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67화 (67/140)

#67화. 내부 회의 중

강주리는 그날 자신의 오해를 깊이 깨달았다.

아이는 만남과 헤어짐을 받아들이기에 결코, 어리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한번 거절한 탓에 염치없지만, 기회를 한 번 더 줄 수 없냐고 물었다.

이서아의 출연을 그렇게도 원하던 우리가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정해진 순서였다.

휴가가 끝나자마자 이서아는 사무실로 와서 계약을 진행했다.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보고 있자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비록 이서아 캐스팅이란 업무의 연장으로 휴가를 보내긴 했으나 맛있는 밥도 먹고, 캐스팅도 완료했으니 큰 수확이다.

또 예고했던 아라비안필름의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행해졌다.

세트장 관리를 도맡아서 하고 있던 예정우는 이사직에 올랐고, 휘하에 팀들을 관리하는 중책도 맡았다.

나경은 대리로 승진하며 이 과장과 기획팀이라는 부서로 구분됐다.

회계를 도맡아 하던 박지연은 회계팀의 팀장으로 승진.

혼자서는 힘에 부친다는 판단에 따라 팀원을 충원했다.

소속 감독, PD들은 따로 부서를 두지 않고, 지금처럼 활동하기로 했다.

이렇듯 조직도까지 작성해서 한쪽에 걸어두니 사무실이 꽤 그럴듯해졌다.

“차 PD님. <어울림> 예산서 잘 봤습니다. 그대로 진행하시죠.”

“예. 대표님.”

차 PD가 작성한 예산서 마지막에는 75억이라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애초에 생각한 80억에서 5억이나 절감된 금액이었으니 굉장히 만족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아라비안필름은 신서영, 고진주가 중심이 되는 <망자와 함께> 후반과 노흥기, 차 PD, 이서아를 필두로 한 <어울림>의 프리를 시작했다.

예산서 관련 보고를 마친 차 PD가 나가고, 문이 닫히기 전.

밖에서 기다리던 나경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요.”

“네. 대표님.”

나경은 내 결제가 필요한 서류뭉치를 건네더니 말했다.

“대표님. 휴가 기간에 전화 온 곳이 있었습니다.”

“무슨 전화요?”

“<어울림> 제작 소식이 퍼졌는지, 배급을 맡고 싶다는 곳이 있어서요.”

최근 우리 회사 영화가 연달아 히트하고 있었으니 전화는 올만도 했다.

“어디서 연락이 왔습니까?”

“캐리 엔터테인먼트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캐리 엔터테인먼트는 YJ E&M과 쌍벽을 이루는 대기업이다.

어디라도 연락이 올 줄은 예상했지만, 캐리라니?

덩치가 커도 너무 크다.

“캐리요?”

“네. 휴가 끝나면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했는데 뭐라고 할까요?”

뜻밖의 수확이었다.

“우선 내부 회의 중이라고 말해주세요.”

*

“세준아! 여기다 여기!”

최세준은 오랜만에 회사 근처 대패 집에서 학교 동기를 만났다.

신나게 손을 흔들던 동기를 발견한 그는 환하게 웃으며 냉큼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어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잘 지내기는 개뿔. 위에선 쥐어짜고, 아래에서는 치고 올라와. 가운데서 아주 납작해지고 있다.”

동기는 자신의 회사 YJ E&M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캐리 엔터테인먼트에 다니고 있었다.

“너는 어때? 괜찮아?”

안부를 묻는 동기에게 최세준이 답했다.

“나야 뭐. 비슷하지. 돈 많이 주는데 안 힘든 회사가 어디 있겠냐.”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 뒤로도 둘은 한참이나 서로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나저나 YJ E&M 잘나가더라아. 화제 되는 영화는 다 걸고 있던데? 내가 요즘 그것 때문에 위에서 얼마나 갈굼 당했는 줄 아냐. 이눔시키야.”

동기는 살짝 취했는지 혀가 꼬부랑거리고 있었다.

“우리도 그거 걸려고 얼마나 뛰어다니는데. 난리도 아니다.”

“그래도 그······. 비결이 뭐냐?”

피곤함의 찌든 동기의 눈이 벌겠다.

“무슨 비결? 그보다 너 잠은 자냐?”

“음, 하루에 세 시간 정도? 아니, 이게 아니고, 아라비안필름이랑 계속 일하는 비결 말이야. 자식아.”

“뭔 비결이야. 그냥 설립 초창기부터 같이 해왔으니까 하는 거지.”

그 말에 동기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휴. 참 너도 속 편하게 산다. 단단히 붙잡고 있어. 지금 우리는 물론이고, 배급한다는 회사들은 다 눈독 들이고 있으니까.”

“뭐? 야 그건 상도덕이 아니지이!”

“상도덕 같은 소리 하네. 이 바닥에 상도덕이 어디 있냐. 그냥 잘 나가는 영화 잡는 사람이 능력 있단 소리 듣는 거지.”

최세준의 말문이 막혔다.

동기의 말이 맞아도 백번은 맞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자신들이 상도덕 따져가며 일을 했단 말인가.

항상 아라비안필름과의 업무 진행은 평탄하기만 했기에 긴장을 늦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실적을 올려주는 알짜배기 회사도 없는데 말이다.

“이번에 노흥기 감독 차기작도 그 회사라며?”

이건 자신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이 작품도 YJ E&M과 함께할 거로 생각했기에, 별생각이 없었을 뿐.

“그거 우리 회사에서도 접촉 중이라고 하더라. 우리 팀은 아니고.”

“뭐?”

이 자식은 이젠 동기 밥그릇까지 뺐나 싶었으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놈이 알고 있다는 건.

노흥기 감독 차기작을 영화판 전체가 알고 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직 답은 안 왔다는데 아마도 하지 않겠어?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YJ E&M보다 좋은 조건으로 내걸었겠지.”

거기까지 들은 최세준은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친! 야!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인마!”

곧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에 동기도 지지 않았다.

“우리 팀에서 한 게 아니라니까! 이 자식이, 말을 콧구멍으로 듣냐!”

대패 집에서는 한동안 고성이 오고 갔다.

*

수중 세트장 공사가 무탈하게 끝났다.

우리나라에 몇 없는 촬영장이기도 했으니 오픈한 뒤 촬영 문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많은 예약을 받더라도 중간중간 일정이 비는 날들은 어쩔 수 없었다.

“이사님. 혹시 일반인들 예약 문의는 없습니까?”

예정우를 이사라고 칭하는 게 영 어색하긴 했으나 길을 들이기로 했다.

“일반인 문의는 아직이요.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예정우도 내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기로 한 이후로 곧잘 이행하고 있었다.

가끔 흥분하면 자기도 모르게 반말이 튀어나오곤 했으나 고쳐지겠지.

어쨌든, 일반인에게 홍보할 방법은 좀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그 주에 나는 최세준과의 미팅을 진행했다.

“대표님! 잘 지내셨어요?”

표면적으로야 <망자와 함께> 개봉과 홍보 일정 조율을 하기 위한 미팅이었으나 이런 조율은 이제 내가 아닌 나경과 이 과장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자리는 그저 친목 유지를 위한 술자리이기도 했다.

미팅의 목적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알려준 주소로 가보니 꽤 비싸 보이는 고급 한정식집이라 의아했다.

“과장님도 잘 지내셨어요? 그런데 여기 너무 비싼 곳 아닙니까?”

“에이, 그동안 고생하셨는데 제가 오늘은 한턱내겠습니다!”

그는 씩 웃으며 카드 하나를 짠! 하고 들어 보였다.

“당연히 법카이긴 하지만요.”

사준다는데 마다하는 건 또 예의가 아니다.

“그럼 오늘은 맛있게 얻어먹고, 다음엔 제가 술 한잔 사겠습니다.”

“예. 얼른 앉으시죠.”

그렇게 우리는 테이블에 앉았고.

나는 들어올 때부터 묻고 싶던 걸 물었다.

“그런데 눈병에 걸리신 겁니까?”

최세준이 한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질문에 그는 얼굴이 벌게졌다.

“예. 전염성이 있는 건 아니라고 하니.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뭔가 거짓말인 거 같기도 했는데, 그가 그렇다고 하니 그러려니 넘어갔다.

음식들이 하나둘 들어왔고, 우리는 술까지 곁들였다.

<망자와 함께>는 8월 초에 개봉해 극장 성수기인 여름 시즌을 노리자는 계획부터 해서 업무 이야기를 간단하게 나눴다.

그러더니 그는 내게 뜬금없는 인물을 물었다.

“아, 맞다. 대표님 혹시 김바로라는 번역가가 그때 <워싱> 번역했던 분 맞죠?”

“예. 맞아요.”

최세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며칠 전 만난 동기가 그분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요즘 가장 핫한 번역가라고, 충무로에서 김바로가 번역하는 외화는 무조건 흥행이라는 말까지 돈다고 합니다.”

전생처럼 슬슬 그의 입지가 올라오는 모양이다.

“동기가 그분한테 번역 의뢰하려면 번호표 뽑고, 기다려야 한다길래 부심 좀 부렸습니다. 같이 작업해 본 사람으로서요.”

“그러셨어요?”

“예! 근데 또 소문에 그분이 아라비안필름 작품은 재지도 않고, 바로 해주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뭐, 맞긴 하다만.

나는 이런 거로 부심 부리고 싶지 않았다.

“하하, 그렇죠. 뭐.”

대충 넘어가려는데 최세준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와, 대단하십니다! 감독, 배우 따지는 게 아니고, 전적으로 영화 퀄리티만 보는 거라고 하던데, 아라비안필름 영화는 그냥 믿는다는 거 아닙니까.”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하하.”

이후로도 최세준은 김바로에게 번역 맡기고 싶은 영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를 극찬했다.

혹시나 껄끄러운 부탁이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는 그런 부탁을 하진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아! 소식 들었습니다. 남양주에 새로운 세트 오픈하셨다고요.”

역시 이쪽 업계로는 소문이 잘 퍼진 모양이다.

“예. 무사히 오픈해서 운영 중입니다.”

“와, 수중 세트장이라니. 대단하십니다. 보통 일반 세트장과 같이 운영할 생각은 잘 안 하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오늘의 자리는 그의 아부 타임이 끊이질 않을 것 같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역시! 제가 홍보 많이 하겠습니다.”

최세준이 직접 홍보를 해준다는 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게 없었다.

“감사합니다. 저희가 스쿠버 다이빙도 할 수 있는 시설이라 일반인들에게도 오픈하려고 하거든요.”

내 말에 그는 깜짝 놀랐다.

“예?! 정말입니까?”

뭘 이렇게까지 놀라지.

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밝혀졌다.

“제가 취미로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있습니다!”

응? 기묘한 쪽으로 이어지는 인연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스쿠버 다이빙하시는 분들이 아직 국내에 많이 없어서 웬만큼 한다는 분들은 다 가입하는 동호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제가 회원들한테 홍보 톡톡히 하겠습니다!”

최세준의 취미가 스쿠버 다이빙인 것도 놀라웠으나 그가 이리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놀라웠다.

역시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본론을 내놓았다.

“그리고 대표님. 노흥기 감독님 차기작 들어간다고 하시던데······.”

이거였구나.

“예. 이제 막 프리 시작했습니다.”

그는 잠시 입을 달싹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이번에도 저희 회사랑 같이 하시는 거죠?”

이건 캐리 엔터테인먼트의 전화를 받았다는 나경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결론을 짓고 있었다.

“아하하, 그게 요즘 회사 쪽으로 연락이 많이 오고 있긴 합니다.”

최세준이 시무룩해졌다.

“역시 그러시겠죠······.”

그러나 나는 배급사를 옮길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당연히 YJ E&M과의 의리를 지켜야겠죠?”

왜냐.

괜히 관계를 잘 유지 중인 대기업과 등을 돌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더 열심히, 잘! 아라비안필름 영화 홍보하고, 배급하고, 다 하겠습니다!”

대신.

캐리 엔터테인먼트에서 좋은 조건을 걸었기에 우리 쪽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최세준이 너무 기뻐해서 양심에 찔리긴 하다만.

“그런데 저희 회사도 제 의견으로만 돌아가는 게 아니다 보니, 직원들 눈치가 보입니다.”

“예?”

최세준은 뭔 소린가 싶어서 눈이 동그래졌다.

“이번엔 저희 쪽에서 조건을 좀 제시해도 되겠습니까?”

“아?”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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