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76화 (76/140)

#76화. 신비와 모험의 나라

누아르.

사실 이 장르는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의 모든 작품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80년대부터 홍콩 영화계에 범죄 누아르 장르가 성행하면서 현대인들에게 누아르의 이미지는 조금 달라졌다.

대부분 쌍권총에 이쑤시개 물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만큼 많은 인기를 얻었던 장르로 2000년대 이후까지도 제작되었다.

그런 누아르 붐이 한국까지 불어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 홍콩 누아르는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모든 인기는 영원할 수 없듯이 시대를 풍미했던 누아르도 사람들의 추억이 됐다.

그런데 방금 나간 정 PD는 이 누아르 붐이 다시 불어올 거란 말을 너무도 쉽게 하고 있었다.

정 PD는 빈말할 성품이 못 되었다.

물론 그의 판단을 대중의 판단으로 볼 순 없었으나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고로 그의 판단이 맞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시대를 풍미할 영화.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영화를 내 손으로 제작하는 일은 돈을 떠나서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나는 돈도 놓칠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며칠 뒤.

제주도에서 돌아온 허훈이 사무실로 출근했다.

“대표님. 잘 지내셨어요?”

그는 전보다 살집이 살짝 붙었고, 전체적으로 약간 그을린 모습이었다.

“그럼요. 감독님은 어떠셨어요?”

그가 나를 차분하게 주시했다.

“재밌었어요. 온전히 내 글만 생각하고, 쓰고, 지낸다는 건 정말로 즐거운 일이더라고요.”

그런 시간을 보내왔으니 이런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나왔던 것일까.

“시나리오는 어떠셨어요?”

허훈의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내 계획을 말했다.

“너무 좋았어요. 이번엔 3대 영화제 한번 가보죠?”

그는 내 말이 겉치레처럼 느껴졌는지 손을 내저었다.

“어휴. 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진심입니다. 혹시 배우는 누굴 생각하고 계십니까?”

전생에서 <처절한 인생> 주연배우는 이 영화로 인해 한 방에 인생이 역전된다.

나는 그가 누구고,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허훈이 이번 생에도 그를 원한다면 나는 바로 앞에 데려다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미래가 조금씩 바뀌고 있어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주연부터 해서 조연 배우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신인으로 캐스팅하고 싶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은 그의 말을 듣고 안심되었다.

다행히도 미래가 그렇게까지 벗어난 건 아닌 모양이다.

<처절한 인생>이 더 주목받았던 이유는 출연한 배우들 때문이기도 했다.

대부분이 영화계에서 유명하지 않은 중고 신인이었고.

그중에서도 조직에 잠입해 언더커버 생활을 하는 ‘우진’ 역은 연기 괴물이 나타났다는 평을 받은 신인이었으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좀 찾아보고, 오디션도 고려해보죠.”

내가 너무 흔쾌히 받아들였나?

허훈은 놀란 눈치였다.

“정말로 괜찮으세요?”

유명 배우를 섭외하는 이유는 흥행이 보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나에게 <처절한 인생>은 보증된 작품이니 상관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가야 전생과 비슷하게 성공할 테고.

무엇보다 이러한 이유도 있었다.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투자도 저희가 할 건데요?”

제작사들이 그렇게도 배우 캐스팅에 목매는 이유는 투자금 유치 때문이다.

그 때문에 배우들 몸값은 나날이 최고치를 찍으며 올라가고 있었다.

이번 생에 목표가 하나 더 있다면.

너무 배우들에 휘둘리지 말자는 것이었다.

당연히 연기가 힘든 일임은 알고 있었으나 그들이 과하게 받아 간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나는 그에게 한 가지 더 물을 것이 있었다.

“감독님. 수중 액션신이랑 프롤로그 말입니다.”

이 두 장면은 전생의 <처절한 인생>에선 없던 장면이다.

허훈은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예상했다는 듯 답했다.

“네. 사실 그 두 장면을 넣을까 말까 고민이 많았는데, 대표님은 역시 금방 눈치채시네요.”

“그래도 고민하다가 넣었다는 건 꼭 필요한 장면이라는 판단이겠죠?”

“그렇습니다.”

그의 눈빛은 또렷했다.

확신하고 있다는 건데······.

그렇다면 아직은 보류하자.

더 좋은 방향으로 미래가 바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판단은 다 찍고, 편집에서 해도 무리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예산은 짜고 있으니까 감독님은 콘티 작업 들어가시면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처절한 인생>의 프리가 시작되었다.

*

-여보세요?

“이사님. 신바드입니다.”

지성미 이사는 오랜만인 내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

-당연히 알고 있죠. 대표님. 오랜만에 연락 주셨네요?

“예. 다른 게 아니고,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신 대표님의 부탁이라, 무슨 부탁일지 기대되는데요?

<투명한 사랑>의 연극이 성황리에 막을 내려서인지 그녀는 나를 더 신뢰하게 된 눈치였다.

“저희가 지금 신작 준비 중인데 연극배우 위주로 비공개 오디션을 좀 봤으면 해서요.”

-어머, 정말요?

“예. 그런데 아시다시피 제가 이쪽 인맥은 이사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인맥이 굉장히 거대하긴 하지만.

-배우들이 아주 좋아하겠는데요? 일정만 알려주시면 하겠다는 인원이 꽤 될 겁니다. 요즘 아라비안필름은 저희 쪽에서도 화제니까요.

응? 연극 쪽에서 우리 제작사 이름이 오갈 일이 있나?

“그런가요? 혹시 나쁜 쪽으로 화제인 건 아니죠?”

그녀가 짧게 웃었다.

-설마요. 소문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하죠. 들어가는 영화마다 흥행하고 있잖아요? 영화 쪽 관심 없던 배우까지 한 번은 일해보고 싶은 영화사라고 하던데요?

마침 적절하게 소문이 난 모양이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연극계만큼 허훈이 원하는 배우들이 널린 곳은 없다.

-하겠다는 배우들 프로필 취합해서 넘겨드릴게요. 일정만 문자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이사님.”

그렇게 그녀와의 통화를 원만하게 마치고.

나는 저 멀리 보이는 간판을 빤히 쳐다봤다.

[CARRIE WORLD]

캐리는 YJ E&M만큼이나 많은 사업을 하는 기업이었다.

엔터테인먼트 이외에도 식품, 유통, 건설, 관광 등등.

그중에서도 캐리월드는 캐리에서 운영하는 놀이동산이었다.

이 나이에 혼자서 놀이공원이라니.

한가로이 놀이기구나 타고자 온 것은 아니었기에, 목적을 다시 상기했다.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처절한 인생>의 ‘우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럼 한번 들어가 볼까나.

매표소에서 표를 예매한 뒤 들뜬 마음으로 신비와 모험의 나라인 캐리월드에 발을 내밀었다.

놀이기구마다 길게 늘어선 줄.

한번 들으면 계속 귓가에 맴도는 중독성 강한 테마송.

곳곳에서 들려오는 즐거운 비명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날을 잘못 잡을 걸까.

오늘은 수요일.

일주일의 중간인 평일이었는데 사람이 많았다.

일부러 사람이 없을 만한 요일로 맞춰서 온 것인데······.

어쨌든 아직 ‘우진’ 역의 배우를 만나려면 1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뭘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갑자기 주변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더니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꺄아! 언니 너무 예뻐요!”

“누나! 사진! 사진 한 장만요!”

“아, 밀지 마요!”

“와! 개이쁘다. 진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한 뭉텅이의 사람들이 밀려오는 그곳을 유심히 살폈는데.

“뭐야? 연예인 왔어?”

“한보배래! 한보배!”

들려오는 이름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한보배가 여길 왜?

정말로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그나저나 아는 척을 해야 하나.

모르는 척을 해야 하나.

난감한 상황에 그냥 그녀에게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 섰고.

고개를 돌린 채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응? 대표님?”

한보배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인형처럼 걷던 그녀가 갑자기 멈춰 서서는 웬 남자에게 아는 척을 하자 나를 살폈다.

대충 그 눈빛들은.

‘뭐지? 저 아저씨한테 한보배가 왜?’

‘그나저나 대표님?’

의심의 눈초리였다.

“하하, 보배 씨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요.”

몰려들던 인파를 막던 한보배 매니저 남상훈도 그새 나를 발견했다.

“어? 대표님?”

“상훈 씨도 오랜만입니다. 하하.”

그 잠깐 사이 사람들은 무서운 속도로 더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대뜸 내게 물었다.

“대표님. 놀이기구 타러 오신 거예요?”

“그건 아니고······.”

근데 뭐라고 해야 하지?

‘배우 찾으러 왔어요.’ 하기도 뭐 하고, 혼자 놀러 왔다고는 더 하기 뭐 한데.

잠시 망설이자 한보배가 얼른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럼 잠깐 이야기하고 가세요! 대기실 요기 바로 뒤니까.”

대기실?

그녀는 아마도 무슨 행사 때문에 온 모양이다.

시간도 남았으니 잠깐은 괜찮겠지.

그렇게 나는 졸지에 한보배 일행을 따라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자연스럽게 남상훈과 함께 인파를 뚫었고.

어째 공항에서 기자들을 피하던 때가 생각났다.

“보배 씨는 무슨 행사 있었어요?”

한보배가 피식 웃었다.

“대표님. 모르셨구나. 저 여기 모델이에요. 광고도 많이 나오는데 요즘.”

전혀 몰랐다.

“아, 그래요?”

“네. 그래서 오늘 사인회 했어요. 막 끝나서 가던 중이었고요.”

“응? 그런데 왜 다시 대기실로 오셨어요?”

“놀이공원 혼자 오신 대표님을 만났는데 어떻게 그냥 가요.”

그녀의 얼굴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대표님. 사실 놀이기구 좋아하시죠?”

순간 이거 뭔가 단단히 오해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뭐라도 대답한다는 것이 그만.

“놀이기구 타러 온 게 아니고, 퍼레이드 보러 왔습니다.”

더 이상한 답을 하고 말았다.

“퍼레이드요?”

장난스럽던 그녀의 표정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인데-.”

“그럼 저 부탁 하나 드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요.”

“부탁이요?”

한보배는 한껏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바이킹이 너무 타고 싶어서 같이 타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아니, 저런 표정으로 부탁하면 어떻게 안 들어주냐고.

“아직 시간이 남아서 같이 타는 건 상관없는데, 돌아다녀도 괜찮겠어요?”

그녀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잠시 후.

나는 정말로 바이킹을 타고 있었다.

“꺄아!”

그것도 맨 뒷자리에 앉은 채로.

한보배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얼마나 신나게 타고 있는지 후련함은 감출 수 없었다.

바이킹에서 내린 뒤 우리는 근처 벤치에 잠깐 앉았다.

“사실 사인회 하면서 얼마나 타고 싶었는지 몰라요. 대표님 안 만났으면 그냥 갈 뻔했네!”

그녀는 옷도 갈아입은 상태라 아직은 눈치챈 사람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언제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이제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 말에 그녀는 무슨 말이냐는 얼굴이었다.

“응? 퍼레이드 보러 오셨다면서요. 바이킹 타주셨으니까 같이 봐 드릴게요!”

빙긋 웃는 그녀에게 한 번 더 괜찮다고 말하려는 그때.

-잠시 후. 신비와 모험의 나라 캐리월드의 퍼레이드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주변에 달려있던 스피커는 퍼레이드 시작을 예고했다.

“어! 시작한대요! 가요! 자리 빨리 안 잡으면 뒤에서 봐야 한다니까요?”

뭐, 괜찮으려나.

나는 그녀에게 이끌려 퍼레이드를 준비 중인 직원들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괜찮죠? 예전에 다훈이랑 우주랑 왔을 때 딱 여기가 좋았어요.”

한보배는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네요. 잘 보이고 좋네요.”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는 잠시 두고,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쪽을 유심히 살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것이다.

전생의 ‘우진’ 역이었던 이안.

그는 배우가 되기 전 이색적인 직업을 가졌던 배우 랭킹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었다.

바로 퍼레이드 단원으로 활동한 이력이었는데 몸을 잘 써야 하는 단원 시절의 경험을 <처절한 인생> 액션에서 잘 녹여 내기도 했다.

“시작한다!”

한보배의 말이 끝나자마자 보고 있던 시작점의 가벽이 열렸다.

그 너머에선 각양각색의 인형 탈을 쓴 사람들이 하나둘 음악에 맞춰 나오기 시작했다.

이안도 인형 탈을 쓰고 있으려나.

그럼 낭패인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오는 단원들을 더 열심히 살펴보고 있던 그때.

저 멀리 확연히 눈에 띄는 피지컬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그는 큰 키에 길쭉길쭉한 팔다리를 움직이며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위아래 모두 흰색 쫄쫄이에 요정을 표현한 날개, 요상한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음에도 그는 이상하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우와. 저 사람 진짜 춤 잘 춘다. 그렇지 않아요. 대표님?”

한보배도 역시 그를 콕 집어 가리켰다.

“그러네요.”

그는 바로 전생에서 ‘우진’ 역을 소화했던 이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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