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65화 (65/140)

#65화. 일주일 뒤에 봅시다

“차 PD님. 이거 어때요? 삐뚤지는 않아요?”

나경은 새로운 식구가 된 차성민과도 어느새 친해진 모양이다.

그에게 사무실 한쪽 벽에 걸린 플래카드가 괜찮은지 물었다.

“음, 오른쪽이 조금 더 올라간 것 같은데요.”

“그래요?”

그녀는 의자를 옮겨 플래카드의 오른쪽을 치켜올렸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2009년에도 흥행 돌풍! 아자아자! 아라비안필름 종무식]

처음엔 직원들에게 할 말도 있고, 곧 새해라 다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자유로운 종무식을 진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예정우는 그럴 수 없다면서 플래카드를 제작하고, 식순을 짜오더니 진행까지 보겠다고 나섰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와 스피커는 또 언제 대여했는지 지금은 이것저것 테스트를 하느라 바쁘다.

나는 뭐 도울 게 없나 둘러보다가 이 과장이 근처에서 다과를 준비 중이길래 그를 주섬주섬 도왔다.

“어! 대표님. 놔두세요! 제가 할게요!”

“괜찮아요. 같이 해요.”

그렇게 우리는 일회용 접시에 과자를 담기 시작했다.

“재민 씨. 일은 할 만해요?”

“그럼요! 나경 선배님이 진짜 잘해주세요. 일도 꼼꼼히 알려주시고. 회사 분위기도 너무 좋고요.”

묻고 보니 내가 묻기에 적절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누구라도 대표 앞에선 저렇게 대답하지 않겠나.

그런데 이 과장은 마치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건 대표님 앞이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입니다. 제가 이쪽 업계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봐서 아는데요. 우리 회사 같은 곳이 진짜 없어요. 정시 퇴근에 뭐든 잘하는 대로 보상해주시고. 저는 정말로 대표님 존경합니다.”

역시 괜히 물었다.

이건 좀 많이 낯 간지러우니 빨리 넘어갔다.

“다행이네요. 재미는 있어요?”

“네. 특히 베를린에서 부스 운영했던 게 계속 생각나요. 그래서 저 그 뒤로 영어 학원도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래요?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는 거 힘들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베를린 갔을 때 제가 부족하다는 걸 너무 많이 느껴서요. 다음엔 좀 더 스스로 하고 싶어요.”

성과금 줬다고, 학원 다니는 직원은 많지 않다.

이제 나경과 이 과장 둘만 내보내도 큰 걱정 없겠다.

다과 정리를 거의 마무리하자.

“재민 씨! 여기 잠깐만요!”

나경이 이 과장을 찾았고,

“네!”

얼른 대답한 그는 내게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 갔다.

혼자 남은 나는 커피라도 한잔 마실까 싶어 탕비실을 얼쩡거리고 있는데, 고진주가 다가왔다.

“대표님.”

“아, 예. 진주 씨.”

그녀는 잠시 입을 쭈뼛거렸다.

“무슨 할 말 있어요?”

“네. 저······. 쓰고 싶은 시나리오가 있어서요.”

드디어 그녀가 성장한 것일까.

<망자와 함께>의 스크립터를 하면서 심경의 변화를 많이 느꼈을 그녀가 혹시 영화 자체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어쩌나 싶었는데.

영감이 떠올랐다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래서 <망자와 함께> 후반이랑 병행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힘들지 않겠어요?”

그녀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요! 일이 너무 재밌어요!”

일이 재밌다니.

누구 고덕현 딸 아니랄까 봐.

이런 것까지 쏙 빼닮았다.

“알겠어요. 너무 무리하진 말고요. 시나리오는 좀 늦어도 괜찮으니까 여유롭게 해요.”

글도 촉박하면 잘 안 나온다.

그때.

“아아.”

마이크를 통해 예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종무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직원 여러분들은 자리에 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정우의 말에 직원들은 주르륵 세팅해 둔 의자로 모여 앉았다.

“지금부터 아라비안필름의 2008년도 종무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순서로-.”

그 뒤로 예정우는 아라비안필름에서 계획하고 있는 사업, 영화 등을 설명했고.

올해는 정확한 부서 구분과 필요에 따라선 승진, 인원 충원을 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지금까진 너무 주먹구구식이었던 것 같아서 이제부터라도 체계를 잡아갈 예정이었다.

다음 달 내로 발표하려고, 현재 예정우와 머리를 싸매는 중이다.

그렇게 종무식이 시작된 지 50분 정도가 됐을 무렵.

“자, 마지막으로 우리 회사의 얼굴! 잘생긴 신바드 대표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탐탁지 않은 시간이 왔다.

예정우에게 이건 정말 안 하면 안 되겠냐 물었으나 그는 단호했다.

아무리 수평적인 회사 분위기를 추구하더라도 대표의 위엄을 보여줘야 할 때도 있어야 한다고.

위엄까진 아니지만, 나도 그것엔 어느 정도 동의를 했다.

그래서 알겠다고 한 것인데······.

저 이상한 사족은 왜 붙이냐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나가 예정우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는 꼭 자신이 정말 잘했지? 라는 얼굴이었다.

참, 형이라서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얼른 하고, 들어가야겠다.

“안녕하세요. 지난 한 해 동안 고생하신, 또 올 한 해도 성심을 다해주실 직원분들께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간단한 인사말을 꺼낸 뒤 바로 오늘의 자리를 마련한 본론을 꺼냈다.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각자의 계좌로 보너스가 입금될 겁니다.”

직원들이 술렁거렸다.

“그리고 보너스만 드리자니 사용할 시간도 필요하실 것 같아서, 내일부터 전체 직원에게 일주일간의 휴가를 드리려고 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외부 업체에서 전화도 오고 하니, 힘들었겠지만.

마침 지금이 <망자와 함께> 후반 시작 전이었고, <어울림>의 프리도 시작하기 전이라 가능한 휴가였다.

앞에서 내 말을 경청하고 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눈이 커졌다.

“휴, 휴가요?!”

“예. 일주일 뒤에 봅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그렇게 아라비안필름은 일주일간의 휴무에 들어갔다.

*

그 일주일은 나에게도 오랜만의 여유였다.

첫날부터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오후쯤 일어나 기지개를 켜니 아주 개운했다.

평일 늦잠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늦은 점심을 먹고 멍하니 앉아 있는데, 소파 앞 테이블에 올려진 <신바드의 모험>이 눈에 들어왔다.

맞다. 힌트.

시나리오 북을 들어 힌트가 보였던 장을 펼쳤다.

역시 아직은 힌트만 덩그러니 올라와 있는 모습이다.

[생명, 소중]

힌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떠올랐던 가정이 있었다.

왠지 이 두 개의 단어는 딱 한 가지로밖에 연결되지 않았다.

바로 이서아.

분명 이서아의 엄마 강주리는 나와의 통화에서 아이가 동물을 싫어한다고 했다.

그런데 힌트는 꼭 누군가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 생각한다? 이런 느낌이라는 말이지.

그 누군가가 이서아인 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래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서아가 동물을 진짜로 싫어할 수도 있으니 이걸 확인해보자고 먼저 제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때.

지잉-.

지잉-.

전화가 울려서 확인해보니 차성민이었다.

“여보세요?”

-대표님. <어울림> 예산서 가안 방금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휴가라서 연락을 드릴까 말까 했는데 그때 꼭, 바로 보내 달라고 하셔서요.

종무식 때 차성민에게 <어울림>의 예산이 얼마나 진행됐는지 물었다.

거의 다 되었다길래 되자마자 보내달라고는 했었는데.

“휴가 이후라는 말씀을 드린다는 걸 깜박했습니다. 제가 괜한 부담을 드렸네요.”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 안 하셨어도 오늘 보내놨을 거예요. 쉬는 게 오히려 익숙하지 않아서요.

이쪽 사람들이 이렇다.

프리랜서로 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쉬는 걸 병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 일이 끊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고생하셨습니다. 궁금한 건 사무실에서-.”

물어보겠다고 말하려는 그 순간.

뭔가가 떠올랐다.

“차 PD님!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다급하게 묻자 차성민은 당황한 눈치로 답했다.

-예? 물론입니다.

이서아가 우리 회사와 두 작품을 같이 하긴 했으나 분량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디스카드>에서 이서아가 맡은 역할은 분량이 많은 주인공의 딸이었다.

차성민이 그녀를 현장에서 자주 봤을 거란 말이다.

PD는 현장에서 배우 케어에 가장 많은 신경을 쓰는 사람이다.

그가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혹시 서아 양 말입니다. <디스카드> 찍을 적에 동물을 싫어한다던가 그런 적이 있습니까?”

-동물이요?

“예. 동물이나 곤충 같은 걸 본 서아 양의 특별한 반응이 있었는지 궁금해서요.”

-으음. 그랬던 적이 있었던가······.

전화기 너머의 차성민은 잠시 조용하다가 뭔가를 생각해 냈다.

-아! 한 번 신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기한 적이요?”

-예. 공원 촬영 중이었는데, 현장에 새소리가 너무 커서 촬영이 잠깐 중단된 적이 있었어요.

새소리라.

-제작팀이랑 녹음팀이 새를 쫓아내려고 근처 나무를 살살 흔들었는데도 소리가 계속 나더라고요.

“그런데요?”

-모니터 테이블에서 대기 중이던 서아가 친하게 지내던 제작팀 여자애한테 가서는 ‘언니, 괴롭히지 마.’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 저희는 서아가 뭘 괴롭히지 말라고 하는 줄 몰랐죠. 생전 안 쓰던, 떼라도 쓰는 건가 싶어서 처음엔 아이를 달랬습니다.

“혹시 서아가 그때 어떤 표정이었습니까?”

-뭔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고 해야 하나? 그랬습니다. 아무튼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서아가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가만히 듣고 있자 그는 바로 말을 이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서아가 그렇게 잠시 서 있으니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그 작은 손 위에 앉았습니다.

응? 원래 야생의 새가 사람 손에 쉽게 앉고 그러는 건가?

그보다 이서아가 진짜로 동물을 싫어한다면 분명 그 순간 난리가 났을 거다.

“서아가 싫어하진 않던가요?”

-아니요. 전혀요. 그 반대였습니다.

“반대요?”

-예. 알고 보니 그날 티 테이블 간식 중에 견과류가 있었더라고요. 그걸 글쎄 새한테 주려고 가지고 온 겁니다. 새를 싫어했으면 그렇게까지 안 했겠지요. 또 어찌나 좋아하던지 웃음이 끊이질 않았어요.

이로써 이서아는 동물을 싫어하는 것이 아닌 게 맞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서아의 엄마 강주리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항상 아이와 같이 다니는 그녀가 이런 스토리를 몰랐을 리 없었을 텐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었다.

“현장에 서아 어머님도 계셨습니까?”

-아니요. 저희도 처음에 서아 어머님부터 찾았는데, 마침 그날 급한 일이 생기셔서 매니저한테 서아를 맡겨 두고, 촬영 끝날 때쯤 온다고 하셨다더라고요.

그럼 강주리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고, 몰랐을 확률이 높다.

이제 무슨 사연이 있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생명이 소중하다는 힌트.

강주리는 그저 딸에 대해 잘 모르는 것뿐이었을까.

또 이서아는 왜 새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을까.

그때.

강주리가 전화로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심한 건 아닌데······.

생각해보니 동물을 싫어하는 정도가 심하지 않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아직 전화를 끊지 않은 차성민에게 물었다.

“PD님. 혹시 서아네 집에서 반려동물 키운다는 말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뭐라도 건질까 싶어 그냥 아무 말이나 물은 거였는데 전화기 너머에선 뜻밖의 정보가 들려왔다.

-음, 아마도 지금은 안 키우실 겁니다. 서아 태어나기 전부터 키우던 강아지가 2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거든요.

2년 전이라면······.

“그럼 <디스카드> 촬영 전이겠네요?”

-예. 맞습니다. 현장에서 어머님이 직접 해주신 이야기니까요.

흩어져 있던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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