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74화 (74/140)

#74화. 완전하게 다른 책임감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나간 뒤.

사무실에는 소피아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입맛이 없었다.

그저 책상 위에 A4 묶음을 들어서 유심히 볼 뿐이다.

[왕국 : 역병의 시작]

이라고 적힌 그 시나리오의 제목을 보고 있자니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제목의 밑으로는 한국 제작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라비안필름]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오로지 작품만을 생각하는 줄 알았던 이 제작사의 대표는 의외의 조건을 꺼냈다.

20%로 책정된 불문율과도 같은 수익 비율을 30%로 올려달라고 하질 않나.

2차 저작권을 줄 수 없다고 하질 않나.

당연히 이건 현재 컴플릭스에서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다.

더구나 그 이유를 묻자 그가 한 답변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저희가 30%로 올려드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까 말씀드렸지만, 이 시나리오를 집필하신 감독님은 현재 한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 조건을 요청한 건 그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흥행할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이 말을 듣고, 사기꾼인가 싶었다.

그런데 또 그런 이미지는 아니었다.

대표는 말끔하고, 젠틀했다.

젊은 나이였으나 사업을 오래 해온 사람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그 눈빛이 진실했다.

‘아차차. 그게 문제가 아니지. 지금.’

소피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돌려댔다.

대표의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그 조건을 위에 보고할 순 없었다.

아직 개봉하지도 않은 영화의 흥망을 판단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직 컴플릭스에선 한국과의 거래가 단, 한 건도 없었다.

위에선 한국을 미지의 나라라고 생각할 터.

무조건 반려될 게 뻔했다.

소피아는 너무 아쉬웠다.

‘이 좋은 시나리오를 그냥 이렇게 보내야 하는구나.’

그녀는 다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정말로 만에 하나.

<망자와 함께>라는 작품이 흥행하게 된다면.

그 조건을 위에 올려볼 수는 있을 텐데.

근데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꼭 흥행하면 좋겠어. 믿음이 가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그 젊은 대표의 말처럼 되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도 있었다.

소피아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때까지 시나리오를 잘 보관하는 것뿐.

그녀는 서랍에 그 A4 묶음을 소중히 넣었다.

당분간 마음을 끊어보자 다짐했으나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손님, 와인 더 드시겠습니까?”

한국말이 이렇게도 정답게 느껴지다니.

“예. 감사합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삐져나오지 않을 것 같은 단정한 머리의 승무원은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와인을 따라주고 갔다.

나는 다리를 한 번 쭈욱 뻗었다.

팔도 뻗어서는 기지개를 시원하게 켰다.

공항에서 한국행 티켓을 끊으려는데, 아흐마드에게서 막 연락이 왔다.

-끊어드린 비행기표가 취소되었더군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사정을 알리자 그는 내게 일등석 좌석을 다시 예매해주겠다더니 쿨하게 전화를 끊었다.

덕분에 현재는 아주 편한 자세로 비행 중이었다.

고작 일주일의 시간이었는데 왜 이리도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지.

소피아와의 미팅은 잘 마무리되었다.

비록 내 조건에 아주 많이 당황하는 눈치긴 했지만.

-아, 그렇군요. 처음 들어보는 파격적인 조건이라서 조금 당황스럽네요. 저 혼자 결정할 사항은 아니라 이건 다시 한번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말과 달리 당분간 연락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전생에서 컴플릭스는 팬층의 유무나 수상 실적 등으로 추가 지급 금액을 정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그 비율은 20~30%를 왔다 갔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설립 초창기.

소피아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니 아직 20%를 넘긴 작품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에겐 <망자와 함께>가 전 세계적으로 흥행할 거라는 조금 황당한 사실을 알렸는데.

내가 이런 헛물켜는 듯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건 시나리오와 우리 제작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컴플릭스 측은 당연히 내 조건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할 게 뻔하다.

하지만 내가 던져놓은 대로 <망자와 함께>가 전 세계적인 흥행을 일군다면 내 말의 가치는 달라진다.

지금의 나는 허세 가득한 사기꾼일지 몰라도 그때는 뱉은 말을 이뤄내는 신뢰도 높은 사업가로 이미지가 바뀌겠지.

또 컴플릭스도 내가 제안한 조건을 고려해볼 것이다.

처음엔 얼토당토않은 조건이라고 생각 들어도 신뢰가 생기면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만약 컴플릭스 측의 연락이 <망자와 함께> 개봉 후에 왔다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타이밍도 좋았다.

뭐가 됐든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 이제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

“신 대표님!!”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이던 <어울림> 현장을 찾았다.

고덕현은 잔뜩 할 말이 쌓였는지 내게 쿵쾅쿵쾅 걸어왔다.

“촬영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날이 이제 꽤 더워졌네요. 하하.”

그러나 그는 팔짱을 낀 채 나를 유심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이렇게 묻긴 했으나 그가 왜 이러는지는 알고 있었다.

“휴먼 드라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울림>은 ‘현서’와 동물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그린 휴먼 드라마가 맞다.

“그렇죠? 맞지 않습니까. 하하.”

어색한 내 웃음은 그에게 금방이고, 들켜버렸다.

“이게 어떻게 휴먼 드라마입니까?”

그가 손가락을 들어 곳곳을 가리키길래 쭈욱 둘러봤다.

오늘의 촬영은 전주 동물원.

호랑이 우리 앞에서의 촬영이었다.

당연히 동물원 특유의 냄새가 진동했고.

호랑이는 아무리 사육사가 유도해도 원하는 포즈를 취하지 않아 촬영이 딜레이 되고 있었으며.

이서아는 딜레이 된 틈을 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비눗방울 놀이 중이었다.

보통의 촬영장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대표님. 동물이 이렇게도 많이 나오는 영화인 줄 알았으면 하지 않았을 겁니다.”

천하에 고덕현이라도 동물과 아이는 다루기 힘들었나 보다.

그의 표정은 정말로 울적해 보였다.

하긴.

컨트롤하기 힘든 현장의 분위기가 오늘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래도 어쩌겠는가.

다음 영화는 아마도 액션일 것 같으니 그를 잘 구슬려야 했다.

“죄송합니다.”

내가 다짜고짜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그가 오히려 당황했다.

“아, 아니! 대표님이 이렇게 나오시면!”

“설명이 부족했던 제 탓입니다.”

“어이구! 이것 참! 무슨 말을 못 하겠습니다!”

그는 오히려 괜찮다는 말을 연신 하며 다음 장면 준비를 위해 떠났다.

그래도 정말 다들 많이 힘들어하는 눈치긴 했다.

동물원 촬영 끝나면 출장 뷔페라도 한번 부르든가 해야겠다.

근처에 있던 차 PD를 불렀다.

“PD님. 동물원 촬영 언제까지입니까?”

“한 달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그 뒤에 출장 뷔페 부를 수 있는 일정 봐주세요.”

차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촬영하면서 좀 힘드실 수도 있긴 한데······.”

“뭐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서영 감독님 차기작이 곧 들어갈 것 같아서요.”

컴플릭스에서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나 어차피 <망자와 함께> 개봉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전에 미리 예산을 짜두면 프리를 바로 들어갈 수 있으니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그렇습니까?”

“예. 그래서 구체적인 예산을 좀 짜야 할 것 같아요.”

어쩌면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었으나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저야. 좋습니다. 일은 안 끊기고 해야죠.”

역시 워커홀릭.

나는 그들에게 수많은 일을 물어다 줘야 하는 대표였다.

책임감이 막중했으나 신이 났다.

전생과는 완전하게 다른 책임감이었으니 말이다.

*

천상현은 옥상에 앉아 서울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맥주를 들이켜서인지 왠지 센치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걸그룹 노래를 만들려다 보니 영 뭐가 안 떠오르네.’

이주 전.

그는 신바드 대표에게서 그린 애플 신곡 의뢰를 받았다.

자신을 이 위치까지 올려다 준 은인과도 같은 사람의 부탁이었기에 제대로 된 곡을 만들어 보내주고 싶었다.

빌보드를 노린다고 하니 욕심나기도 했고.

그런데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한 번 푸욱 내쉬었는데 앞에 놓인 반짝이는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 다닐 때 80년대 팝을 진짜 좋아하긴 했는데.’

갑자기 든 생각에 그 시절 듣던 음악이 저절로 떠올랐다.

마돈나, 데이비드 보위, 컬처클럽, 올리비아 뉴튼 존 등등.

그 시대의 음악이 생각나는 건 그저 우연이었을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는 핸드폰을 꺼내 녹음 기능을 켰다.

레트로 감성. 펑키한 그루브. 통통 튀는. 전주만 들어도 몸이 흔들어지는.

온갖 키워드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 멜로디가 머리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흥얼거려졌다.

그 멜로디는 80년대 특유의 팝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오직 천상현만의 감각으로 재탄생된 그런 멜로디였다.

*

김 비서는 꽤 오랜 시간 배인규 회장 옆에서 그를 보좌했다.

20대 중반에 입사해 벌써 서른이 넘었으니 말이다.

그간 봐온 배인규 회장은 자신이 한 결정에 대해서는 절대 후회하는 법이 없었다.

김 비서에겐 그것이 그만의 책임감이자 고집으로 보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강단에 극도로 이성적이라 큰 목소리를 내면서 화를 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 그의 행동은 어딘가 이상했다.

“<투명한 사랑> 스코어가 몇이라고?”

“<혐오스런> 그 어쩌고 영화 몇 개국에서 팔렸다고 하던가?”

“<망자와 함께> 후반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부쩍 한 제작사 영화에 관심이 많아진 것이다.

덕분에 김 비서는 아라비안필름의 소식은 작은 것이라도 꿰고 있어야 했다.

배인규 회장은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걸 아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영 신경 쓰이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투명한 사랑>에 출연했던 아람이 할리우드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

또 하나는 아라비안필름에서 몇 개월 전 컴플릭스라는 외국 회사에 하나의 시나리오를 보냈다는 소식이었다.

배인규 회장은 말하지 않았으나 김 비서는 알 수 있었다.

그가 계속 신경 쓰던 건 아라비안필름에 주었던 <망자와 함께>의 해외 판권.

쿨하게 주긴 했는데 그 회사의 영화들이 성적이 좋으니 점점 불안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은 두 가지의 소식은 아라비안필름의 해외 진출에 불을 붙이는 것들뿐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망자와 함께>가 해외에서 어떤 유의미한 성적을 거둘지도 모를 일이다.

이걸 배인규 회장에게 보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김 비서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그때.

-김 비서. 잠깐 안으로 들어와 봐.

배인규 회장의 호출이었다.

“네. 회장님.”

그녀는 빠르게 대답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또 아라비안필름에 대한 질문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회사 요즘 준비하고 있는 영화 있다고 들었나?”

그 질문이었다.

이상하게도 배인규 회장은 아라비안필름을 아라비안필름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 회사’라고만 지칭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능력 있는 비서 소릴 들을 수 있었다.

“그게······. 돌고 있는 소문이 있긴 합니다.”

어쨌거나 배인규가 직접 물어본 이상 그녀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김 비서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소상히 보고했고.

배인규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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