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퍼플을 구하기 위한 히어로
다음날 양상철과 나는 눈 뜨자마자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아람, 민동현과 함께 거리를 나섰다.
“호텔에서 5분 거리인데, 걸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저는 괜찮습니다.”
“나도 괜찮네.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여길 걸어보겠는가.”
“저도요.”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치는 인파들과 빌딩 숲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람이는 같이 가지 않는 게 낫지 않겠어요? 신 대표?”
양상철의 의미는 제작사 측에서 이미 배우의 의사를 무시했는데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있냐는 말일 거다.
또 괜히 그녀가 험한 꼴을 보는 것이 싫어서 일 수도 있고.
하지만 나는 그녀가 꼭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렴 출연하는 배우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한번 말을 했기에 두 번은 더 신중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양상철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번엔 따라 걷고 있던 아람에게도 일러뒀다.
“아람 씨도 할리우드에서 이번 작품만 할 게 아니라면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거예요.”
나를 똑똑히 보고 있던 그녀의 눈빛은 독기가 서려 있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더니 양상철에게 똑 부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저 괜찮아요. 신 대표님 말씀대로 제가 출연하는 영화잖아요.”
그제야 양상철은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래. 알겠다. 다 컸네. 우리 아람이. 허허.”
잠시 걷다 보니 저 혼자 유독 우뚝 솟은 빌딩이 하나 보였다.
“저깁니다.”
“높기도 높네요.”
우리는 곧 그 앞에 멈췄고.
빌딩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BLACK STUDIO]
<블랙 히어로즈>의 제작사로 원래는 만화책을 만들던 회사였다.
그러다 수익을 더 얻기 위해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고.
그들만의 유니버스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최근 <블랙 히어로즈>를 제작하면서 무서운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나는 이게 시작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회귀할 무렵에는 감히 이렇듯 그들의 의사에 반발할 생각조차 못 할 회사로 크게 성장하니 말이다.
“들어가시죠. 미팅 약속은 미리 잡아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치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그곳으로 발을 디뎠다.
*
“뭐? 아람 소속사 대표?”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의 제니퍼가 놀란 표정으로 마크를 바라봤다.
“응. 어제 한국에서 입국했다더라고.”
“이게 대표가 미국까지 올 일인가? 그 사람들 그렇게 많이 한가하대?”
“한가해서 오겠어?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온 거겠지.”
“나는 도저히 어디가 중요한 부분이라는 건지 모르겠네.”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제니퍼. 너도 참. 그만해. 이건 엄연히 인종차별이라고.”
“이게 왜 인종차별이야? 동양인의 특징을 설정으로 준다는 거잖아. 관객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말이야.”
태연한 그녀의 태도에 마크는 질린 듯한 안색이었다.
“그게 선입견을 더 만든다는 걸 모른다니. 정말 너한테 실망할 것 같아.”
“네가 실망하든 나는 상관없어. <블랙 히어로즈>에서 ‘퍼플’은 그대로 가야 해. 인식도 천천히 바꿔야지. 한 번에 바꾸면 탈 난다니까?”
마크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단호했다.
“미팅은 같이 들어가. 너 혼자 보내면 이러다 매일 얼굴 볼 것 같으니까. 이런 건 확실하게 말해둬야 한다고.”
*
우리의 시작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퍼플’을 구하기 위한 히어로의 첫발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미국인이라고 하면 막연히 소통이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블랙 스튜디오에서 처음 마주한 제니퍼라는 담당자는 자신의 뚜렷한 입장을 정확히 밝혔다.
마치 우리 이야기는 애초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듯.
“죄송합니다. 이렇게 먼 길을 찾아와주셨는데 원하는 요청은 들어 드릴 수가 없네요.”
어젯밤 양상철은 내게 자신의 전권을 일임하기로 했다.
영어에 능숙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나를 믿어준 것이다.
“왜 무작정 들어 줄 수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지금 만들어진 ‘퍼플’의 이미지는 아시아인들이 거북하다고 느낄 게 분명합니다.”
제니퍼는 내뱉는 말과는 달리 온화한 표정이었다.
“그건 영화가 개봉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죠. 매력적인 ‘퍼플’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아시아인이기에 더욱더 ‘퍼플’의 캐릭터는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겁니다. 블랙 스튜디오 측은 왜 아시아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녀는 물러섬이 없었다.
“그 부분은 저희 제작사에서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회사까지 찾아오셔서 하는 요청치고는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람 씨는요?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건 배우입니다. 그래도 저희 요청이 과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제니퍼는 잠시 움찔하더니.
“그럼 출연을 번복하신다는 말입니까?”
협박을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마치 너 말고도 아시아인은 많아.
라고 들리는 건 왜일까.
치사하게 나오시네.
사실 어제 제작사 측에서 이렇게 나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주제의 이야기도 나눴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우선 우리는.
“아니요. 출연을 번복한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요청을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내 말에 제니퍼가 빙긋 웃었는데, 그 웃음은 승리자의 미소처럼 보였다.
“네. 그럼 미팅은 여기까지 하면 되겠네요. 아람 씨는 오늘 미시시피로 돌아간다고, 촬영팀에게도 전달해 놓겠습니다.”
아람은 그녀의 태도가 상당히 기분 나빴는지 폭발하려고 하는 걸 억누르는 모습이었다.
“아니요. 오늘은 안 갑니다. 출발할 때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우리는 미팅룸을 빠져나와 복도를 터덜터덜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람의 한숨 섞인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물러선 이유는 간단했다.
담당자가 이렇게까지 단호할 줄을 몰랐으나 어차피 한큐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줄 알았다.
오늘은 그저 우리의 강력한 의지를 내비치고자 온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을 찾기까지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기 위해서.
내가 믿고 있는 것은 역시 힌트였다.
[미국, 미디어 시티, 반가운 연락]
미국에 왔으니 미디어 시티를 찾거나 반가운 연락을 받으면 되는 건데.
아무리 검색해보고, 주변을 찾아봐도 미디어 시티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고, 반가운 연락은커녕 핸드폰도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힌트는 항상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길라잡이 역할을 해왔다.
그러니 나는 그 수수께끼를 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를 제외한 셋은 의기소침한 상태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신 대표. 누구 찾습니까?”
나는 양상철의 물음에도 블랙 스튜디오 곳곳을 유심히 둘러보느라 바빴다.
“아, 그건 아니고요. 혹시 도움 될 만한 게 있을까 싶어서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힌트의 방향을 알 수 있다.
뭐라도 걸려라 하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도중에도, 그 안에서도, 내려서도, 로비를 지나가면서도 시선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
“어?”
“왜요? 도움 될 만한 걸 찾은 겁니까?”
“흐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보고 있던 건 로비 한쪽 벽에 설치되어 있던 화질 좋은 전광판이었다.
그곳에는 한 잘생긴 아랍인이 들판에서 꽃향기를 맡는 모습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그 오른쪽 아래에는 광고 기업의 심벌과 이름이 이렇게 적혀 있었다.
[두바이 미디어 시티]
미디어 시티다.
힌트에서 말한 그 미디어 시티가 저것이라는 강력한 끌림이 왔다.
그런데 두바이라.
뭔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는데······.
민동현에게 물었다.
“동현 씨. <블랙 히어로즈> 투자를 어디에서 했는지 알고 계세요?”
“투자요? 두바이 쪽에서 많은 돈이 들어왔다고는 들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내가 보고 있던 전광판을 가리켰다.
“어! 맞아요! 저기였어요! 두바이 미디어 시티!”
민동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가지가 생각났다.
아흐마드가 두바이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영화를 큰돈에 수입해간 사람이니 못해도 미디어 시티와는 인연이 있을 것 같았다.
“찾은 것 같습니다!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빠르게 한쪽으로 가서는 한국에서 자고 있을 나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고.
-우움, 대표님?
“나경 씨. 정말 미안해요. 이쪽에서 급한 일이 좀 생겨서요.”
-급한 일이요?
주섬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그녀는 내 다급함에 정신을 차리려고 앉은 모양이었다.
“예. 혹시 베를린 영화제에서 아흐마드 기억하세요?”
-그럼요. 그분을 어떻게 잊겠어요.
“그분 연락처 문자로 보내줄 수 있어요?”
-으음. 잠시만요. 계약서 스캔 떠 놓으면서 포스트잇에 적어둔 연락처도 같이 떠 놨을 거예요.
역시 꼼꼼한 나경이다.
이 시간에 사무실까지 가야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스캔 파일을 다 가지고 있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찾았다!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대표님!
“예. 고마워요. 깨워서 미안해요!”
나경의 괜찮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고, 정확히 2분 뒤.
지잉-.
문자가 도착했다.
*
아흐마드는 유독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항상 보필하는 왕세자 함자이지만, 오늘따라 일정도 많았고.
무엇보다 그의 심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왕세자님. 곧 파티가 있을 예정입니다. 이동하시죠.”
“그거 꼭 가야 하나?”
왕세자 함자는 누가 봐도 투정 섞인 말투와 얼굴이었다.
“그럼요.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시려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두는 것부터 시작하셔야 합니다. 이번 파티는 꼭 알아두셔야 할 분들이 많이 참석합니다.”
단호한 아흐마드의 태도에 함자는 못 이긴 척 식탁에서 일어났다.
“저녁 먹고는 아람의 무대 영상 찾아보는 게 유일한 낙인데, 파티 따위는 가기 싫단 말이야. 아흐마드. 다음부터 저녁 일정은 웬만하면 빼줘.”
다행히 오늘은 가겠다는 말이다.
“예. 왕세자님.”
그렇게 그들은 차를 타고 어느 대저택으로 향했고.
함자는 투덜대던 것과 달리 사람들과 곧잘 어울렸다.
물론 아흐마드가 옆에 딱 붙어 저 사람은 어떤 기업의 아들이고, 저 사람은 한 제약회사의 임원이고.
등등을 귓속말로 상세히 알려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이제는 함자 혼자서도 제법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아흐마드는 그들이 조금 더 친밀해질 수 있도록 한 발치 떨어져서 관망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순탄하게 끝이 날 것 같았다.
‘아차, 이런 생각을 하면 꼭 무슨 일이 생기던데.’
괜한 생각을 했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든 아흐마드였으나 얼른 파티장을 빠져나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비서장님. 급하게 찾는 전화가 왔습니다.
“나를요? 누가요?”
-유럽 필름마켓에서 영화를 팔았던 신바드 대표라고 하면 알 거라고 했습니다.
신바드 대표라면 당연히 잊을 수가 없었다.
필름마켓이라는 색다른 경험과 맞물려 그의 첫인상은 굉장히 좋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좋은 거래를 하기도 했고.
“그분이 절 찾았다고요?”
-네. 연결해 드릴까요?
가만 보니 그는 아람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혹시 그녀와 관련된 일일까?
아흐마드는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 바로 연결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