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머니 중에 제일
“왕세자님. 잠시만요.”
“응?”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흐마드는 왕세자인 자신의 사교 생활과 인맥에 가장 공들이고,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처럼 누군가와 안면을 트는 자리에서, 더구나 이야기 중에는 절대 끼어드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는 자신의 대화를 끊었다.
상대방이 최근 두바이 로봇 산업을 주도 중인 젊은 CEO인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이다.
그만큼 중요한 안건인 건가.
함자는 젊은 CEO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에요.”
“괜찮습니다. 왕세자님.”
다행히 그는 너그럽게 이해해주었다.
함자와 아흐마드는 급한 마음과는 달리 여유로운 몸짓으로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아흐마드. 무슨 일인데 그래? 혹시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아흐마드도 고민이 많았다.
과연 이 보고를 바로 해야 할 것인가.
파티라도 끝난 뒤에 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함자의 성격상 아람과 관련된 이 보고를 받은 즉시 하지 않는다면 중대한 처벌을 내릴 수도 있었다.
“한국, 아니, 뉴욕에서 연락이 한 통 왔습니다.”
“뉴욕?”
전 세계와 교류가 있긴 하지만, 뉴욕은 뜬금없었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그곳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처리 중인 업무가 있었다.
함자는 순식간에 눈빛이 돌변해서는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그래서? 아흐마드 빨리 이야기해봐.”
“예. 정확히는 유럽 필름마켓에 갔을 때 만났다고 말씀드린 아라비안필름의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라비안필름이라면.
자신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은 아람을 자신의 크디큰 전용 스크린에서 볼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영화 제작사였다.
“이름이 뭐였지? 신바드라고 하지 않았나?”
“예. 맞습니다.”
“혹시 아람과 관련된 연락이야?”
아흐마드는 즉각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왕세자는 공식 선상이 아닌 아흐마드 앞에선 항상 철부지 같았다.
그러나 그런 왕세자도 정말 가끔 투정이 아닌 분노의 단계를 보여주곤 했는데 지금 그의 표정이 1단계였기 때문이다.
“아흐마드. 이야기는 가면서 하자.”
“예?”
아흐마드는 혼란스러웠다.
어딜 간다는 건지.
이제 곧 퇴근 시간인데?
집에 맛있는 야식 사 들고 간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말이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왕세자님. 설마······?”
함자가 2단계 표정으로 바뀌며 근엄하게 명령했다.
“빨리 전세기 띄우지 않으면 당분간 퇴근은 없을 줄 알아.”
아흐마드는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고 있기에 섬뜩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곧바로 핸드폰을 들며 생각했다.
‘순탄하게 끝이 나긴······. 이럴 줄 알았다. 내가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나 봐라.’
*
아흐마드에게 전화한 지 1시간도 채 안 됐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그리고 그 답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지금 가고 있습니다. 아마 13시간 정도면 공항에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요. 도착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이 딱 점심시간인 12시이니 13시간 후면 새벽 1시쯤 도착한다는 말이다.
“하, 참나.”
황당하기가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언제까지 블랙 스튜디오 로비에서 아흐마드 연락을 기다릴 순 없으니 진즉 숙소로 돌아온 상태였다.
모두 내 방에 모여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얼굴의 양상철이 물었다.
“도움을 줄 수 있답니까?”
“그게······.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그냥 간략하게 설명해줘도 됩니다.”
얼른 말해보라는 안색이길래 정말로 간략하게 설명했다.
“두바이 미디어 시티를 운영 중인 두바이 왕세자가 지금 아람 씨를 위해서 뉴욕으로 날아오는 중이라고 하는군요.”
심각한 표정이던 아람과 민동현도 순식간에 으잉? 과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걸 모르겠다고 답했을 뿐이다.
“어쨌든 13시간 뒤에 도착한다고 하니까 우선은 기다려보죠. 아마도 밤샘 토론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으니 다들 쉬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그들은 영문을 모른 채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혼자 남은 나는 이런저런 가설을 세워보기 시작했다.
현재 상황을 보자면 아흐마드가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을 구매한 것도 그저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또 그가 왕세자의 대리인 자격으로 온 것이었을 테니 영화는 그의 의지로 산 게 아니라는 거겠지.
왕세자가 이 모든 일에 배후라는 것인데······.
그는 왜 이러는 걸까?
그게 의문이었다.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
<블랙 히어로즈>.
둘을 이어주는 건 아람밖에 없었다.
설마?
왕세자가 아람의 팬인 건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린 애플이 빌보드 30위 권까지 올라가면서 세계적인 인지도가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람의 탈퇴를 막고.
그린 애플이 빌보드에 입성하게 되면서 돌아온 굉장한 나비효과였다.
잘하면, 그는 우리에게 엄청난 인맥이 될 것이다.
머니 중에 제일이라는 오일 머니라니.
내 계획을 조금 더 앞당길 수도 있겠다.
입꼬리는 오랜만에 주체할 수 없이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것보다 반가운 연락은 이게 맞겠지?
*
성공한 뉴요커 제니퍼는 퇴근 후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와인을 홀짝이는 중이었다.
오피스텔 창밖으론 황홀한 뉴욕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워. 정말이지, 이 생활은 매일 해도 질리지 않는다니까.’
그녀는 유년기와 학창 시절을 플로리다 남중부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보냈다.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인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공부했다.
그렇게 원하는 대학의 입학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으며 원하는 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다.
처음 뉴욕으로 상경했을 때의 그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야경을 보며 다짐했다.
‘이제 나에겐 쭉쭉 올라갈 일만 남았어.’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던 그때.
지잉-.
지잉-.
나무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마크다.
마크와는 허물없는 동료였으나 가끔 이렇듯 퇴근 시간이 지난 뒤 전화가 와서 업무 이야기를 할 적이 있었다.
만약 오늘도 그런 것이라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여보세요?”
-제니퍼! 크, 큰일 났어!
마크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떠는 경우가 많았다.
“휴우. 마크. 업무 이야기라면 내일 출근해서 해줄래? 막말로 오늘 처리 안 한다고, 회사 잘리는 것도 아니잖아?”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는데 마크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왕세자 함자의 전세기가 떴대! 그가 뉴욕으로 날아오고 있다고!
함자는 두바이의 왕세자이자 <블랙 히어로즈>에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한 두바이 미디어 시티의 실질적인 경영자였다.
“뭐? 함자가 연락도 없이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다른 건 몰라도 우리 회사 누군가가 그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야. 어쨌든 지금 회사로 당장 튀어와!
뚝-.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제니퍼는 짜증이 났다.
도대체 어떤 머저리가 최대 투자자의 심기를 건드린 것일까.
어떤 실수를 하면 함자의 전용기까지 띄울 수 있는지, 정말로 생각이 없는 걸까.
혹시 마크의 장난은 아닐까, 잠깐 생각했으나 그와의 통화가 끊긴 지 3분도 안 되어 불이 나는 전화기를 보고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다지도 일 못 하는 직원들 때문에, 왜 자신이 고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툴툴대며 재출근을 위해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누군지 밝혀지기만 해봐라.”
쾅! 닫고 나간 문 뒤로는 뉴욕의 야경이 무수히 많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
“함자라고 합니다.”
왕세자는 능숙한 영어로 인사를 하며 양상철과 나, 민동현에게 손을 건넸다.
“예. 왕세자님. 처음 뵙겠습니다. 신바드라고 합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아흐마드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사람이 뭔가 어려울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그렇진 않았다.
아흐마드의 전화를 받은 지 정확히 13시간 후 그들의 전용기는 뉴욕 땅을 밟았고.
마중이고 뭐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곧장 우리가 묵는 호텔로 왔다.
지금은 그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 거실에 둘러앉아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아흐마드.”
“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흐마드와도 반가운 인사를 나눴는데 그의 덥수룩한 턱수염은 오늘도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그러게요. 정말 의외의 장소에서 뵙네요.”
밤이 늦었지만, 이 또한 새로운 인연이었기에 우리는 룸서비스를 시켜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함자의 요청으로 이 방에는 아람이 없었다.
“호, 혹시 아람도 지금 이 호텔에 머물고 있습니까?”
함자가 제일 처음 꺼낸 말은 말까지 더듬으며 물어온 아람의 소재였다.
역시 내 생각이 맞는 모양이다.
그런 함자에게 아흐마드가 잠깐 귓속말을 속삭였는데 내 눈엔 그게 체통을 지키라는 잔소리처럼 보였다.
“예. 맞습니다. 같이 자리하고, 싶어 했는데 불편하시다길래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
함자가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불편한 게 아니고, 제가 너무 부끄러워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오해는 하지 말아 줬으면 해요.”
그는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했다.
“당연합니다. 아람 씨에게도 잘 말해뒀습니다.”
“감사합니다. 자, 그럼.”
그의 눈빛이 돌연 변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오는 길에 아흐마드에게서 대충 들었지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서요.”
그의 질문에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없이 말이다.
온전히 사실만을.
이야기를 듣는 도중 함자의 분노 게이지는 점점 올라가는 듯 보였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람에게 분장을 하라고 했다는 말입니까? 그 아름다운 얼굴을 가리라고요?”
그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예. 맞습니다.”
“심지어 아람이 직접 이야기했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요? 그것도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함자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아흐마드는 안절부절못하는 몸짓이었다.
“왕세자님.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아니야. 이건 아흐마드 탓이 아니지.”
이번엔 함자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블랙 히어로즈>에 투자하기로 한 것은 아람이 출연한다는 걸 암암리에 알게 된 후입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투자가 결정된 뒤에 아람이 캐스팅된 줄 알았는데.
“그런데 투자 이유가 아람 때문이라고는 밝히지 않았어요. 이건 제 잘못입니다. 그걸 밝히게 되면 혹시 아람에게 곤란할 일이라도 생길까 봐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 함자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심각한 아람 덕후였던 것이다.
“왕세자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이지요.”
내 말에 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흐마드. 내일 미팅은 잡아뒀지?”
“예. 오면서 연락해뒀습니다.”
“내일 가서 사태를 바로잡겠습니다. 그러려고 온 것이고요.”
나는 빠른 대화를 따라오지 못한 양상철과 민동현에게도 그의 뜻을 전했다.
양상철은 왕세자에게 고개 숙여 감사함을 전했고.
“아이고, 감사합니다.”
모두의 얼굴에는 어제와는 사뭇 다른 든든함이 피어있었다.
그때.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응? 룸서비스 올 게 더 있었나?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나는 호텔 문에 달린 외시경을 통해 밖을 살폈다.
동그란 외시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아람이 쭈뼛거리며 서 있는 모습이었다.
“아람 씨?”
‘아람’이라는 단어를 들은 함자가 갑자기 기겁하기 시작했다.
“아, 아람?!”
아흐마드는 그런 그를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왕세자님! 체통을! 체통을 지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