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강아지 나라
“예. 감독님. 통화 가능하세요?”
-아, 그럼요 신 대표.
나는 다음날 노흥기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 알게 된 이서아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참입니까?
지금부터 내가 실행할 계획에는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에게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감독님 혹시 키우시는 고양이가 몇 마리입니까?”
-고양이요? 한 마리를 키우고 있긴 한데······.
노흥기는 갑작스러운 고양이 이야기에 당황하다가.
-얼마나 귀여운지 사진 보내드릴까요?
팔불출 집사의 면모를 보여줬다.
“사진까지는 괜찮습니다. 하하.”
내가 어색하게 웃자 그가 제안했다.
-아! 사진으로 볼 게 아니고, 이참에 한번 집에 오는 건 어때요? 총각이니 떡국도 못 먹었을 거 아닙니까?
응? 이거 어째 이야기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건 사모님께 너무 민폐이지 않습니까.”
-어이구! 걱정하지 마세요. 애들 분가한 이후로 집이 조용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어서 분명 좋아할 겁니다.
그렇지, 이참에 서아도 같이 초대하는 건 어떻습니까? 신 대표가 캐스팅에 이렇게도 공들이고 있으니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노흥기는 딱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차성민과의 통화 이후 많은 생각을 했다.
강주리에게 이서아는 동물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줄 방법으로 뭐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녀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방법이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노흥기의 집에서 만나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고, 동물까지 있는 공간이니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없었다.
그리고 노흥기라고 하면 강주리는 분명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작품을 거절한 미안함도 있을 것이고, 그녀가 먼 미래를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노흥기가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도 흔쾌히 내가 원하는 말을 먼저 꺼내주니 얼마나 운이 좋은 상황인가.
“그래도 집에 초대한다는 게 보통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텐데, 괜히 불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노흥기는 내 걱정을 한 방에 날리듯 말했다.
-무슨 소립니까. 나도 서아 캐스팅 꼭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나야. 예비 주연배우랑 미팅하는 거나 마찬가진데 불편할 게 뭐가 있습니까.
*
강주리는 딸 이서아의 스케줄을 같이 소화하고 있었다.
오늘은 최근 발탁된 한 의상 브랜드의 키즈 라인 화보 촬영 날이다.
“와! 서아야! 좋다아! 그래! 방금 그 포즈 한 번 더 해보자!”
스튜디오에 울려 퍼지는 포토그래퍼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니 이서아는 다행히 오늘도 일을 재밌게 하고 있나 보다.
이서아가 화보 촬영 경험이 많지 않아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때.
지잉-.
지잉-.
핸드폰이 울리기에 살금살금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신바드 대표님]
‘응? 이제 통화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전화를 다급히 받았다.
“여보세요. 대표님?”
-어머님, 잘 지내셨어요? 신바드입니다.
“그럼요. 대표님도 잘 지내시죠? 아, 맞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어머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 다른 게 아니고요.
스튜디오로 금방 다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용건인지 먼저 물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그가 먼저 꺼내는 모양이다.
-노흥기 감독님께서 서아 양을 집에 초대하고 싶다. 하셔서요.
용건은 뜻밖이었다.
“네? 감독님이 저희 서아를요?”
사실 그녀는 최근 아라비안필름 작품을 거절한 탓에 다시는 이곳과 연이 없을 줄 알았다.
-<망자와 함께> 하면서 서아 양을 굉장히 좋게 보신 모양이에요. 꼭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거절한 <어울림>은 국내 영화 시장에 거의 없는 어린아이가 주연인 작품이었고.
감독은 배우라면 꼭 한번 작품을 같이 해봐야 한다는 노흥기였다.
당연히 처음엔 기쁘게 수락하려고 했으나 작품의 내용을 듣고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사연은 즉 이랬다.
강주리의 가족은 2년 전, 13년 동안 키우던 반려견을 떠나보내야 했는데.
아픔이 얼마나 큰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자신의 딸도 많이 힘들어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언제나 함께 한 반려견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아이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괜찮아졌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걸 깨닫기에는 일렀던 모양이다.
그 뒤로 어떤 동물이든 먼저 다가가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작품을 거절한 것이다.
아무리 커리어가 중요해도 아이에게 고통을 줄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다시 못 올 좋은 기회를 걷어찬 격이 맞았다.
그런데 그 노흥기 감독이 자신들을 집으로 초대했다니.
이건 절대 거절할 수 없었다.
언제라도 다른 작품에서 만날 수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배우 활동 중 인맥 관리는 0순위였다.
“아, 그럼요. 당연히 초대해주신다는데 가야죠.”
-그럼 혹시 3일 뒤 어떠십니까? 아, 그리고 혹시 노 감독님 집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저번에 서아가 동물을 싫어한다고, 하셔서요.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식사 한 끼 할 정도의 시간은 괜찮을 것 같아요. 사정이 좀 있는데 무서워하거나 그런 건 아니라서요.”
-다행입니다. 그럼 일정이랑 주소는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주리는 핸드폰 사진첩에 들어가 오랜만에 그 사진을 찾아보았다.
사진에는 이서아가 레트리버 한 마리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두 시간 정도는 괜찮겠지.’
강주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
“신 대표! 왔습니까!”
“예.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3일 뒤 만난 노흥기는 현관문에서부터 나를 반갑게 맞았다.
“얼른 들어와요!”
노흥기의 집은 평범한 아파트로 부부가 살기에 딱 알맞았다.
나는 먼저 노흥기 부인에게 꾸벅 인사했다.
“사모님. 처음 뵙겠습니다. 신바드입니다.”
그러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아들 같은 대표님이라고 들었는데 정말이네요!”
아들 같다니.
노흥기가 별 칭찬을 다 했다.
들고 온 상자를 곧장 건넸다.
“식사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소하지만, 빈손으로 오긴 뭐 해서 준비했습니다.”
“어머, 그냥 부담 없이 오셔도 괜찮은데.”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꽤 놀란 눈치다.
“어머! 이거 비쌀 텐데!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맞다.
백화점에서 디자인이 괜찮은 것 같아 가격을 물었는데 깜짝 놀랐다.
고작 커피잔이 뭐 그리 비싼지, 2세트에 15만 원이 넘었다.
그래도 요새 주부들이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라고 해서 샀다.
생각해보니 음식을 차리는 노고에 비하면 그렇게 비싼 금액도 아니었다.
집에는 부부만 있던 게 아니었는지, 10살 정도의 남자아이도 보였다.
아이는 거실 바닥에 앉아서 소방차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내가 불렀습니다. 서아가 혼자 있으면 심심할까 싶어서요. 손자 놈이 서아랑 비슷한 또래거든요. 또 가끔은 이런 시간이 있어야 아들이랑 며느리가 영화 한 편이라도 맘 편히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더니 그는 아이를 다정하게 불렀다.
“승우야. 와서 인사해야지.”
아이는 할아버지가 자신을 부르자 쪼르르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노승우입니닷!”
씩씩하게 인사하더니 다시 쪼르르 소방차로 달려갔다.
그래. 저 나이대에는 자동차가 최고지.
그때.
쿠당탕!
안쪽 방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 움찔했는데, 다들 평온한 얼굴이다.
“괜찮아요. 보나 마나 라운이가 뭐 떨어트리는 소리일 겁니다. 하하.”
“라운이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고양이요. 고양이.”
아, 고양이 이름이 라운인가 보다.
“흰색 바탕에 갈색 줄무늬라 브라운에서 라운이를 따 왔습니다. 하하.”
노흥기는 반려묘 이야기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원래 저렇게 누가 오든 신경 안 쓰고, 자기 혼자 놀아요. 놔두면 됩니다.”
그렇구나.
고양이를 키워보지 않는 나로선 잘 모르니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잠시 후 이서아와 강주리가 도착했다.
“감독님! 대표님! 안녕하세요!”
씩씩한 이서아의 인사로 분위기는 한껏 화기애애해졌고.
우리는 곧 식탁에 모여 앉았다.
떡국이나 먹으러 오라던 노흥기의 말과는 달리 식탁 위는 풍성했다.
갈비찜과 잡채, 생선구이 등등 전부 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다.
“와, 사모님께서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강주리가 놀라자 노흥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집사람이 예전부터 음식을 뚝딱뚝딱 잘 만들어요.”
노흥기 부인이 쑥스럽게 답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서아 양 팬이거든요.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했어요. 많이 드세요.”
그렇게 시작된 식사.
“갈비 맛있어요! 할머니!”
어느새 노흥기 부인의 호칭이 할머니가 된 이서아는 갈비를 야무지게도 뜯었다.
“아휴. 말도 예쁘게 하네. 우리 서아 많이 먹어요.”
그녀는 이서아에게 생선 살을 발라 주면서 말을 덧붙였다.
“제가 딸도 없고, 손녀도 없어서 이런 재미가 없어요. 서아 애교에 살살 녹네요. 녹아.”
그 뒤로도 그녀는 이서아가 예뻐 눈을 떼질 못했다.
노흥기는 또 그런 부인의 모습을 살갑게 보더니 말했다.
“오라고 하길 잘했네.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어요. 하하.”
식사는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지속됐다.
노흥기는 일부러 <어울림>에 대한 이야기는 피했다.
미리 나와 말을 맞춘 것이었고.
괜히 한번 작품을 거절한 강주리의 미안함을 들춰내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또 이따가 자연스럽게 상황이 만들어지면 캐스팅은 순리대로 진행될 것이다.
어느새 밥을 다 먹은 아이들은 그 나이대가 으레 그러하듯, 좀이 쑤신 모습으로 꿈틀거렸다.
“엄마. 저 밥 다 먹었는데 이제 승우랑 가서 놀아도 돼요?”
강주리는 아이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대신 어지르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이서아는 그런 엄마의 성격이 익숙한지 재깍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요! 엄마!”
“누나! 저 방 가서 놀자아!”
둘은 그렇게 식탁에서 내려갔다.
“같이 잘 놀아서 다행이네요.”
노흥기의 말을 시작으로 어른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이어졌고.
방에선 무슨 놀이를 하는 건지 아이들의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렇게 커피까지 대접받으며 시간은 더 흘러 어느덧 자리를 마칠 시간이 되었다.
“시간이 꽤 됐네요. 그럼 너무 늦지 않게 다들 일어나죠. 서아도 가서 일찍 자아죠.”
노흥기의 제안에 강주리가 말했다.
“네. 오늘 너무 즐거웠습니다. 맛있는 밥도 먹고요. 다음에 또 좋은 기회에 봬요.”
이제 시간이 왔다.
“그럼 저는 서아 데리고 올게요. 잠시만요.”
강주리는 식탁에서 일어나 아까 이서아가 들어간 방으로 향했다.
“서아야. 이제 집에 가야지.”
나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리고 강주리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아이, 라운아 간지러워!”
이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서아야. 너 승우랑 놀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렇게 젖혀진 방문.
안에선 꼬리를 바짝 세운 고양이가 서아의 다리에 볼을 비비고 있었다.
“서아야······?”
“응? 엄마?”
강주리는 그 모습을 보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대신해 이서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서아야.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대표님!”
“혹시 서아는 라운이를 어떻게 생각해?”
“라운이요?”
“응. 라운이 말고도 촬영 현장에서 봤던 새랑 동물원에 가면 있는 동물들은 서아한테 어떤 존재야?”
아이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자 강주리가 입을 열었다.
“저, 대표님. 그런 질문은-.”
그러나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해요! 엄마가 말해줬는데, 금비는 강아지 나라로 여행을 간 거래요. 그럼 동물들은 전부 여행을 갈 나라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잘해줘야 해요. 언젠가 돌아갈 테니까 떠나기 전에요! 괴롭히지 말고요.”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금비는 서아네 집에서 13년 동안 키우던 레트리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