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64화 (64/140)

#64화. 어떤 영향을, 얼마나 줄까

<망자와 함께>의 촬영이 장장 10개월에 걸쳐 끝났다.

고생한 스태프들은 일주일이라는 꿀 같은 휴식을 보낸 뒤 한 고깃집에서 다시 모였다.

쫑파티를 위해 사무실 근처 고깃집을 통째로 빌렸고, 하나둘 도착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활짝 피어있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잘 지내셨어요?”

내가 있던 테이블로 와서는 반가운 인사를 한마디씩 건넸고.

약 100명의 스태프가 다 모이자 정 PD의 인사말로 쫑파티가 시작되었다.

“<망자와 함께>를 긴 시간 동안 함께 만들어 가주신 스탭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드립니다. 그럼 오늘은 양껏 먹고 마십시다! 아, 이따가 경품 추첨 있으니까 일찍 가지 마시고요!”

정 PD의 말에 주변에서 ‘오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소한 이벤트로 스태프들의 이름이 적힌 상자를 만들어왔고, 경품으로는 노트북, 청소기, 최신 핸드폰, 백화점 상품권 등이 있었다.

경품을 쏜다고 해서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이런 추억은 오래 남는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아라비안필름에 득이 되는 일이었다.

정 PD의 다소 유치한 건배사가 이어진 뒤 모두는 이야기꽃을 피우는 데에 열중했다.

“촬영 감독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고덕현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고생은 무슨! 제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프로는 고생하는 거 아닙니다. 일하는 거지.”

그래. 역시 고덕현이 이래야지.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은 일이 재밌었어요.”

“일하면서 재밌기가 쉽지 않은데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아라비안필름 영화라서 그런가? 하하! 어쨌든 신 감독이 일 제일 많이 했습니다. 가서 좀 달래줘요.”

고덕현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아마도 이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일 듯하다.

그런데 달래주라는 건 또 뭐야.

많이 괴롭혔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

나는 그에게 웃으며 물었다.

“감독님이 직접 가서 고생했다고 말씀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에이! 나는 영 낯간지러워서 그런 거 못 합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희 다음 영화도 와주시는 거죠?”

고덕현이 놀라며 답했다.

“영화가 또 들어갑니까? 저야 일 끊기지 않고, 할 수 있어서 좋지만, 이번엔 또 무슨 영화입니까?”

왠지 <어울림>의 키워드를 알려주면 그가 질색할 것 같은 촉이 왔다.

“휴먼 드라마요. 따뜻한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대충 얼버무릴 땐 이 장르만 한 게 없다.

“오? 이번엔 좀 편할 것 같은데요? 애들이 좋다고 오겠어요.”

그렇게 그는 내게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어울림> 참여를 굳건히 약속했다.

좋아. 촬영 감독 섭외는 완료했고.

이번엔······.

노흥기와 신서영이 있는 테이블을 찾았다.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노흥기가 반갑게 맞았다.

“아이고! 신 대표! 당연히 되고 말고요!”

그는 촬영이 무사히 끝나서인지 흥이 잔뜩 오른 얼굴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보다는 우리 신 감독이 많이 했지요! 자! 한잔 받아요.”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눴다.

그러다가 <망자와 함께> 후반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길래 넌지시 물었다.

“혹시 후반은 감독님 두 분 다 참여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공동연출이었으니 후반도 같이 참여해야 하는 것이 맞았으나 왠지 노흥기는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요. 신 감독이 할 겁니다.”

“예? 케켁!”

조용히 고기를 먹고 있던 신서영은 갑자기 사레에 들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인가 보다.

“신 감독 머리에 마지막 그림은 다 있잖아. 촬영하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다고 생각하네.”

콜록거리던 그녀는 물을 들이켠 다음에 다급하게 말했다.

“그, 그래도요! 영화에서 편집이 제일 중요하다는 건 이제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노흥기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맞아. 영화에서 편집은 꽃이지. 그러니 그걸 온전히 혼자 해봐야 실력이 늘지 않겠나?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네. 힘들겠지만, 끝나면 내 말이 뭔지 알게 될 거야.”

그러더니 그는 술잔을 호쾌하게 털어 넘겼다.

신서영도 알 것이다.

그가 결정한 이상 혼자 해내야 한다는 것을.

또 노흥기가 지금 자신에게 성장의 기회를 준 것이라는 걸 말이다.

“알겠습니다······. 저는 잠시 화장실 좀.”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는지 그녀는 자리를 비웠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감독님. 그럼 혹시 차기작은 생각하고 계십니까?”

“차기작이요? 아이고, 나이가 있어서 조금 쉬려고 했는데, 왜요? 뭐, 또 들어갑니까?”

나는 고덕현에게 했던 두루뭉술한 말과는 달리 <어울림>에 대한 줄거리를 짧게 설명했다.

내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내 말이 더 들려오지 않자 입을 열었다.

“으음, 동물과 소통할 수 있는 아이라······.”

고민하는 눈치가 역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싶었던 순간.

“정말로 제가 가지고 싶은 능력이네요.”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예?”

내가 영문을 몰라 되물으니 그가 멋쩍은 듯 웃었다.

“하하. 사실은 고양이를 한 마리 키웁니다. 그런데 도통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할 때가 많거든요.”

아, 그런 뜻이었어?

노흥기가 집사였다니.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았다.

“까짓것 한 작품 더 해봅시다. 신 감독한테 저리 말해두긴 했지만, 전화도 많이 올 거고, 같은 사무실에 있기라도 하면 마음이 편하겠죠.”

그도 속으로 걱정을 하고 있긴 했나 보다.

“그리고 신 대표의 안목이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을 거라 믿습니다.”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그러나 누군가의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힘이 되는 말이었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리는 점점 무르익어 경품 추첨까지 마무리하자 술에 취한 사람들이 차츰 출연했다.

그쯤 쫑파티를 마무리했으나 사람들은 아쉬움에 고깃집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결국 정 PD에게 말해 근처 호프집을 섭외했고.

급하게 예약한 거라, 거리가 조금 있어 남은 인원들은 술이나 깰 겸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대표니임.”

얼굴이 벌건 신서영이 뒤에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응? 예. 감독님. 말씀하세요.”

“저기요. 그 저번에 촬영 끝나면 말씀해주신다고 했던 거 언제 알려주실 거예요오? 크랭크 업 진작했는데에······.”

뭘 말하는 거지.

잠깐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올랐다.

아, 양상철의 칭찬을 비밀로 한 거 말하는 거구나.

근데 말꼬리가 조금씩 늘어지는 걸 보니 신서영도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았다.

“그건 이제 의미가 별로 없지 않아요?”

“으응?”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까 보니까 현장 사람들 다 신 감독님 칭찬하고, 응원하고, 신뢰하고 있던데요?”

정말이었다.

대놓고 말한 고덕현 뿐만이 아니라 술잔을 기울이던 스태프들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꽤 많이 오르내렸다.

물론 다 좋은 말뿐이었고.

현장에 계속 있었던 게 아니라 체감을 잘하지 못하던 나도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내 말에 신서영이 고개를 푸욱 숙였다.

“정말요오?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셔요?”

“예. 진짭니다. 뭐 하러 감독님한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고개를 들지 않아 얼굴이 보이지 않던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렇구나아. 다들 알아주고 있었구나아. 고생한 보람이 있다.”

“저기, 감독님. 혹시 많이 취하셨으면 택시라도-.”

그녀가 예고치 않게 고개를 팍 들어 올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 대표님 덕분이에요.”

“제가 한 건 없습니다. 감독님이 열심히 하신 거지. 고생 많으셨어요.”

내 말에 그녀는 입을 삐쭉 내밀어 꾹 다물었는데, 눈에선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고진주를 달래주던 게 생각나던 그때.

마침 옆을 지나가던 예정우는.

“어어! 대표님! 너어! 또오?!”

오해가 깊어지고 말았다.

*

쫑파티 다음 날 노흥기에게 바로 <어울림> 시나리오를 건넸고.

며칠 뒤 그가 사무실로 직접 찾아왔다.

“시나리오 아주 좋던데요?”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연출하시는 분 마음에 들어야 또 영화가 잘 나오니깐요.”

“그렇긴 한데······.”

문제가 있나.

“현서 역 캐스팅이 만만치 않겠어요. 단독으로 극을 끝까지 끌고 갈 힘이 있어야 하는데 보통 성인 배우들도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지금 활동하는 아역 중에 딱히 생각나는 배우도 없고 말입니다.”

다행히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혹시 서아 양은 어떻겠습니까?”

“이서아요? 으음, 그때 보니까 연기 잘하고, 현장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작품 분위기랑 잘 어울리네요.”

긍정의 신호였다.

“근데 현서 역은 소년 설정이지 않습니까? 시나리오 수정하려고요?”

“서아 양이 캐스팅되면 수정은 불가피할 겁니다. 그런데 딱 소년, 소녀로 나누지는 않으려고요.”

<어울림>은 훗날 전 세계 아이들이 보게 된다.

즉, 이 영화는 아이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다.

하나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입장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건 이 영화가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얼마나 줄까. 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서아를 캐스팅한다면······.

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어울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들이 흔하게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떠올랐다.

남자는 파란색과 바지, 여자는 핑크색과 치마.

이런 성별 고정관념이 완전히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으나 아이들의 다양성과 개성을 뺐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세상을 바꿀 거야.

이런 거창한 목표가 아니었다.

목표로 삼는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그저 아이들을 위한 영화이니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어. 라고 알려주는 좋은 취지가 되지 않을까 싶던 것이다.

노흥기에게 내 의중을 간단하게 설명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에 메시지를 담는다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죠. 좋을 것 같네요. 근데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의 말엔 어느 정도 동의했다.

중성적인 분위기를 내려면 이서아의 머리를 잘라야 할 수도, 의상이나 분장에서 나타내야 할 수도 있었다.

이서아가 캐스팅은 받아들이더라도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아이가 싫어한다면 다른 아이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이미 전생에서 많이 했다.

이제 아이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만 남았다.

잠시 후.

저번 <망자와 함께> 촬영에서 만나 번호를 교환했던 이서아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대표님. 정말 죄송한데, 이번 영화는 힘들 것 같아요.

“혹시 거절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으신 겁니까?”

-네. 우리 서아가 동물을 싫어해요. 그렇게 심한 건 아닌데······. 하여튼 이번엔 같이 하기가 힘들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어머님이 죄송할 건 없죠. 그럼 알겠습니다. 그런 이유가 있는데 강행할 생각은 없습니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역시 세상에 순탄한 영화는 없구나.

그리고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씻고, 확인한 <신바드의 모험>에는 힌트가 올라와 있었다.

[생명, 소중]

하, 이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