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바꿀 수 있으니까
“so far girl?”
천상현의 곡이 한 달 만에 도착했다.
비록 가사는 없고, 그의 허밍으로만 이루어진 곡이었으나 제목도 있는 3분짜리 곡이었다.
받자마자 들어봤는데······.
이거 노래가 꽤 좋다.
옛날 생각도 나면서 신나고, 무엇보다 입에서 계속 맴도는 멜로디였다.
나는 곧바로 양상철에게 곡을 보냈고.
마음에 든다고 하면 작사가는 그들이 따로 붙여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천상현에게서 온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
<망자와 함께> 후반이 끝났다.
“나경 씨. 잠깐만요.”
나는 나경을 방으로 불렀다.
그녀에겐 막중한 임무를 줄 예정이었다.
“네. 대표님.”
“<망자와 함께> 후반이 다 됐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나경은 자신에 일처럼 기뻐했다.
“와! 정말요? 일찍 끝났네요? 2주 정도 뒤로 예상했잖아요.”
“예. 그래서 마켓을 한 군데 더 돌 수 있을 거 같아요.”
‘마켓’이라는 단어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이번에도 가시는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요. 이번에는 나경 씨와 재민 씨 둘이 갈 겁니다.”
“네?!”
반짝이던 눈이 흔들렸다.
“저희 둘이요?”
“원하신다면 이번에도 해성 씨를 불러드릴게요. 아무래도 재민 씨가 아직 영어를 배우고 있는 단계라 저도 웬만하면 해성 씨도 같이 갔으면 좋겠고요.”
“······.”
그녀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저희끼리······.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망자와 함께> 해외 판권 중요하잖아요. 그래서 YJ E&M에서 가져온 거기도 하고.”
“당연히 중요하니까 두 분께 맡기는 겁니다. 해봤잖아요. 결과로 보여주기도 했고. 이번엔 하나를 도는 게 아니라서 체력적으로는 더 힘들 거예요.”
“그래도······.”
항상 씩씩하던 나경도 이럴 때가 있구나.
나는 그녀의 의지를 또 상여금으로 북돋아 주어야 하나 싶다가.
그것보다 더 괜찮은 방법이 떠올랐다.
“잘하시겠지만, 이번에 목표치 달성해 오시면 한 가지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불안해하면서도 권한이란 단어에 움찔했다.
“권한이요?”
“예. 나경 씨 기획팀 대리잖아요?”
“그렇죠?”
이 말을 하면 나경이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직접 영화를 기획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릴게요. 시나리오 검토부터 제작까지 말입니다.”
그녀는 너무 놀라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허어업!”
좀 더 재밌는 반응을 예상했는데, 살짝 아쉽긴 하다.
“지, 진짜죠?! 대표님?!”
그래도 어지간히 기뻐하는 걸 보니 꽤 괜찮은 제안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양상철은 신바드에게서 곡을 받자마자 그린 애플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세 명은 대표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어리둥절했다.
“대표님.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평소에도 웃음이 많던 양상철은 눈이 잔뜩 휘어진 모습이었다.
“애들아. 너희 타이틀 나온 것 같다. 아직 가사는 없는데. 작업하기 전에 너희 의견을 들어보긴 해야 할 것 같아서. 허허!”
“응? 그렇게 좋아요?”
“그래에! 이번엔 진짜! 진짜! 진짜야!”
사실 한국에 들어온 뒤로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터라 모두는 불신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대표가 저렇게 강조하니 들어보긴 해야지.
그렇게 양상철이 틀어 준 노래를 듣던 아이들은.
“응? 나 왜 춤추고 있지?”
“너 어깨 빠지는 줄.”
“여기서 멜로디가 이렇게 바뀐다고?”
“뭐야. 벌써 끝났어.”
“근데 왜 너는 계속 부르고 있냐?”
말 그대로 중독성이 아주 강한 노래였다.
물론 좋은 쪽으로.
“대표님! 이런 곡을 어디서 찾으셨어요?!”
곡을 직접 소화할 가수들조차 좋다고 하니 그는 한껏 웃었다.
“허허! 신 대표! 알지?! 신 대표! 그 양반이 아주 요물에다 복덩이에다! 혼자 다 한다니까!”
신 대표라면 멤버들도 아람에게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 대표님 작곡도 해요?!”
양상철은 보은의 재치가 재밌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신 대표한테 아는 작곡가 있냐고 넌지시 물었을 뿐인데, 한 달 만에 이런 곡을 가져다줬다니까?”
“와, 진짜 대단한 분이긴 하네요.”
“맞아. 아람 언니도 이번에 미국에서 그분이 거의 구해줬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럼! 그럼! 신 대표 없었으면 아람이 벌써 한국 왔을 거다.”
어쨌든 이제 아이들의 의견도 물었으니 양상철은 두 번째 빌보드 입성의 계획을 앞당기기로 했다.
“아람이한테도 전화하면서 들려줬더니 좋다고 하더라. 그럼 이거 바로 작사랑 안무 맡긴다. 알겠지?”
그린 애플은 드디어 다시 나가는구나.
실감 되는 듯 설레는 모습이었다.
“네에!”
그런데 양상철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왜 아이들은 세 명인데 말소리가 들려오는 건 두 명뿐인가.
“다별아. 너는 곡이 별로야?”
차가운 인상의 다별은 가만히 있으면 남들의 오해를 많이 받는다.
화가 난 줄 알고.
양상철의 물음에 다별은 그제야 표정이 조금 따뜻해졌다.
“아! 아니요! 너무 좋아서요! 그런데요. 대표님.”
“응? 우리 다별이 무슨 할 말 있어?”
다별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네. 이거 작사 제가 해보면 안 돼요?”
그 모습은 모두가 처음 보는 다별의 모습이었다.
*
“예. 양 대표님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어요. 타이틀까지는 아니어도 앨범에 수록될 것 같습니다. 다별이라는 친구가 직접 작사에 참여한다고도 들었고요.”
전화기 너머로 천상현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제게 감사할 일이 있습니까. 그럼 곧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천상현과의 통화를 짧게 마친 나는 앞에 주르륵 선 세 명을 보았다.
“다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 세 명은 나경과 이 과장, 전해성이었다.
이제는 마치 우리 회사 직원 같은 전해성이 내게 물었다.
“대표님은 정말 안 가시는 거예요?”
다녀오면 입사 제의라도 해야 하나 생각하며 씩 웃었다.
“예. 저는 세 분 믿습니다.”
이들은 오늘 시드니로 출국했다가 일주일 뒤 상하이로 가서 또 일주일을 보내고 오는 일정이었다.
약 이 주간의 일정이었으나.
두 나라에서 열리는 필름마켓 준비, 운영, 정리까지 각각 일주일 안에 해내고 와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셋 중에서 가장 씩씩한 건 역시 나경이었다.
“넵! 다 팔고 오겠습니다!”
믿음이 간다. 믿음이.
“예. 비행기 시간 늦겠습니다. 얼른 들어가 보세요.”
그렇게 씩씩한 나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과장과 전해성은 아직도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을 뒤돌아보더니 어느새 게이트 안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성과가 부족하더라도 오늘의 선택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은 또 성장해 올 것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최근 개인 차를 하나 뽑았는데, 그렇게 좋은 차는 아니고 국산 승용차였다.
어느새 바깥 공기가 뜨거워지고 있어 야외 주차장에 세워 둔 차 안은 후끈거렸다.
얼른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걸려는데.
지잉-.
지잉-.
전화가 왔다.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낑낑거리며 꺼내서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응?
그곳엔 실로 반가운 이름이 띄워져 있었다.
[허훈 감독]
<처절한 인생>의 시나리오 집필을 위해 제주도로 떠났던 허훈의 전화가 1년 3개월 만에 온 것이다.
기분 좋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바깥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 창을 등진 채 오롯이 한 가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바로 <처절한 인생>의 완고를 읽는 것.
오랜만에 들은 허훈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차분한 상태였다.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을 연출할 때 그의 이미지가 촐싹거리는 어린 청년의 느낌이 강했다면.
이제는 목소리에서부터 전생의 포스가 조금은 보였달까?
-대표님. 저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완고 터신 겁니까?
-예.
드디어 <처절한 인생>의 시나리오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나는 고생했다 전한 뒤 시나리오 파일을 보내 달라고 했고.
바로 사무실로 온 다음 출력부터 걸었다.
시나리오가 출력되는 동안에도 설렘을 주체하지 못해 복사기 근처에서 알짱거렸고.
그 모습을 본 박지연이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유구한 시간이 흐른 뒤 복사기는 마침내 내게 <처절한 인생>을 안겨줬다.
그래서 이렇게 밤이 될 때까지 시나리오를 읽었다.
읽었는데······.
전생에선 없던 몇 가지의 장면이 추가된데다가 뭔가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랐다.
그래도 이야기의 배경과 사건의 전개는 같았기에 별 상관은 없을 테지만.
다른 느낌을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이 시나리오는 전생에서의 <처절한 인생> 감독판 같은 느낌이었다.
괜찮으려나.
전생에서 <처절한 인생>은 개봉하자마자 단연코 그해 가장 주목받는 영화였고.
영화제 상을 싹쓸이했다.
순간 든 생각은 내 영향으로 미래가 바뀌었다면?
그 바뀐 미래가 전생보다 좋지 않다면?
이었는데, 금방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래 가지고 걱정할 시간 따윈 없었다.
그 미래는 내가 충분히 바꿀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 그렇게 할 거였으니까.
나는 핸드폰을 들어 <망자와 함께> 후반 이후 잠시 쉬고 있던 정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PD님?”
-아, 네. 대표님. 안 그래도 내일부터 출근할 생각이었는데 딱 전화를 주셨네요.
이 또한 타이밍이 맞았다니 다행이다.
“쉬라고 말씀드려놓고, 먼저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 작품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오! 정말요? 저는 너무 좋죠!
정 PD는 대단히 좋아했다.
-어떤 작품입니까?
“허훈 감독님이요.”
-제주도에서 드디어 연락이 온 겁니까?!
사무실 식구들도 나만큼이나 허훈의 작품을 기다려왔다.
“예. 그럼 내일 시나리오 보시고, 본격적으로 예산 짜기 전에 이야기 한번 나누시죠.”
그러나 정 PD는 성격이 급했다.
-아니요! 허훈 감독님 차기작이라면 참을 수 없죠! 지금 마침 사무실 근처라서 시나리오 받으러 가겠습니다. 저녁에 읽고, 내일 출근하자마자 바로 이야기하시죠.
어째 우리 회사 직원들은 다들 일에 중독된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기쁜 일이자 행복한 일이었다.
다음날.
“좋은 아침입니다!”
정 PD가 출근했다.
“대표님. 커피 드실래요?”
그는 쉬는 동안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몸이 더 커진 것 같았다.
“예. 좋습니다.”
그렇게 그는 커피 두 잔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자, 대표님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는 아아.”
머그잔을 내려놓은 뒤.
이번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시나리오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맨 앞장엔 <처절한 인생>이라고 적혀 있다.
나는 이 작품이 원래 알고 있던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떨지 궁금했다.
그 첫 타자가 정 PD였던 셈인데.
“다 읽어보셨어요?”
그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어떠셨어요?”
정 PD는 눈을 잠시 감더니 약간의 뜸을 들였다.
“어젯밤 진지하게 생각해봤는데요.”
그러다 눈을 번쩍! 뜨고는 자신의 한 줄 감상평을 내뱉었다.
“이거 나오면 한국에 누아르 붐 다시 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