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73화 (73/140)

#73화. 영화는 도박이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비행기 하나가 머리 위로 지나갔다.

아마도 양상철이 탄 비행기겠지.

일등석이 못내 아쉽긴 했지만, 컴플릭스에 비할 게 못 됐다.

<왕국 : 역병의 시작>의 시나리오를 보낸 지 약 7개월 만의 연락이었으니 말이다.

나경에게 지금 가까이에 있으니 빠른 미팅이 가능하냐는 내용의 답 메일을 보내달라고 한 뒤.

컴플릭스 본사가 있는 캘리포니아행 티켓을 끊었다.

비행까지 시간이 남아 답답한 공항을 잠시 나와 주변을 슬슬 걷기 시작했다.

<왕국 : 역병의 시작>의 예산은 우리 쪽에서 짜봤을 때 회당 25억이었다.

일반 드라마에 비교하면 약 6배가 높은 금액이었으나 시대극의 리얼한 좀비들을 표현하려면 이 정도는 적절한 금액이다.

남들은 아직 성장 중인 컴플릭스의 구조를 모를 테지만, 나는 전생에서 겪어 본 탓에 잘 알고 있었다.

컴플릭스는 우리나라 드라마와 시스템이 완전히 달랐다.

작가가 누구인지 우선시 되기보단 재밌는 스토리가 중요했고.

톱배우도 선호하지 않았다.

제작비를 지급하되 촬영 시 모든 권리는 제작사에게 일임했고.

모든 화가 사전제작되어 방송 2주 전 컴플릭스에서 전권을 구매한다.

제작비 대비 기본 20% 수준의 수익을 더 지급하고서 말이다.

전권을 구매한다는 말은 모든 권리와 저작권 등을 가지고 간다는 말이었다.

한 마디로 제작사는 그 영화를 온전히 파는 거다.

영화는 도박이다.

그래서 컴플릭스는 더 성장할 수 있었다.

전 세계 제작사들이 대박일지 쪽박일지 모르는 도박에 자신들의 운명을 거는 것보다 컴플릭스에 파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나도 연락이 오면 팔 생각이었다.

다만, 원하는 계약 방향이 있었기에 직접 만나서 미팅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시나리오 검토도 7개월이 걸린 그들이 과연 우리 답 메일에 얼마나 빠른 답을 줄 것인가다.

이륙을 위해 다시 공항으로 들어가기 전 한국에 있는 예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달칵-.

-여보세요?

“이사님.”

-응? 대표님 출발한 거 아니었어요?

“일이 아직 남아서요. 며칠 더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보다요.”

나는 그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다.

“저희 남양주 세트장 땅 찾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땅을 좀 찾아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땅? 뭐 또 지으시게요? 여기 아버님이 땅 필요하면 더 이야기하라고 했는데, 만 평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필요한 땅은 세트장을 지을 땅이 아니었다.

“그게 부지가 넓어야 합니다.”

-얼마나요?

“10만 평 이상이요.”

예정우는 깜짝 놀랐는지.

-뭐?! 그 넓은 땅을 사서 뭐 하게?! 아차! 요!

불쑥 반말이 튀어나왔다.

“그건 한국 가면 차근히 알려드릴게요. 서울은 그런 땅이 없을 테니 경기도 부근에서 찾아주세요.”

-우선 알겠어요. 아, 그리고 그 스쿠버 다이빙 동호회 사람들 엄청 많이 다녀갔어요. 일반인 쪽도 홍보 점점 많이 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요.

그래도 최세준이 쏠쏠하게 도움 되는 모양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아직은 존칭이 어색한 그와의 통화를 마친 나는 캘리포니아행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어제 새벽 3시까지 함자의 수다를 들어서 피곤했는지, 나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약 7시간 후.

미네타 산호세 국제 공항.

조금 우중충했던 뉴욕과 달리 캘리포니아는 약간 더운 듯한 느낌의 완연한 봄 날씨였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번엔 나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답 메일이 왔는지 물어보기 위함이었으나 역시 7시간 만의 답은 무리였나 보다.

저녁이 늦었기도 해서 오늘은 공항 근처에서 하루 묵기로 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뒷좌석에 앉아 바깥은 보니 밖은 이미 껌껌해 지형지물도 잘 보이지 않았다.

고된 일정인 만큼 얻어가는 것이 많으리라.

다짐하며 호텔로 향했다.

*

다음 날 아침.

오늘은 컴플릭스 본사 아시아 기획팀의 회의 날이었다.

회의는 주 1회로 매주 수요일마다 진행됐는데, 한 주간의 업무 보고와 다음 주 업무 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등을 공유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아시아 중에서도 동아시아 쪽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던 소피아는 출근하자마자 오후 2시에 있을 회의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한 통의 메일을 발견한다.

‘응? 답 메일을 어제 보낸 것 같은데?’

혹시 반송이라도 된 건가 싶어 메일을 클릭했다.

하지만 내용은 반송이 아닌 진짜로 한국에서 날아온 답신이었다.

‘이 사람들 생각은 하고 보낸 게 맞나?’

<왕국 : 역병의 시작>은 그녀에게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사실 한국은 동아시아 파트를 맡지 않았다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을 작은 나라였다.

마찬가지로 그 나라의 역사를 자신이 자세히 알고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6부작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소피아는 궁금했다.

도대체 이 나라는 뭘까?

구한말이라는 시대는 어떤 분위기였을까?

다행히 센스 있는 한국 제작사가 시나리오 뒤로 첨부해 둔 몇 장의 이미지 컷 덕분에 그 시대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고.

그 상상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컴플릭스가 추구하는 모토에도 부합한 드라마였다.

재미, 흥미, 즐거움.

전 세계인의 이 세 가지를 만족시키자.

자신들의 회사는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혁신적인 도전도 흔쾌히 받아들이는 기업이었다.

그에 따른 실패도 있었지만, 분명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 드라마는 위에 보고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오고 있었고.

그 때문에 위에서 검토하는 시간은 만만치 않게 오래 걸렸다.

무슨 작품이든 최소 6개월이었으니 <왕국 : 역병의 시작>은 그래도 빠른 컨펌을 받은 축이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답신이라니?

소피아는 입사 후 지금까지 다양한 나라의 사람이 쓴 시나리오를 검토해왔다.

그중에서 계약까지 한 경우도 다수였다.

‘당신의 작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메일을 보내면 상대방의 답이 다시 오는 경우는 못 해도 한 달 이상 걸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업무를 하루에 10시간씩 하지는 않을 테고, 주말에는 쉬어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제작사는 뭔가 달랐다.

하루 만에 답이 온 것은 물론이요.

메일 전문 곳곳에는 그들의 열정이 묻어있었다.

소피아는 혼란스러우면서도 감동이 밀려왔다.

이다지도 작품에 큰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만드는 <왕국 : 역병의 시작>의 완성품은 어떨까.

마침 대표가 미국에 와 있다니 이 무슨 우연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팅 정도는 한 번 해볼까?

마침 회의도 오늘이니 자신이 보고만 하면 미팅은 당장 내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마침내 결심을 마친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회의 준비를 차근차근 끝마쳤다.

*

오랜만에 느긋한 아침을 보내며 호텔 조식을 먹었다.

어차피 내가 할 거라곤 기다리는 일밖에 없었으니 방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다 늦은 오후 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간단히 햄버거를 먹고, 관광이나 해볼 요량으로 호텔 주변을 걸었는데.

좀 멀리까지 걷다 보니 큰 쇼핑몰이 보였다.

그곳에 들어가 늘어난 일정에 부족한 옷가지와 속옷을 사고, 밖으로 나와 또 걸었다.

그러다 긴 줄이 늘어선 곳이 있어 물었더니 그들은 웬 미스터리 하우스 관광을 위해 서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할 것도 없으니 한번 구경해볼까 싶어 1시간 코스로 예매하고, 집을 둘러봤다.

귀신이 실제로 목격됐다던데, 딱히 볼 건 없었다.

그 뒤로도 다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미술관도 구경하고, 나름 제대로 된 관광을 했다.

그렇게 내가 일하러 온 것인지 놀러 온 것인지 점차 헷갈릴 무렵.

전화가 왔다.

지잉-.

지잉-.

나경이다.

나는 그 전화를 반갑게 받았다.

“여보세요?”

-대표님! 연락 왔어요! 내일 당장 보고 싶다는데요?

됐다.

“정말요? 그럼 주소랑 시간 문자로 넣어줄래요?”

-넵! 알겠습니다!

“고생했어요. 나경 씨!”

잠시 후 나경의 문자가 도착했고.

나는 얼른 관광 모드에서 일 모드로 스위치를 옮겼다.

*

처음 만난 소피아의 분위기는 블랙 스튜디오의 제니퍼와는 사뭇 달랐다.

나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보는데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고.

뭔가 굉장히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었다.

“갑작스러운 미팅이었을 텐데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바드입니다.”

내가 먼저 소개하자 그녀도 자신을 소개했다.

“아닙니다. 좋은 시나리오에 열정까지 가득한 제작사와 일한다는 건 저로선 영광인 일입니다. 소피아예요.”

응? 좋은 시나리오는 알겠는데 열정이 가득하다는 건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반가움을 표현했고.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마침 근처에 계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한국까지는 꽤 거리가 먼 걸로 알고 있는데.”

정확히 캘리포니아에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걸로 했다.

“예. 딱 출국하려고 하는데 메일을 확인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죠.”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계속 웃었더니 입꼬리에 경련이 오려고 한다.

그래도 참고, 열심히 입꼬리를 올렸다.

“시나리오가 정말 흥미롭던데요? 작가님은 한국에 계신 건가요?”

“예. 지금 <망자와 함께>라는 영화를 연출하고, 후반 작업 중에 있습니다. 곧 개봉도 할 예정이고요.”

<망자와 함께>의 후반이 완료되면 또 국제 필름마켓에 팔러 돌아다녀야 한다.

이런 식으로 소문을 내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소피아는 내 말에 활짝 웃었다.

“그렇군요! 정말 기대돼요! 혹시 해외 판매도 계획하고 계시나요?”

“그럼요. 미국에서도 개봉하게 되면 꼭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듯 우리는 이야기를 예열시키며 점점 본론으로 접근했다.

“<왕국 : 역병의 시작>의 예산은 얼마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한 부당 약 250만 달러, 총 6부작이니 1,500만 달러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피아는 놀란 듯 물었다.

“오, 굉장히 합리적인 금액이네요? 사실 좀비가 출연하기도 하고, 주요 배경이 과거라 조금 더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영화의 제작비를 후려칠 생각은 없다.

“이 정도면 적당합니다.”

“대표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겠죠.”

그러더니 그녀는 컴플릭스의 시스템을 설명했다.

드라마가 완성되면 판권은 자신들의 것이며 대신, 제작비의 대략 20% 금액을 추가로 지급하게 된다는.

내가 뻔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제작비는 단계별로 사전 지급되며, 협찬은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중간광고가 없고-.”

우리 작품이 한국에서 진행되는 첫 작품이라서 그런지 소피아는 꼼꼼하고,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이상입니다. 혹시 궁금한 사항이나 원하는 조건이 더 있으십니까?”

이렇게까지 정성 들여 설명하는 걸 보니 그들은 어지간히 <왕국 : 역병의 시작>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있습니다.”

오늘의 미팅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

경련이 오던 입꼬리를 슬며시 내리고 진중한 표정으로 바꿨다.

소피아는 태도가 바뀐 내 모습에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어떤······?”

표정보다 더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우선 저희 영화는 20%의 추가 금액을 30%로 올려주세요. 또 영상으로 얻는 수익에 대해선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2차 저작권은 드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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