······.
기회가 이렇게 일찍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의지를 불태웠다.
선판매까지 추가해서 자신의 대표가 무조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란 듯이 가지고 가겠다는 의지를 말이다.
*
“뭐? 몇 개국에 팔렸다고?”
배인규는 최근 듣기 싫은 소식들이 자꾸 들려오는 것이 거슬렸다.
분명 자신의 촉은 <망자와 함께>가 절대 해외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총 87개국에 판매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아라비안필름은 자꾸만 성장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해외에서 예상치 못한 성과들을 하나둘 올리기 시작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결국 줄곧 맞아떨어지던 자신의 촉까지 빗나가기에 이르렀다.
이건 YJ E&M을 굴지의 기업으로 올려놓는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다.
이번 일은 배인규에게 불안감을 넘어서 익숙하지 않은 공포로 다가왔다.
마치 자신을 조금씩 옥죄는 듯한 느낌.
언젠가는 저 작은 회사가 자신을 위협할 것 같다는 생각.
이런 영 좋지 않은 촉이 발동했다.
그러다 보니 괜히 속에선 열불이 나고, 심술이 났다.
“김 비서.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건가?”
괜히 앞에 서 있던 김 비서에게까지 불똥이 튀었다.
“예?”
김 비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해외 판권은 자기가 직접 넘겨준 것이 아닌가.
당장이라도 품에 있는 사직서를 던지고 싶었으나 다음 달 낼 카드값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을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배인규는 신경질적으로 지시했다.
“시사회 일정 알아봐. 직접 눈으로 봐야겠으니까.”
*
마켓 일행이 출국한 지도 벌써 2주가 지났다.
나는 고생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려 예정우와 입국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어! 저기 나온다!”
예정우의 손가락 끝을 보니 정말로 셋이 나란히 서서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과장과 전해성은 녹초가 된 모습이었는데 나경 만이 신이 나서는 손을 흔들어댔다.
“대표니임!!”
당장이라도 뛰어올 기세다.
“천천히 와요! 천천히! 넘어져!”
그렇게 만난 우리는 서로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해외에 나갔다 오면 또 한식을 먹어줘야 기력이 보충된다.
“배 안 고파요? 2주나 나가 있었는데 김치찌개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역시 귀국 직후 먹는 김치찌개는 거절할 수 없는 메뉴였다.
침을 꼴딱꼴딱 삼키는 삼총사를 데리고 공항 내부에 있던 한식당을 찾았다.
각자 메뉴 하나씩을 주문하고, 고생한 이들을 격려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어땠어요? 많이 힘들었죠?”
먼저 이 과장이 입을 열었다.
“처음엔 당장이라도 대표님이 오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또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모든 일이 그렇다.
하면 다 된다.
전해성이 나경을 보면서 웃었다.
“그것도 그건데, 나경이 아니었으면 일정 소화 못 했을 겁니다. 얼마나 꼼꼼하게 체크하던지.”
이 과장도 그 의견에 동조했다.
“맞아요! 진짜! 나경 대리님. 일당백!”
“에이, 다 같이 열심히 한 거죠.”
나경은 부인하면서도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였다.
귀국 전 전화로 상황을 간략히 들었으나 일정이 빡빡해 정확한 수치는 묻지 못했다.
“그래서 저희 몇 개국에 팔렸다고요?”
나경은 그 질문만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망자와 함께>는 87개국에 판매 완료했고, <어울림>은 23개국, <처절한 인생>도 15개국 선판매 체결했습니다.”
엄청난 성과였다.
선판매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고 있던 터라 수중으로 들어오는 수익도 꽤 될 것이다.
자, 그럼 이제 보상을 줄 시간이다.
“목표치 채우셨네요?”
우리가 애초에 정한 건 70개국이었다.
그 기준을 상당히 넘어선 결과였으니 이 삼총사가 얼마나 바쁘게 뛰어다녔는지 안 봐도 뻔하다.
나경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우선 해외 출장으로 주말도 없이 일했으니까 쉬고 다음 주에 출근하시죠. 그리고 출근하자마자 나경 씨 필두로 해서 시나리오 서치해 보세요. 뭐, 회사로 직접 작가들 시나리오 받아도 되고, 시나리오 마켓 뒤져봐도 되고요.”
나경과 이 과장은 얼싸안고 기뻐했다.
“와! 해냈어요! 대리님!!”
“네! 재민 씨! 우리 또 잘해봅시다!”
저리도 좋을까.
둘을 보고 있으니 내가 처음 제작한 영화를 극장에서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래. 저렇게 좋을 만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