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연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이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던 여름이 지나고 10월이 되었다.
남양주에 들어설 수중 촬영 세트장 설계는 약 3개월에 걸친 미팅과 수정을 반복하면서 완료했고, 곧 시공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차성민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정 PD가 경력이 꽤 되는 친구라며 소개해 준 차성민의 면접 날이었다.
“네. 반갑습니다. 신바드입니다. 앉으시죠.”
차성민은 내가 봐왔던 PD들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185는 거뜬히 넘어 보이는 키에 운동을 열심히 한 몸으로 검은색 가죽 재킷을 멋스럽게 소화하고 있었고.
선글라스, 시계, 신발까지 확실히 패션에 감각이 있어 보였다.
PD보단 배우 쪽이 더 어울리는 비주얼이다.
정 PD가 직접 차를 내오더니 차성민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나갔다.
“두 분이 꽤 친하신가 봐요?”
“예. 몇 작품, 같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둘 다 PD 달고나서는 일로 만나기가 힘들어 요즘은 같이 술 자주 먹습니다.”
“그러시군요.”
출력해 놓은 차성민의 이력서로 눈을 돌렸다.
“경력이 꽤 되시네요?”
“예. 영화 시작한 지 10년 정도 됐는데 거의 안 쉬고 작품 했습니다.”
빼곡한 경력란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최근엔 <디스카드> 하셨네요?”
“예. 혹시 보셨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서아 양 때문에 봤죠. 저희 영화사 작품에 두 번이나 출연했거든요. 둘 다 비중이 작긴 했지만요.”
<디스카드>는 이서아가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에서 라라의 아역으로 출연하기 직전에 촬영했던 영화다.
차성민은 이서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이 반짝였다.
“아! 저도 봤습니다. 서아는 정말 타고난 배우인 거 같아요. 연기 잘하고, 똘똘하고, 어머님이 인성 교육을 제일 첫째로 강조하셔서 나중에 구설수도 없을 거 같고요.”
이미 그녀의 미래를 알고 있는 나에게 차성민의 판단은 예리하게 다가왔다.
PD는 자고로 빠른 판단력을 분명하게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정 PD가 사람을 허투루 소개해 준 것 같진 않았다.
“그렇죠. 동감합니다. 그럼 저희 쪽에서 준비 중인 영화를 짧게나마 설명해 드릴게요. 출근하신다면 이 영화를 맡게 되실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어울림>이라는 영화로 영국의 교육용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리메이크할 거예요.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는 10살 소년이 동물원에 처음 가면서 생기는 일들이죠.”
“그럼 아이와 동물이 주연이네요?”
“예. 맞습니다.”
촬영 현장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배우가 아이와 동물이었다.
워낙 예측할 수 없는 돌발상황이 많다 보니 간혹 기피하는 PD들도 있었다.
촬영에서 발생하는 돌발상황은 곧 돈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어울림>은 제대로 된 PD가 들어와 운용해야 하는 영화였다.
차성민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동물원 섭외랑 동물 CG도 들어가야 할 거고, 배우가 누가 될지 모르겠지만, 예산이 꽤 높게 책정될 거 같네요. 최소 70억은 들겠어요.”
이건 좀 놀라웠다.
아주 간단한 설명만 듣고, 대충 견적을 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내가 예상한 예산은 80억이었다.
PD의 또 다른 재능은 예산을 얼마나 줄일 수 있냐는 것.
지금 차성민은 <어울림>의 예산을 10억이나 낮게 부른 것이다.
물론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세세하게 예산을 짜보면 오차는 생기겠지만, 최소 70억이라고 했으니 80억은 넘지 않을 터.
“잠시만요.”
접대용 테이블에서 일어나 업무용 테이블 위에 올려둔 서류 봉투를 들고 와 그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시나리오입니다.”
“예?”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읽어보시고, 괜찮으시다면 연락 주세요.”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겠다며 차성민을 보낸 뒤 생각에 잠겼다.
<어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인 소년 ‘현서’가 혼자 끌고 가야 하는 영화다.
그렇기에 배우가 너무나도 중요한데······.
나는 고민에 빠졌다.
전생에서 이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아이를 찾으라면 찾을 순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 아이는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한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영화라 은퇴를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아이의 부모는 그저 학업에 열중한다는 말이 전부였다.
하지만 부모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나중에 아이가 성인이 되어 출판한 회고록에서 밝힌 사실은 참담했다.
처음부터 아이는 연기에 흥미가 없었다.
모든 이가 재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지 않는다.
아이는 연기엔 재능이 있었을지 몰라도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싫어했다.
그러나 돈에 눈이 먼 부모는 아이에게 강압적인 태도로 연기를 주문했다.
결국 촬영 내내 시달리던 아이는 대인기피증과 공황장애를 앓게 되면서 더는 연기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 없었다.
이번 생엔 그 아이가 그저 평범한 또래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뛰어놀길 바랄 뿐이다.
이렇다 보니 나는 <어울림>의 주연배우를 새로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연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어느새 창문 밖은 하루 중 가장 짧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하늘은 청색으로 그림자는 길어지며 일광은 노란빛을 발산하는 그 시간.
언제 봐도 아름다운 매직아워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나 자신을 다독였다.
*
2주가 지나고, 차 PD가 출근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받아 간 지 이틀 만에 연락이 왔고, 하던 영화의 후반을 마무리하고 오겠다고 전했다.
출근한 그에게 예산 작업을 지시하며 투자는 우리 회사에서 직접 진행할 거라고, 전하자 부담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돈을 다루는 일이기에 적당한 부담은 나쁘지 않다.
차 PD가 출근한 그 주에는 수중 촬영 세트장 공사가 시작되었다.
“대표님.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건 아닐까?”
같이 공사 현장을 보고 있던 예정우는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자신이 관리해야 할 세트장의 몸집이 점점 커지니 그럴 만도 하다.
“공사 완료되면 전문 인력 붙여드릴게요. 여기는 관리하시는 분 따로 둬야 할 것 같아요.”
내 말에 그는 조금 안심한 듯 보였다.
“그래. 그러면 나을 것 같긴 하다만.”
수중 촬영 세트장은 각 동당 200평의 규모로 공사비는 약 15억이 들었다.
공사비도 공사비지만, 완공되면 유지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다행히도 요즘 이쪽 업계에서 우리 세트장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수중 세트장이 생긴다는 사실도 퍼질 것이다.
남양주에 온 김에 한창 촬영이 진행 중이던 세트장 안으로 향했다.
<망자와 함께> 팀은 안 본 새 얼굴들이 더 하얘져 있었다.
따져보면 세트 촬영을 한 지도 반년째였으니······.
오늘 온 김에 회식이라도 쏴야지, 안 되겠다.
정 PD를 불러 전하고, 대충 현장을 둘러보는데 고덕현과 이야기 중인 신서영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요. 고 감독님. 이 장면은 부감에서 로우로 틸 다운해야 해요. 인물의 성격이 반전되는 장면이잖아요. 그냥 평범한 인간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신이었어요. 그걸 카메라 무빙으로 관객들이 위에서 깔고 보다가 로우로 가면서 갑자기 지배받는 느낌을 주고 싶어요.”
고덕현은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립팀을 불렀다.
“애들아! 여기 크레인 깔자!”
고덕현이 한마디의 토도 달지 않았다는 건 그 말을 전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의외로 분란이 예상되던 소통은 잘 되고 있나 보다.
그리고 근처에서 그들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고진주.
그녀는 어딘가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현장에서 처음 보는 순한 아버지의 모습에 당황한 눈치다.
자신을 대하던 태도와 완전히 다르기도 하고.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는 갑자기 불끈 쥔 양손을 들어 파이팅 포즈를 지어 보였다.
왜인지 그녀의 뒤로 불꽃이 보이는 건 착각이려나.
투지에 불타올라서 더 열심히 하겠구만.
이렇게 현장을 둘러보고 있던 그때.
옆을 지나가던 녹음 감독이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 인사를 했다.
“어!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예. 녹음 감독님. 잘 지내셨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대뜸 물었다.
“그런데 저, 혹시 대표님. 아라비안필름 다음 작품은 언제 들어가십니까?”
“예?”
내가 되묻자 자신의 질문이 무례했나 싶었는지 얼른 말을 정정했다.
“아, 아니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냥 계속 아라비안필름이랑 일하고 싶어서요! 저희 팀원들이랑 같이 스케줄을 빼두려고요. 하하.”
지금 <망자와 함께> 팀은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도 같이 했기에 이번에도 보너스는 지급됐다.
그뿐이 아니라 우리 회사 현장이 편하다는 소문이 영화판에 파다하게 퍼지면서 어떤 팀들은 어떻게 하면 아라비안필름이랑 일할 수 있느냐.
라며 사무실로 전화까지 해 물어오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일도 계속하던 사람과 하는 게 편하다.
다들 열심히 해주는 중이기도 하고.
“준비 중인데 아직 일정은 안 나왔습니다. 다음 작품도 꼭 같이 갔으면 하네요. PD님한테 일정 정해지면 연락드리라고 전하겠습니다.”
그는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는지 내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한 번 더 하고 현장으로 향했다.
그를 보내고 난 뒤.
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일일 촬영 계획표를 확인해 보니 오늘 촬영은 6인의 저승 신 중 이서아가 출연하는 장면이었다.
저 멀리 이서아는 치렁치렁한 옷과 머리엔 두 개의 뿔을 단 특수분장을 한 상태로 노흥기와 이야기 중이었다.
“서아야. 너는 나쁜 사람들에게 벌을 주는 사람이야. 알겠지?”
“근데요. 감독님. 저는 여기서 나쁜 신이에요?”
노흥기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응?”
“벌을 준다고 해서 다 착한 신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 신도 죄를 지어서 나쁜 사람들을 골라내는 벌을 받는 중인 거 아닐까요?”
어유. 말을 어떻게 저리도 야무지게 하는지.
나뿐만 아니라 노흥기도 사뭇 놀란 눈치였다.
보통은 옷과 머리에 달린 뿔이 무겁다며 칭얼댈 나이의 아이인데 그런 불평은커녕 자신이 해야 할 연기의 해석까지 똑 부러지게 해왔다.
“오, 그럼 서아는 나쁜 신으로 연기를 하고 싶은 거야?”
“네에! 아주 나쁜 건 좀 그렇구요. 중간 나쁜 신으로 해볼게요!”
아주 나쁜 신과 중간 나쁜 신의 의미가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노흥기는 아이의 연기를 보고 싶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아는 질질 끌리는 의상 때문에 의상팀의 도움을 받아 카메라 앞으로 향했다.
도착한 아이는 미술팀이 세팅해 둔 신의 의자에 앉아 다리를 동동 구르며 웃었다.
“우와! 높다! 신기해여!”
그 말을 들은 주변 스태프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귀엽다아.”
“나도 저런 딸 낳고 싶어!”
“괜히 딸 바보 되는 게 아니라니까.”
곧 카메라 세팅이 마무리되고.
“자! 레디!”
조감독이 신호를 주자.
“액션!”
이서아의 표정이 180도 달라졌다.
연기하는 아이의 모습은.
“응? 저번에 본 애들이잖아?”
한편으론 장난스럽게.
“인연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니까아.”
또 표독스럽게.
“그래서 이번엔 또 무슨 죄를 지은 인간들일까?”
천진난만하게도 보였다.
멍하니 아이의 연기를 보고만 있던 나는.
“컷!”
조감독의 신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연기를 하는 이서아에게서 <어울림>의 주인공인 ‘현서’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왠지 <어울림>의 어울리는 새 주인공을 찾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