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68화 (68/140)

#68화. 물독에 실금

“조건? 무슨 조건?”

팀장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최세준은 질책받을 각오를 하고, 입을 열었다.

“그게, 배급수수료에서 1%를 빼달라는······.”

보고를 받던 팀장의 표정이 구겨졌다.

“뭐? 1%? 아니, 최 과장아. 내가 너 거기 대표 살살 어르고, 달래서 배급받아 오랬지. 누가 수수료 빼 오라디? 이럴 거면 법카는 왜 받아 간 거야!”

결국 큰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최세준도 어쩔 수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금까지의 정으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않은가.

하물며 그 상대가 캐리 엔터테인먼트라는데.

신바드는 캐리 엔터에서 제시한 조건을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배급수수료 1% 삭감 정도면 <어울림>의 배급사를 YJ E&M으로 결정하는데 큰 지장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니, 회사에 보고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그래도 캐리 엔터에서 가지고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이 자식이! 말이나 못 하면!”

팀장은 항상 최세준의 공은 자신의 것이요, 실은 온전히 부하직원의 몫이었다.

“팀장님. 1%면 큰 비율도 아닙니다. 신바드 대표가 그렇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 게 아니에요. 어차피 수익은 극장 비율 높여서 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배급수수료 10%는 관례처럼 내려오긴 했으나 상황에 따라서 8~12%까지도 오르락내리락했었다.

그러니 신바드의 조건은 상식선이 맞았다.

또 YJ E&M이 배급을 진행하면 자신들이 운영하는 극장 프랜차이즈인 JYV에도 영화가 걸리게 된다.

최세준의 말은 그 스크린 비율을 높이면 된다는 말이었다.

“그걸 누가 몰라? 제작사 요청 들어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고! 너 그 제작사랑 이번만 일할 거야?!”

그럼 자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건가.

최세준도, 팀장도 답답했다.

팀장은 생각했다.

지금까지 봐 온 최세준은 절대 뒷돈 받고 할 성정이 못됐다.

그러니 저 조건은 그 대표라는 놈이 직접 회사 쪽으로 제안한 게 맞을 터인데, 이상한 건 대표의 태도다.

자고로 투자배급사와 영화사의 관계는.

대표든 막내든 자신들의 말이라면 설설 기면서 껌뻑 죽는시늉까지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놈은 저번엔 도건우를 이용해 해외 판권을 넘겨달라고 하질 않나.

이번엔 국내 배급수수료까지 내려달라는 게 너무 어이가 없었다.

더 미치고 팔짝 뛰는 건.

들어줄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는 거다.

차라리 극장 비율을 낮춰 달라고 했으면, 댈 핑계라도 있었다.

50%의 극장 비율은 기업 간의 암묵적 약속 같은 것이었기에 우리 쪽에서 함부로 내리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그 대표가 고작 배급수수료 1%를 내려 얻는 이익을 모르겠으니 그냥 당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휴우. 근데 너 눈탱이는 왜 그렇게 됐냐? 누구한테 맞았어?”

“눈병입니다.”

“눈병은 지랄. 어쨌든 위에는 그렇게 결재 올릴 테니까. 알고 있어. 그리고 최 과장 너, 이번만 넘어가는 거야. 다음 작품 들어갈 때는 어떻게든 구슬려서 꽉 잡아 와. 네가 주도권을 잡으란 말이야.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팀장실을 빠져나온 최세준.

‘휴우. 정신 차리자. 진작 신경 썼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천천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면서 그는 생각에 빠졌다.

‘역시 그걸 해야겠다.’

자고로 사람을 구슬릴 때는 그 방법이 최고다.

비즈니스를 떠나서 내가 뭔가를 하나 주면 상대방도 뭔가를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또 이렇게 되면 개인적인 친분까지 깊게 생기게 되니 일석이조다.

생각을 끝낸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달칵-.

-여보세요?

“회장님! 저 최세준입니다!”

-아, 예! 부회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주말도 아닌 평일 낮 시간엔 무슨 일로······?

“다른 게 아니고, 저희 다음 정기모임 말입니다. 남양주에 새로 생긴 곳이 있다고 해서요. 어떻습니까? 한번 가보시는 게?”

-오, 그래요? 항상 가던 곳이 너무 낡아서 회원들 불만이 슬슬 나오던 참이었는데, 직접 가보신 겁니까?

최세준은 방긋 웃으며 상대방에게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

“감독님! 서아 왔어요!”

이서아가 개인 리딩을 위해 강주리와 함께 사무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대표님도 잘 지내셨어요?”

“예. 어머님. 혹시 잠깐 이야기 괜찮으십니까? 여쭤볼 게 있어서요.”

이서아는 친화력 좋은 나경이 놀아주기로 하고.

강주리는 노흥기와 함께 내 방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앉자 그녀가 궁금한 듯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예. 우선 어머님이랑 먼저 상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것은 이서아의 캐스팅 초반 단계부터 걱정하고 있었던 ‘현서’ 역의 이미지 방향 때문이었다.

“신 대표가 아이디어를 낸 건데 저도 이쪽으로 잡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노흥기의 말에 강주리가 미소 지었다.

“무슨 컨셉이길래, 그러세요? 이렇게 뜸 들이시니 조금 무섭기도 하네요.”

“전혀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필요는 없고요. 저희는 서아가 싫다고 하면 시나리오를 다시 바꿀 의향도 있습니다.”

강주리가 사뭇 진지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나는 <어울림>의 ‘현서’를 어떤 캐릭터로 잡아갈 것인지부터 설명했다.

“현서는 원작에서 소년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리메이크작에선 중성적인 캐릭터로 갈 겁니다. 소년, 소녀 구분하지 않고요.”

“구분하지 않는다고요?”

“예. 의상과 분장에서도 나타낼 테지만, 저희는 서아가 머리카락을 잘랐으면 합니다.”

지금 이서아는 검은색의 긴 생머리였다.

짧은 커트까진 아니어도 그 머리로는 중성적인 분위기를 내기가 힘들었다.

이건 노흥기도 공감한 터.

만약 이서아가 머리를 자르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시나리오는 원안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내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강주리가 입을 열었다.

“으응? 혹시 그게 끝이에요?”

색다른 반응이었다.

“예?”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거라면 서아는 오히려 좋아할 거예요. 사실 지금 머리를 불편해하거든요. 기르던 이유는 들어오는 대부분 작품에서 저렇게 기른 모습을 원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작품 없을 때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유지하고 있는 거고요.”

어렵다고 생각한 문제가 순식간에 풀렸다.

“그럼 서아한테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진행하죠.”

사무실에서 놀고 있던 이서아는 다행히도 좋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와! 엄마! 나 이제 그럼 머리 자를 수 있는 거예요?!”

아이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곧바로 노흥기와 이서아의 리딩이 순조롭게 시작되고,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이틀 전 최세준과의 식사 자리에서 나는 배급수수료 1%를 삭감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사실 10%에서 9%로 줄인 목적은 배분되는 수익 때문이 아니었다.

1%의 금액은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으로 따져보면 1억 5천만 원 정도였는데.

그 영화로 총 150억의 수익을 올린 것에 비하면 굳이 가져가야 하나 싶은 정도로 적은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조건을 꼭 제안해야만 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마인드도 좋았으나 그것보단 거대한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2대 극장 프랜차이즈가 있다.

바로 JYV와 캐리 시네마.

각각 YJ E&M과 캐리 엔터테인먼트에서 쾌적한 시설과 서비스를 추구하며 운영하는 극장 브랜드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한 가지 바꾸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극장에서 가지고 가는 수익의 배분 비율.

극장은 관람료의 절반을 가져간다.

영화표가 1인 기준 8,000원이라고 한다면 3%의 영화 발전 기금과 10%의 부가가치세를 떼고도 3,480원을 가져가는 것이다.

이걸 200만, 300만, 400만으로 따지고 보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극장은 영화에 투자한 것도, 제작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든 나는 이 비율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표준근로계약만으로 촬영 현장이 완전히 개선된다고는 할 수 없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조금씩 풀어나가야 결국엔 모든 매듭이 풀린다.

영화가 흥행할수록 투자, 제작사가 더 많은 수익을 가져가야만 그 돈이 현장 스태프들한테까지 돌아간다.

물론 개중엔 중간에서 꿀꺽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테지만, 우선 개선부터 해나가야 했다.

하지만 대기업인 그들에게 무턱대고 처음부터 극장 수수료를 내려달라 덤벼들 수는 없었다.

최세준 과장이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준 것은 아라비안필름 영화가 최근 좋은 성적을 냈기에 가능했던 거지.

작은 영화사들은 그저 자신들의 영화를 걸어주는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여길 것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고작 <어울림>의 배급수수료 1%로 영화계가 단숨에 바뀌진 않을 테지만, 시작은 될 수 있었다.

이 1%가 분명 물독에 실금 정도는 낼 수 있을 것이다.

*

4월 말이 되었고.

<어울림>의 준비는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메인 장소로 여러 걱정이 많았던 동물원은 전주로 픽스했고.

그곳 동물들이 직접 출연하는 거로 동물원 측과 합의를 본 뒤 옆에서 관리해 줄 사육사 섭외까지 완료했다.

동물원은 주말에 관람객들이 가장 많았고.

평일이라 하더라도 촬영 때문에, 그 넓은 공간을 아예 폐쇄할 수는 없었다.

하여 구역을 정확히 나눠 평일에만 촬영하기로 결정됐다.

또 촬영 시에는 미리 사이트와 매표소에 공고해 관람객에게 양해를 구하는 걸로 말을 맞췄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번 <어울림>의 촬영 스태프들은 주말에 쉬는 조금은 특별한 팀이 되었다.

이것만으로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극 중 현서(이서아)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할 동물을 섭외해야 했는데.

그 동물은 동물원에 사는 길고양이로 CG 작업을 할 예정이었으나 실물이 꼭 필요했다.

더구나 현장에선 어떻게 될지 모르니 꼭 닮은 고양이로 3마리나 섭외해야 했다.

이렇게 해놔야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바로 대타를 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훈련받은 고양이를 찾았지만, 찾기가 힘들었다.

나도 영화를 준비하면서 알았는데, 일반인이 고양이를 전문적으로 훈련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우선 고양이를 섭외한 다음 전문가에게 촬영 전까지 교육받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지급되는 고양이 출연료는 별도였고, 전문가의 교육비도 우리가 지출했다.

그리고······.

“우리 라운이가요. 요새 있잖습니까?! 말을 알아들어요!”

노흥기의 반려묘 라운이가 그 3명 중에 발탁(?)되어 한창 훈련 중이었다.

발탁이라기보다는 노흥기의 입김이 셌지만.

보통 동물 출연자들은 스태프들의 반려동물을 데려오기도 하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전문 동물 업체를 통하지 않으면 섭외가 힘들기 때문이다.

뭐, 주연배우인 이서아와 라운이가 서로 죽이 잘 맞았으니 이상적인 캐스팅이었다.

알고 보니 라운이는 실제로 노흥기가 집 주변에서 3일간 떨고 있던 새끼 고양이를 관찰하다가 데리고 온 아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노흥기는 영화 연출에 대한 기대감도 상당했으나 라운이의 연기를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에 굉장히 신이 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차 PD에게 제안한 것이 있었다.

동물들이 직접 출연하는 영화에는 흔하게 생길 수 있는 의혹이 있다.

바로 동물 학대 의혹.

전생에서도 <어울림>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현장에서 스태프 한 명의 목격담이 나오면서 논란이 될 뻔했다.

다행히 잘 무마되긴 했으나 이 사건이 현생에서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비단 이런 의혹 때문만이 아니라 실제로 촬영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동물을 학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현장에 동물보호협회 직원을 항상 상주하게 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차 PD도 좋은 생각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냥 공짜로 와서 봐달라고는 할 수 없으니 대가를 지급해야 하겠지만, 이런 인건비를 아낀다고, 예산 줄일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산을 줄이려면 큰돈에서 절감해야 한다.

그렇게 <어울림>의 촬영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그날은 크랭크 인이 2주도 채 남지 않은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들어와 오후 업무를 시작해보려는데 핸드폰이 울려댔다.

지잉-.

지잉-.

그것은 기다리던 최세준의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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