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새로운 퍼플
최세준의 전화는 다행히 긍정적인 내용이었다.
YJ E&M 쪽에서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대신 아라비안필름만의 특별한 조건이니 비밀을 유지해달라는 항목이 추가될 거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신이 난 목소리로 덧붙였다.
-대표님! 저 이번 주에 회원들이랑 남양주 가려고 예약했습니다! 예약받으시는 분이 아주 친절하시던데요? 할인을 꽤 많이 해주셨어요!
예정우에게 혹시라도 최세준의 전화가 오면 그렇게 해주라고 미리 말해뒀다.
홍보도 좋지만.
괜히 이걸로 책잡힐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펼친 <신바드의 모험>에는 힌트가 올라와 있었다.
[미국, 미디어 시티, 반가운 연락]
이제 완연한 봄이었지만, 열어둔 창문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어째 분위기가 오싹해졌다.
반가운 연락이 맞는 거겠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어느새 <어울림>의 크랭크 인이 이틀 뒤로 다가왔고.
첫날이기도 하니 그날은 현장에 가보려고 했다.
양상철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여보세요?”
-오, 신 대표! 잘 지냅니까?
“그럼요. 대표님은요? 잘 지내시죠? 연락 자주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신 대표 정신없이 바쁜 거야, 이쪽 업계에 발만 담그고 있어도 다 아는 사실인데요.
“그럴 게 아니고,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에이, 괜찮다고 해도 그러네요. 그냥 이번에 들어가는 새 작품 무탈하게 잘 끝내고 오라고 안부 차 전화한 겁니다. 자꾸 그렇게 불편하게 하면 맘 놓고 전화도 못 하지 않습니까. 허허!
그의 말에 괜히 웃음이 났다.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나야 뭐, 그린 애플 애들 신곡 준비 중인데, 이게 영 마음에 드는 곡이 없네요.
“그러세요? 주변에서 곡 좀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래도 빌보드 입성했는데.”
-곡은 아주 많이 들어옵니다. 근데 말했잖습니까. 마음에 드는 곡이 없다고. 뭔가 딱 느낌이 오는 게 없어요. 상위권 노리려면 웬만한 곡 가지고는 안될 것도 같고.
전생에선 그린 애플이 빌보드 상위권까지 올라가 본 적 없기에 이건 나도 조언을 해줄 수가 없었다.
-혹시 신 대표 주변에 작곡하는 사람 없습니까?
날고 기는 작곡가들 노래가 다 들어왔을 텐데, 내 주변에 작곡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의 마음에 들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한 명을 꼽자면······.
천상현인데.
생각해보니 전생에서 가끔 가수들한테도 곡을 줬던 거 같긴 하다.
“한 명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물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상철은 반가운 기색이었다.
-그래요? 내가 또 우리 신 대표가 추천하는 사람이라면 팔 벌려 환영이지요!
“영화도 원래 기대 안 하고 봐야 재밌는 겁니다.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고요.”
내 말에도 그는 웃기 바빴다.
-알겠어요. 허허.
“아람 씨는 촬영 중입니까?”
아람이 맡게 될 ‘퍼플’ 역에 대해선 기대가 컸다.
사실 전생에서 ‘퍼플’은 할리우드에서 그리는 전형적이고, 장식적인 아시아인의 모습이었다.
일단 캐스팅된 중국인의 외모부터가 그랬다.
약간은 긴 눈매와 발달한 광대, 거기에 서양인들이 절대 잃지 못하는 브릿지까지.
또 극 중 설정은 천재 해커이자 무술에 능한 아시아인이었다.
‘퍼플’은 해커일 때는 꼭 안경을 착용했고.
중국 무술로 악당들과 싸울 때는 안경을 벗었다.
그 때문에, 한때 국내에서는 안경이 깨질까 봐 시력을 포기하는 거냐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이렇듯 <블랙 히어로즈>는 흥행 성적으로만 봤을 땐 전 세계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으나 ‘퍼플’ 캐릭터는 욕을 많이 먹었다.
특히 아시아인들의 심한 반발이 있었고, 자국인 중국에서까지 나라 망신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말 다 했다.
그런데 아람은 전생에서의 중국 배우와 이미지가 아예 딴판이었다.
눈은 서양인들보다 컸으면 컸지, 절대 작다고 할 수 없었고.
새하얀 피부,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가 있는 이목구비 등등 아람이 ‘퍼플’을 맡게 되면 전생에서의 ‘퍼플’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당연히 나는 제작진이 방향을 그쪽으로 바꾼 줄 알았다.
새로운 ‘퍼플’이 탄생하는 줄 알았으나······.
-영화 촬영은 시작했는데 아직 아람이 분량 찍으려면 조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때문에 골치가 아파요.
양상철의 목소리가 쑤욱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아람이가 촬영이고 뭐고, 안 하겠답니다.
음,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예? 뭐 때문에요?”
-제작사 쪽에서 요구하는 설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는 절대 못 하겠대요. 가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야 할 것 같아서 내일 출국합니다. 미국 가면 신 대표한테 전화 한 통 못할 테니 미리 한 거고요.
대충 예상이 가는 시나리오였다.
제작사는 분명 아람에게 전생과 같은 ‘퍼플’을 강요하고 있겠지.
도대체 이럴 거면, 아람을 왜 뽑았는지 참.
“가서 아람 씨 설득하시려고요?”
-그래야지, 어떡하겠습니까. 한국도 그렇지만, 신인 배우들이 힘이 있습니까.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배우는 말 할 것도 없지요.
그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굽히고 들어가기엔, 이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들의 뜻대로 촬영했다간 아람의 이미지가 나빠질 수도 있었다.
심하면 전생에서처럼 나라 망신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공격받겠지.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양상철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을뿐더러 말한다고 해서 그가 미국 제작사랑 제대로 된 담판을 지을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그 말대로 우리는 힘이 없으니까.
그때.
문득 최근 <신바드의 모험>에 올라온 힌트가 떠올랐다.
[미국, 미디어 시티, 반가운 연락]
“양 대표님.”
-응? 아이고, 내가 괜한 근심을 줬네요. 우리 애들 제일 신경 써주는 사람이 신 대표인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가서 잘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아니요. 그게 아니고.”
양상철은 의아한 목소리였다.
-근데 왜 그렇게 목소리가 침울해졌습니까?
이건 내가 가서 도움을 줘야 한다.
양상철이 못하는 걸 내가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들 하지 않나.
시나리오 북이 원하는 방향도 이쪽인 것 같고.
“비행기표 몇 시겁니까?”
미국도 주마다 비행시간이 다 다를 텐데, 얼마나 가야 하려나.
그렇게 나는 아주 당황스러운 일정으로 미국을 가게 되었다.
아, 출국하기 전 천상현에게 연락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신 대표!”
오랜만에 만난 양상철을 인천공항에서 보니 더욱 색달랐다.
그는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았고, 내가 꾸벅 인사를 하자 갑자기 걱정스러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근데 정말로 같이 가도 괜찮겠어요? 나야 같이 가면 너무 좋지만, 촬영이 내일인데 갑자기 미국을 따라가겠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그럴 만도 하다.
양상철에겐 지금 이 상황이 뜬금없게만 느껴지겠지.
“괜찮습니다. 저 있다고 촬영 더 잘 되는 것도 아니에요. 다들 각자 잘해주고 있어서 평소에는 오히려 제가 가면 방해만 됩니다. 또 노흥기 감독님이 지휘하는 현장인데, 걱정할 게 뭐가 있습니다.”
그래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 얼굴이길래 출국하기 전에 김치찌개라도 먹자며 재촉했다.
그렇게 우리는 제작사가 있는 뉴욕으로 장장 14시간의 비행을 시작했다.
전날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잠을 못 잔 탓인지.
같이 가는 것이 미안하다며, 화분 엔터에서 끊어준 비즈니스 좌석 때문인지.
꿀잠을 잤다.
비행기에서 내려 서둘러 짐을 찾아 나간 곳에는 아람과 그녀와 같이 미국 생활을 하고 있던 화분 엔터 소속 팀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람아!”
“대표님!”
타지 생활이 고달팠는지 아람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삐쩍 말라 있었다.
“아이고. 밥 잘 먹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이렇게 말랐어!”
“입맛이 통 없어서요. 최대한 많이 먹고 있어요.”
“그래도 그렇지! 안 되겠다. 오늘 외식하자! 외식!”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버지인 줄 착각할 만한 양상철과의 상봉이 이어졌고.
그녀는 내게도 꾸벅 인사했다.
“신 대표님. 오신다는 말씀 듣고 정말 놀랐어요.”
“겸사겸사 왔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여기 있으면서 <투명한 사랑> 촬영할 때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제작사에서 어지간히도 괴롭혔는지 그녀는 말을 하면서 힘이 없어 축 늘어져 있었다.
옆에 있던 남자가 우리의 짐을 받아 들었다.
“피곤하실 텐데 일단 숙소로 바로 가시죠. 외식도 짐은 풀고 하셔야죠. 대표님.”
이 사람이 아마도 양상철이 믿고 보낸 사람인가 보다.
우직하니 사람이 영 괜찮아 보였다.
양상철은 그의 말에 허허 웃었다.
“그래그래!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오늘은 맛있는 거 먹고, 풀자! 풀어!”
우리는 남자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뉴욕 중심가의 한 호텔에 체크인한 뒤 다 같이 근처 식당으로 이동했다.
“근데 아람이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되나?”
양상철의 말에 아람은 쓰고 있던 모자를 푹 눌러썼다.
“괜찮아요. 사람들이 어디 가서 제가 직접 노래 부르지 않는 이상 모르더라고요. 무대 메이크업이 좀 진하잖아요.”
그렇게 화분 엔터 식구들까지 총 7명의 인원이 우르르 식당으로 들어갔고.
주문을 마친 뒤 공항에서 미처 다 풀지 못한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근데 촬영지가 뉴욕입니까?”
내 물음에 아까 우리의 짐을 받던 남자가 답했다.
중간에 양상철의 짧은 소개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민동현이라고 했다.
“아니요. <블랙 히어로즈> 주 촬영지가 미시시피라 그쪽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미시시피라면 꽤 멀 텐데요.”
민동현이 살짝 웃어 보였다.
“차로 17시간 걸렸습니다.”
아, 그래서 이렇게도 피곤해 보였던 거구나.
17시간 운전이라니 그에게 눈빛으로 경의를 표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오자 다들 하던 말을 멈추고, 허기부터 채웠다.
그렇게 모두의 허기가 기분 좋을 만큼 찼을 무렵.
양상철이 조심히 아람에게 물었다.
“아람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람을 설득하지 못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제작사를 찾아가야 하니 양상철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아람은 그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 죄송해요. 대표님. 좋은 기회인 건 아는데. 요구하는 게 너무 터무니가 없잖아요.”
그녀는 참아왔던 응어리를 터뜨렸다.
“역할 명이 ‘퍼플’이니까 보라색 브릿지? 캐릭터 중 저만 있는 설정이지만, 괜찮았어요. 그런데 분장으로 눈을 찢고, 광대를 붙이겠대요. 피부색까지 톤을 낮추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녀의 말은 우리를 광분시키기 충분했다.
“뭐?!”
“뭐라고요?”
저렇게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을 거면 굳이 아람을 캐스팅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린 애플이 그래도 요즘 젊은 층 사이에서 화제가 되어서 캐스팅한 건가.
싶다가도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민동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도 이건 진짜 아닌 거 같아서 강하게 요청했는데 씨알도 안 먹혀요.”
양상철은 화가 났는지 분노했다.
“이놈들을! 내가 가서 엎어놓든가 해야지!”
그를 진정시켜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나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그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어쨌든 미국 제작사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우리 쪽에선 차라리 촬영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우선 내일 제작사와 이야기를 해보죠. 대표님.”
그렇게 우리는 독기를 품은 채 다음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