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무조건 하는 성장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탑차 안에서 음식을 준비 중이던 요리사에게 인사를 건네자 환한 웃음이 돌아왔다.
“네! 준비 많이 했습니다! 다들 맛있게 드실 거예요!”
오늘은 고생하는 <망자와 함께>팀을 위해서 세트장에 출장 뷔페를 불렀다.
1인당 꽤 비싼 금액인 곳으로 불렀더니 초밥, 스테이크, 육회, 수육 등등 음식의 퀄리티가 나쁘지 않다.
“정 PD님. 오전 촬영 아직이래요?”
“아니요! 지금 막 끝났다고 합니다!”
정 PD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트장에선 스태프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와! 오늘 출장 뷔페 온다더니!”
“미친! 빨리 줄 서자! 종류 엄청 많아!”
“육회!!!”
다행히도 스태프들은 맛있게 먹으면서 즐거워했다.
역시 맛있는 밥은 꽤 괜찮은 복지에 해당한다.
이렇게도 좋아하니 가끔 특식으로 불러줘야겠다.
“대표님!”
저 멀리 하얀 얼굴의 한다훈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달려왔다.
“아! 다훈아! 잘 지냈어?”
“네! 촬영 너무 재밌어요!”
어느새 한다훈의 옆에 서 있던 도건우는 그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렸다.
“꽤 잘하더라고요? 연기 학원 경력밖에 없다는 녀석이.”
“다행이네요. 자자, 다들 식사하시죠.”
나는 오랜만에 보는 노흥기와 신서영까지 챙겨서는 뷔페를 즐겼다.
인원수를 넉넉히 계산한 덕분에 음식이 모자라는 일은 없었고.
전 스태프들은 남는 점심시간 동안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휴식을 취했다.
이 또한 다른 현장에선 볼 수 없는 장면이었는데, 1시간의 점심시간이 지켜진다는 건 표준근로계약을 한, 우리 현장이라서 가능한 거였다.
배우들은 각자 대기실로, 노흥기는 잠시 눈을 붙인다며 자신의 차로 향했다.
나는 신서영이 지친 얼굴로 근처 벤치에 앉길래 그녀의 옆에 따라 앉았다.
“힘들죠?”
그녀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안 힘들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촬영장이 원래 텃세가 심해요. 다들 자기 밥그릇 챙기기 바빠서인지 유독 그렇더라고요.”
신서영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 팀 중에서 텃세 부리는 분은 없어요. 다 제가 잘 되길 원하셔서 지적하시는 거죠. 그게 이해가 되니까 할 만해요.”
좋은 마인드였다.
“생각하기 나름이긴 하죠.”
“그리고 믿어주는 분들 계시니까 끝까지 포기 안 할 거예요. 대표님이랑 노 감독님 생각해서라도 제가 그러면 안 되죠.”
그녀는 얼핏 내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스스로 다짐하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듯 보였다.
“그래요. 근데 벌써 신 감독님 칭찬하시는 분도 계시던데요?”
양상철이 내게 했던 건 분명 신서영의 칭찬이었다.
“제 칭찬을요? 누가요?”
신서영은 궁금한 듯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나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렸다.
“에이, 비밀이요. 크랭크 업 날 알려드릴게요.”
내가 이 비밀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비밀로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응? 말해주시지. 궁금한데.”
이제부터 그녀가 현장에서 힘들 때면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위해 더 힘을 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봐온 신서영은 크랭크 업 날 분명 스태프들의 칭찬을 받고 있을 것이다.
원래 이쪽 판이 험하고, 일하기 힘들다고 해도 정이 많다.
어리고, 여자라는 선입견을 처음엔 가질 수 있어도 열심히 하면 다 같은 동료로 알아준다.
이토록 고생한 만큼 그녀는 분명 얻는 게 있을 것이다.
*
그 후로 <망자와 함께> 촬영은 속도가 붙었다.
물론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배우들이 초록색 쫄쫄이를 입은 괴수 대역과 싸우는 장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진지한 연기를 해야 하는 등 CG 촬영 중에 현타를 느꼈다는 연락을 받기도 했고.
오랜 세트 촬영에 배우들은 물론이요. 스태프들까지 비타민D 부족으로 고생하기도 해서 현장에 종합 비타민까지 가져다 놓는 일도 있었다.
또 휴차 때 사무실에 온 제작팀이 까다로운 도건우의 커피 취향을 도통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맥심을 추천해줬고.
한 번은 조감독에게서 건네받은 스케줄 표가 이상해 그를 부르기도 했다.
“24일 불지옥 장면 촬영인데 도건우 씨 콜로 되어 있고, 순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요?”
“순서가요?”
조감독은 내가 말한 날짜의 스케줄을 유심히 살폈다.
“으응? 정말이네!”
24일은 도건우의 분량이 없는 장면이었고.
출연 배우들이 비를 맞기 전과 맞은 후의 장면이었는데 맞은 후 장면의 순서가 먼저였다.
이런 순서로 진행하면 촉촉해진 머리와 옷들을 말리느라 촬영장에서 시간을 버리게 된다.
“죄송합니다. 수정해서 다시 보내드릴게요.”
자잘한 실수였으나 누구든 발견하지 못했다면 당일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예. 스태프 공지도 다시 해주세요.”
그 일은 그렇게 잘 넘어갔고.
며칠 뒤 나는 세트장을 다시 한번 찾았다.
배우나 스태프들의 불만은 없나 혹시나 해서 간 것이었는데 다행히 들려오는 것들은 없었다.
그날의 촬영이 무사히 끝난 뒤 예정우가 세트장 불을 꺼야 한다며 돌아다니길래 그의 일을 도왔다.
배우 대기실, 분장실, 의상실 등등 모두 돌아다니며 확인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연출팀이 창고로 사용하던 방을 열어 확인하려던 그 순간.
-으흐흐흑. 흐흑.
방 안에선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침착하게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나도 세트장 귀신을 목격하는 것일까.
방문을 서서히 열었다.
끼이익-.
다행히 안은 불이 켜져 있었는지 열리는 문 사이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어엉! 큽!”
응? 근데 뭔가 이상했다.
원래 귀신이 코 먹는 소리도 내나?
의문을 가진 채 다 열린 문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으아아악!”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대, 대표님?”
안에 있던 건 고진주였는데,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깜짝 놀랐는지 소리를 빼액! 지른 것이다.
눈은 떠지지도 않을 정도로 탱탱 부은 채로 말이다.
잠시 후.
나는 그녀에게 물을 가져다줬다.
그것을 벌컥벌컥 마신 그녀는 코를 팽하고 풀었다.
그러더니 딸꾹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요상한 소리를 내며 말했다.
“흡! 죄송해요. 대표님.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괜찮아요. 좀 진정됐어요?”
“네에.”
“근데 무슨 일 있었어요?”
대충 눈에 그려지긴 했다.
스크립터는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대부분 영화는 시나리오 순서대로 촬영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촬영의 편의성을 위해 효율적으로 순서를 정하는데 그때 이 스크립터의 역할이 중요했다.
스크립터는 흔히 말해 튀는 장면 혹은 옥에 티라고 불리는 장면이 없게끔 촬영의 모든 내용을 기록한 뒤 연결을 맞춘다.
그래야 후반에서 진행되는 편집이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즉, 고진주가 무언가를 놓치기라도 하면 재촬영까지 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었기에 그 역할은 막중했다.
“그, 그게요······.”
고진주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고 보니 며칠 전 내가 지적했던 스케줄은 자신이 조감독에게 그렇게 알려준 것이었고.
최근 현장에서의 자잘한 실수 때문에 아버지인 고덕현에게 혼이 나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흡! 잘못해서 혼나는 거라, 억울하고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왜 울었어요?”
“스탭들한테 미안해서요오.”
아직 20대 초반의 그녀가 겪기에는 현장이 마냥 험하게 느껴져 싫은 만도 한데.
미안하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쓰러웠다.
“진주 씨.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당연한 거예요.”
그녀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 실수를 인정하면서 고쳐나가려고 노력하면 돼요. 그렇게 두 번째 실수를 안 하면 되는 거고. 현장 사람들 진주 씨 힘든 거, 다 알 거예요. 저번에 누가 그러더라고요. 다들 잘되라고 하는 소리라고.”
“그럴까요?”
어느새 그녀의 딸꾹질은 멈춰있었다.
“예. 이번 작품 뭐가 됐든 끝까지 해내면 촬영 감독님도 다음 작품부터는 진주 씨 인정할걸요? 제가 가끔 너무 힘들 때 하는 생각이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고진주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냥 인정해버리면 돼요.”
“그냥 인정하라구요?”
“예. 지금 이 일은 누가 하든 힘든 일이야. 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턴 덜 힘들어요. 내가 못 해서 힘든 게 아니야. 라는 느낌이 들거든요.”
“내가 못 해서 힘든 게 아니야······?”
그녀는 내 말을 곱씹어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아마 당장은 이해하기 힘들지 모르겠으나 영화가 끝나면 그녀는 무조건 성장해있을 것이다.
이건 불문율과도 같은 거니까.
그때.
방문이 확! 하고 열렸다.
“아이! 대표님! 여기서 뭐-!”
한참을 기다려도 내가 오질 않자 직접 찾으러 온 예정우였다.
그런데 우릴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응? 너! 뭐야! 설마 진주 씨 울린 거야?!”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데.
*
“혹시 수중 세트장 잘 아시는 분 있으실까요?”
정 PD의 목소리가 사무실 내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수중 세트장이요?”
“잘 모르겠는데.”
“저도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대부분의 직원이 고개를 저었고.
마침 대표실에서 복사기로 향하던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 저희 남양주 세트 촬영 다 끝나면 2회차 정도 수중 세트에서 촬영해야 할 것 같은데, 몇 군데 전화해보니 이미 일정이 다 꽉 차 있다고 해서요.”
맞다. 그런 장면이 있었지.
그 장면은 허리까지 오는 깊이의 물에 배우가 들어가서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도 CG로 하면 안 되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물의 흐름은 CG로 표현하기가 정말 어려웠고, CG도 기본 베이스가 있어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 이런 경우에는 특수촬영을 전문으로 하는 아쿠아스튜디오를 대여해 진행했다.
문제는 이런 수중 촬영 세트장이 국내에 많이 없다는 거다.
배수 문제 등 여러 가지 설비를 추가해야 할 것들이 많기도 하고, 관리도 힘들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디든 촬영할 곳이 없겠습니까! 제가 꼭 찾아보겠습니다!”
정 PD의 열정 넘치는 다짐을 들으니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촬영은 어떻게 해서든 하면 된다.
내 머릿속이 번뜩이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관리야. 형님이랑 지훈 씨도 있고, 전문 인력을 더 뽑아도 되는 거고······.’
근데 이건 조금 더 생각해 볼 문제긴 해서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그보다 나는 정 PD에게 물을 것이 있었다.
“PD님. 혹시 주변에 일 잘하는 분 없어요?”
정 PD가 호기심을 보였다.
“어? 혹시 아라비안필름 전속으로 PD 충원하시게요?”
“예. 생각하고 있는 영화들이 많아서요.”
“하긴. 요즘 저희 회사처럼 영화 꾸준히 들어가는 회사도 없죠.”
정 PD는 주변에서 괜찮은 사람으로 찾아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베를린에서 사 온 <어울림>의 리메이크를 슬슬 준비해야 할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