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선물 하나 줘?
휴게실에 마주 앉아 있던 제니퍼와 마크.
주변을 둘러보던 제니퍼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함자가 오는 이유를 아무도 모른다니 말이 돼?”
회사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그녀는 잔뜩 성이 난 상태였다.
어젯밤부터 블랙 스튜디오는 비상에 걸렸다.
함자의 전세기가 뜬 것과 더불어 그 옆에 꼭 붙어 다니는 비서 아흐마드의 미팅 신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왕세자가 그저 뉴욕 관광을 온 것은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당연히 위에선 <블랙 히어로즈>를 담당하던 모든 직원을 불러들여 머리를 싸맸으나 미팅의 이유를 아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몇 시간 후면 그들이 회사에 도착하는데도 말이다.
“뭐로 심기를 건드렸는지 알아야 대처를 하지.”
마크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내 가정인데 말이야.”
드디어 마크도 써먹을 때가 있는 것인가.
제니퍼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 어제 우리가 미팅했던 아람 쪽 때문이 아닐까?”
“뭐?”
너무 어이가 없는 가설에 제니퍼는 웃음이 나왔다.
“훗. 그래. 들어나 보자. 그들 때문에 함자가 왜?”
마크는 한없이 진지했다.
“우리가 그린 애플의 아람을 캐스팅한 건 그녀들의 빌보드 입성 때문이었잖아? 젊은 층 공략으로?”
제니퍼는 벌써 흥미가 뚝 떨어져 말해보라고 한 것을 후회했다.
“그런데?”
“함자도 그 젊은 층 중 하나였던 거지. 그리고 함자가 가장 좋아하는 멤버가 아람이었던 거고.”
거기까지 듣고, 제니퍼는 마크의 입을 막아버렸다.
“마크. 너 잠을 못 자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소설 쓰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너는 수면실 가서 좀 자는 게 좋겠다.”
일어서서 휙 가버리는 제니퍼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마크는 혼잣말을 속삭였다.
“대충 이런 그림이 맞는 것 같은데······.”
*
“왕세자님. 괜찮으십니까?”
“으응? 괜찮아. 괜찮아.”
우리는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걸어서 이동 중이었다.
블랙 스튜디오로 가는 중이었는데, 아흐마드가 준비한 고급 리무진이 옆에서 슬금슬금 따라오고 있었다.
이렇게 따라올 거면 그냥 함자는 리무진을 타고 먼저 가는 게 좋을 텐데, 그는 끝까지 타지 않았다.
아마도 아람의 옆에서 잠시라도 걷고 싶은 모양이다.
어젯밤.
아람은 왕세자 방에 잠시 찾아왔었다.
그 이유는 왕세자가 우리 편이 되어 줄 거라는 내 말 때문이었다.
문 앞에 선 그녀는 이미 한참을 뒤척이다 온 모습이었다.
-고마운 분에게 인사라도 해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음, 그래요.
안으로 들어온 아람은 함자에게 허리를 꾸벅 숙인 뒤 영어로 말했다.
-왕세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 계신 신바드 대표님께 들었는데, 갑작스레 이곳까지 와주신 건 모두 저 때문이라고······. 그래서 꼭 이렇게라도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당연히 함자는 그녀가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며 곧장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수줍게 말했다.
-저는 아람과 나란히 찍은 사진과 사인 한 장이면 됩니다. 혹시 가능합니까?
잠시였지만, 마치 단독 팬미팅과 같은 풍경이었다.
아흐마드는 언제 준비해 뒀는지 전문 사진사를 방으로 불렀고, 커다란 종이를 가져왔다.
그는 아람에게 종이를 내밀며 미안한 듯 말했다.
-액자에 넣어 걸어둘 예정이라서요. 큰 종이로 준비했습니다. 가능하신 만큼 크게 해주시면 정말로 감사하겠습니다.
-그럼요. 당연히 해드려야죠.
아람은 테이블 크기를 넘는 종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요리조리 왔다 갔다 하며 사인을 완성했다.
그녀는 사인까지 한 뒤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는데 함자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신바드?! 고맙습니다! 아람이 당신 때문에 내게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다고 했어요! 당신에게 항상 알라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혹시 오늘부터 제 친구가 되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는 흥분해서는 또 한참을 떠들었다.
나는 그 말에 계속 고개만 끄덕이다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아침을 먹으러 다시 만났을 때도, 거리를 걷고 있는 지금도 그의 입꼬리는 귀에 걸린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신바드. 잠은 잘 잤습니까?”
“아침은 어땠습니까? 나중에 두바이에 오신다면 제가 성심껏 대접하겠습니다.”
“혹시 커피는 어떤 종류를 좋아합니까?”
그는 걸어가면서도 내게 질문 폭탄을 던졌다.
어떻게 봐도 아람에게 묻지 못하는 걸 대신 푸는 거다.
“다 왔습니다.”
귀에서 피가 나오지는 않을까 싶던 차에 우리는 도착했고.
함자는 5분이란 시간이 너무 짧았는지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다.
어째 내 눈엔 근엄한 왕세자의 이미지가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BLACK STUDIO]
어제와 같은 장소, 시간이었으나 마음가짐은 달랐다.
뒤에 천군만마를 업고 있는 느낌이랄까.
블랙 스튜디오의 입구도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왕세자님.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제 만난 제니퍼와 마크라는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아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의 뒤로는 수십의 직원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중엔 입을 떠억 벌린 채 나를 보고 있는 제니퍼와 마크도 보였다.
그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자 둘의 낯빛이 왠지 푸른색이 돼가는 듯했다.
뒤에 있던 아흐마드가 내 옆에 섰다.
“예. 오랜만입니다. 마야.”
마야라고 불린 여자는 환하게 웃었다.
“그럼 들어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아흐마드는 마야의 손짓에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잠시만요. 어제 이분과 미팅했던 분과 같이 참석해주세요. 용건이 있습니다.”
마야가 나를 유심히 살폈다.
“죄송합니다. 제가 보고를 받은 게 없어서요. 혹시 어느 직원과 미팅을 하셨습니까?”
나는 슬쩍 시선을 옮겼다.
“저기 계시네요.”
제니퍼와 마크는 누가 봐도 자신들을 말하고 있다는 걸 동네방네 떠들기라도 하듯 화들짝 놀랐다.
여자의 미간이 찰나에 찌푸려졌다.
아마도 이들은 함자의 방문이 무엇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몰랐을 거다.
보고받은 게 없다는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제니퍼와 마크 때문에 이 사달이 난 줄 알았겠지.
그러나 마야는 프로였다.
곧바로 표정을 정돈하더니 답했다.
“알겠습니다. 미팅에 바로 참석하라고 전하죠. 그럼 준비해 둔 미팅룸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퍼플’을 구하러 다시 한번 적진으로 들어갔다.
전세는 완전히 뒤바뀐 상황이었다.
*
제니퍼는 아흐마드 옆에 있던 남자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분명 웃고 있었다.
마치 어제는 왜 그랬어?
라는 눈빛으로 말이다.
또 그가 자신과 마크를 꼭 집어 이야기한 덕분에 매니저로서는 드물게 투자자와 디렉터의 미팅에까지 참석하게 되었다.
디렉터 마야의 심기는 이미 우주로 날아간 지 오래였고.
미팅은 살얼음을 기는 분위기였다.
“저희 왕세자님께서 어젯밤 굉장히 불쾌한 연락을 받으셨습니다.”
<블랙 히어로즈>의 제작을 총괄하고 있던 마야는 아흐마드에게 온화한 말투로 답했다.
“저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셨습니까.”
“저 두 분이 ‘퍼플’ 역의 배우가 직접 요청한 사안을 반영할 수 없다. 라고 답했다더군요. 충분히 고려해야 할 사안이었는데도 말이죠?”
마야는 자신과 마크를 한 번 쳐다봤다.
아니, 정확히는 째려봤다.
다시 고개를 그들에게로 돌렸을 때는 온화한 얼굴이었다.
“그러셨군요. 그 사안은 저희가 다시 내부적으로 상의해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함자가 피식 웃었다.
“이 건을 당신들에게 상의하라고 뉴욕까지 직접 온 게 아닙니다.”
“네?”
마야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당황함이 역력했고.
함자의 근엄한 협박이 이어졌다.
“나는 지금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더니 그는 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손짓해 보였다.
그러자 얼른 아흐마드가 나섰다.
“이분들께 듣기로는 ‘퍼플’ 역으로 인종차별을 하셨다고요?”
“인종차별이라니요?”
제니퍼는 큰일이 난 것을 직감했다.
디렉터 마야는 ‘퍼플’ 역에 대한 생각이 자신과 완전히 같았다.
그랬기에 어제의 미팅을 보고하지 않은 것이다.
마야가 분명 이따위 쓸데없는 일을 왜 보고하냐고 할 게 뻔했으니까.
그런 것쯤은 아래서 쳐내는 것도 능력이라고 한 소리 들었을 게 뻔했으니까!
“아흐마드. 이제부턴 제가 이야기해도 될까요?”
갑자기 재수 없게 웃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아흐마드가 안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남자가 마야에게 물었다.
“정말로 보고를 받지 못하셨습니까?”
“정말입니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럼 다시 한번 정식으로 요청하겠습니다. ‘퍼플’ 역에 아람 씨에게 하려고 했던 분장은 하지 않는 걸로 해주세요. 찢어진 눈과 광대, 피부색까지 분장으로 만들어 가면서까지 촬영하는 건 저희 쪽에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제야 마야는 그들이 말하는 인종차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건 저희 쪽에서도 다 생각이-.”
그 모습을 보던 마크는 생각했다.
아마 마야는 제니퍼가 엊그제 했던 말을 고스란히 내뱉으려는 거겠지.
그러나 그녀는 말을 다 하지 못했다.
남자가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신다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투자 번복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제니퍼는 알 수 있었다.
저건 자신이 어제 그들에게 했던 협박과 같은 종류라는 것을.
갑의 위치가 철저히 바뀌었다는 것을.
마야를 보니 협박은 제대로 먹힌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저 마른침과 하고 싶던 말을 꿀꺽 삼킬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야의 마지막 말에 제니퍼는 고개를 떨궜다.
도대체 저 남자는 누구이길래 저런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자신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신이 그렇게도 좋아하던 뉴욕의 야경을 더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이 순간이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다.
*
3시간 뒤.
존 에프 케네디 국제 공항.
나와 양상철, 함자와 아흐마드는 배웅을 받고 있었다.
“다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꼭 열심히 해서 보답하겠습니다.”
아람은 연신 우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고.
양상철은 민동현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는 중이었다.
함자는 아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쭈뼛거리다가 괜히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신바드. 전용기로 직접 태워다 주고 싶은데 미안해. 바로 일정이 있어서. 대신 언제 한번 한국으로 놀러 갈 테니까 그때 보자고!”
우리는 정말로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 하나 줘?
“함자. 혹시 아람 씨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 전해줄게.”
그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 그럼······.”
함자는 부끄러운지 내게 속삭였다.
“혹시 메일 주소 좀 알려달라고 할 수 있을까? 가끔 편지 정도는 해도 되는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나는 뭐 전화번호라도 알려달라는 줄 알았네.
“그럼! 내가 물어서 문자로 보내줄게.”
아 참. 우리는 이미 번호를 교환했다.
“진짜지?! 약속했다! 신바드도 언제 두바이에 꼭 놀러 와. 알았지?”
“알겠다니까.”
이거 원.
약속해놓고 안 갔다가는 큰일이라도 나겠다.
두바이에 영화제가 있었나?
겸사겸사 한번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수속 절차를 밟았다.
함자는 아람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잠시 우울해하다가 메일 주소를 떠올렸는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신바드!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그는 다음을 기약하며 아흐마드와 먼저 떠났다.
양상철과 나는 시간이 조금 남아 의자에 앉아 아흐마드가 발행해주고 간 비행기표를 살폈다.
“대표님. 일등석 타보셨어요?”
“딱 한 번이요. 그것도 마일리지 싹 다 끌어모아서.”
“좋아요?”
“내리기 싫던데요? 허허!”
전생에서도 타보지 못한 일등석이라니.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던 그때.
지잉-.
지잉-.
전화가 왔다.
나경이다.
응? 지금 한국은 출근도 안 한 아침 시간일 텐데?
그만큼 급한 일이겠거니 싶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표님! 혹시 출발하셨어요?
출발했으면 전화를 못 받았겠지만.
그건 차치하고.
“아니요. 이제 곧 합니다.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컴플릭스에서 답변 메일이 왔어요! 미국 계신 김에 아예 만나고 오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바로 연락드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아, 이게 반가운 연락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