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60화 (60/140)

#60화. 독불장군과의 소통

허훈이 홀가분한 얼굴로 서울을 떠난 지 일주일 후.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은 첫 주 스코어 90만을 기록했다.

<투명한 사랑>보다 10만이 높은 수치다.

개봉 전 몇몇 사람들은 우리 영화를 뮤지컬 영화에 여성 원톱 영화라 절대로 흥행하지 못한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90만이라는 숫자를 보자마자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당연히 높은 수치는 우리 영화가 재밌다는 뜻이었고, 관객들의 반응도 좋았다.

[라라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왜 이렇게도 와닿는지 모르겠습니다.]

[언덕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역대급 영상미였다. 역시 고덕현.]

[120분간의 공감. 마지막엔 그냥 눈물이 났다. 가슴 한구석이 아프다.]

[영상도 영상이지만, 음악이 너무 좋아. 나는 내가 뮤지컬을 좋아하는 줄 처음 알았어.]

[라라의 어린 시절을 맡은 아역배우 기억하겠습니다. 대성할 친구네요.]

[윤서 언니도, 라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피아노 장면을 위해 7~8시간을 연습했다고 들었다. 임윤서의 재발견. 그녀는 로코만 잘 찍는 것이 아니었다.]

[라라야. 고생했어. 이제 꽃길만 걸어.]

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영화였고.

영화에서 임윤서의 삶도 언뜻 보였는지 여성 관객들의 폭발적인 성원을 받았다.

극 중 라라가 입었던 의상의 브랜드는 매일 문의가 끊이질 않았으며 임윤서가 집에서만 바른다는 붉은색 섀도는 유행처럼 번졌다.

덕분에 인터넷에서는 ‘요즘 지하철 풍경’이란 제목의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진을 본 나는 이것도 하나의 광기인가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에 앉아 있던 여성들의 옷이, 라라 스타일로 비슷했고, 죄다 눈엔 붉은색을 칠하고 있는 사진이었으니 말이다.

그 사진의 화제성이 시들해질 때쯤 또 한 장의 사진이 등장했다.

바로 내가 찍은 세트장에서의 심령사진.

라라의 아역이었던 이서아가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해 깜찍한 얼굴로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겠다면 꺼낸 것이 화제가 된 것이다.

덕분에 연일 우리 영화의 관심은 끊길 틈조차 없었다.

*

“신 대표!”

사무실에 양상철이 찾아왔다.

“오셨어요? 길은 헤매지 않으셨습니까?”

반가운 그를 대표실로 안내했다.

“그럼요. 그나저나 사무실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하하, 전 사무실은 너무 좁아서요.”

나경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웠다.

“<망자와 함께> 촬영장은 가봤습니까?”

베를린 영화제와 시기가 맞물려 가보지 못했는데, <망자와 함께>는 현재 촬영 중이다.

“아직이요. 곧 가볼 예정입니다. 괜히 제가 가면 다들 불편해하고 그러는 것 같아서요.”

“허허! 이제 신 대표도 그럴 시기가 왔군요! 그 외로움은 익숙해져야 합니다.”

역시 장들은 외로운 법이다.

전생에서 많이 느껴봐서 알고 있다.

“그럼요.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표님은 다녀오셨습니까?”

양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거기 건우도 있고, 다훈이도 있으니 애들 잘하고 있나 가서 한번 봤지요.”

연기 학원을 다니던 한다훈은 <망자와 함께>의 오디션을 봤다.

내 추천이긴 했지만, 노흥기 감독이 직접 그의 연기를 확인한 후 캐스팅했기 때문에 온전히 내 입김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노흥기가 나를 신경 쓸 레벨의 감독도 아니고.

하여튼 한다훈은 캐스팅된 후 화분 엔터와 계약을 했다.

아무래도 누나인 한보배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그녀는 배우에게 소속사라는 울타리가 꼭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현장 분위기는 괜찮았습니까?”

“제가 봤을 땐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노 감독님 말고, 다른 여자 감독님 말입니다.”

여자 감독이라면 신서영인데······.

“신 감독님이요?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문제라기보다는 보통 성격이 아니던데요?”

“예?”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사실 나이도 어리고, 여성 감독에, 연출 경험도 없다면서요?”

“그렇죠. 그래서 혹시 잡음이라도 나올까 걱정했습니다.”

양상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걱정이라면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날 촬영 감독이 큰소리를 한번 냈거든요?”

고덕현이 큰 소리 내는 거야 현장 스태프들에겐 익숙하다.

그러나 소문도 들어본 적 없을 신서영은 어떻게 대처했을지 궁금증이 일었다.

“글쎄, 그 덩치 큰 촬영 감독이 막 소리를 지르니까 가만히 듣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하나 봤더니, 진정하는 기미가 조금 보이니까 가서 물 한 잔을 떠와 건네는 겁니다.”

“물이요?”

“예. 그러더니 화 다 내셨냐고. 촬영 감독이 기분 나쁘지 않게 방금 한 말을 되새기면서 자신이 잘못한 부분은 이것이고, 죄송하게 생각하니 다음부턴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 하지만 감독님도 그렇게까지 감정적으로 화를 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라고 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허. 이것 참.

역시 신서영도 보통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그렇게도 지독한 독불장군 고덕현과 소통을 시도하다니.

“현장 재밌겠네요. 조만간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양상철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허허! 맞습니다! 재밌는 현장이더군요.”

나는 그를 만난 김에 전할 이야기가 있었다.

“혹시 대표님. 요즘에 임윤서 배우 사건 알고 계십니까?”

“어휴! 알다마다요! 내 그 대표 언젠가는 일낼 줄 알았습니다. 이쪽 업계에서도 예전부터 말이 나오긴 했었어요. 임 배우 정도 힘 있는 배우들이 아니어서 그냥 넘어갔던 거죠.”

알음알음 알고 있긴 했나 보다.

“그래서 말입니다. 임 배우가 소송이 끝나면 옮길 소속사를 찾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렇습니까?”

“예. 저한테 믿을 만한 곳을 알고 있냐고 묻는데, 제가 아는 소속사가 하나밖에 더 있습니까.”

“허허! 혹시 화분 엔터 소개해주려고 하는 겁니까?”

그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대표님만 괜찮으시다면요.”

“화분 엔터에서 마다할 배우가 아니지요. 네임 밸류가 있는 배우이지 않습니까.”

그는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후로도 한 시간을 더 이야기하다가 아쉽지만, 약속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길래 양상철을 배웅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뭘 여기까지 배웅을 해줍니까. 바쁠 텐데 얼른 들어가요.”

양상철은 주차된 차 운전석에 올라타려다 갑자기 뭔가가 생각난 듯 손뼉을 짝 쳤다.

“아, 맞다! 내가 그 이야기를 안 했네요! 사실 그것 때문에 온 거였는데!”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럼요! 아주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더니 그가 싱글벙글 웃었다.

“아람이가 글쎄 미국 드라마에 조연으로 캐스팅됐습니다!”

이제 슬슬 전생에선 전혀 없었던 일들이 속속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미국 드라마라니.

스케일이 한 번에 쑥 커진 것 같은 기분이다.

“정말입니까? 와, 이거 진짜 경사네요! 축하드립니다!”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자 그가 손을 내저었다.

“어유. 다 신 대표 덕분입니다! 거기 캐스팅 관계자가 <투명한 사랑>을 보고 연락한 거 아니겠습니까.”

<투명한 사랑>이 외국에 쏠쏠하게 알려졌다는 건 최근 베를린에서 느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근데 그렇게 비중이 큰 역할은 아니라서 나중에 신 대표가 보고 실망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역할의 크기가 중요한가요. 발을 디뎠다는 게 중요하지. 이제 시작인 거 아니겠습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문득 궁금했다.

“그런데 어떤 작품에 무슨 역할을 맡은 겁니까?”

“음, 그게 무슨 슈퍼맨, 배트맨 같은 히어로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중에 초능력을 가진 동양인 역할이고. 제목이랑 다 알려줬는데 제가 못 외웠습니다. 나이가 드니 원.”

순간 나는 뭔가로 머리를 맞은 듯 띵해졌다.

지금 시대에 제작되는 이런 부류의 미국 드라마는 딱 하나다.

“그거 혹시 제목이 <블랙 히어로즈> 아닙니까? 아람 씨가 맡았다는 역할의 이름은 ‘퍼플’이고?”

“응? 맞아요! <블랙 히어로즈>의 ‘퍼플’! 근데 신 대표가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블랙 히어로즈>는 전생에서 전 세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퍼플’은 중국에서 유명했던 여배우가 맡았던 역할이다.

그런데 그 역에 아람이 캐스팅됐다니······.

미래가 확실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망자와 함께> 프리 때부터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대한 말이 많았던 ‘움직이는 숲’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찾은 남양주 세트장은 굉장히 어수선했다.

한쪽에선 추가로 짓는 세트장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망자와 함께>팀이 사용하고 있는 기존 세트장에는 흙을 실은 큰 차들이 계속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예정우와 새로 채용한 직원 윤지훈이 다가왔다.

“여어! 대표님!”

“예. 두 분 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왜 나만 있을 때랑은 인사가 다르지? 맨날 일 이야기부터 했으면서, 지훈이 있다고 걱정하는 것 좀 보소!”

“제가 또 언제 그랬습니까.”

예정우 기분에 맞춰 살살 달래니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먼저 업무 이야기를 꺼냈다.

“추가 세트장은 기존 세트장이랑 동일하게 120평짜리 두 군데로 나눠질 거야. 6월 말 완공이니까 그때 되면 굴릴 수 있는 120평짜리 세트장이 네 군데가 되는 거지.”

지금은 3월 중순이었다.

“그럼 한 3개월 남았네요?”

“그렇지.”

그때 우리 앞으로 지나가는 지게차가 작은 나무들을 뿌리째 옮기고 있었다.

“숲은 세팅 잘 돼가요?”

예정우가 혀를 내둘렀다.

“이번에 사용된 흙이랑 나무, 풀들이 자그마치 600톤이란다. 600톤.”

“원래 이야기한 것만큼 썼네요. 정 PD님이 예산 짠 거 보니까, 전체 제작비에서 크게 오버되지도 않을 것 같고. 그럼 됐죠.”

우리는 ‘움직이는 숲’을 세팅 중인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지나가던 미술팀이 나를 보더니 꾸벅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예. 고생하십니다.”

돌아서서 멀어지는 그녀의 옷에는 온통 흙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보이는 세트장 내부에는 상상으로만 생각했던 그 ‘움직이는 숲’이 그대로 옮겨져 있었다.

바닥에 깔린 흙엔 풀과 나무들이 심어진 모습이었고, 흙을 다지기 전 바닥에 시설물을 설치해 고저 차이를 줬는지 중간중간 언덕이 존재했다.

“이거 매일매일 물도 줘요?”

“응. 세트팀이랑 미술, 소품팀이랑 가끔은 나까지 물 조리개 들고 돌아다니면서 줘. 나무들 시들면 안 되잖냐.”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네요.”

“그렇지 뭐. 이 장면만 끝나도 속이 다 시원하겠다.”

이번엔 그곳을 나와 옆 세트장으로 향했고.

숲이 있던 옆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높은 층고의 세트장은 원활한 CG 작업을 위해 사방이 그린 천으로 쌓여 있었다.

이곳에선 2주 후부터 <망자와 함께>팀이 들어와 본격적인 세트 촬영을 진행할 것이다.

여기서 분량이 끝나면 옆으로 이동해 ‘움직이는 숲’을 촬영하고, 그 시간에 이곳엔 다른 세트가 지어지는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원래 세트 촬영이 이랬다.

그래서 세트팀은 촬영팀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

우리는 두 곳의 세트장을 모두 둘러본 뒤 밖으로 나왔다.

“형님.”

예정우는 순간 움찔하더니 양팔을 감쌌다.

“뭐지? 나 왜 막 방금 소름 돋고 그런 거지?”

일 시키려는 건 어떻게 알고.

촉 하나는 기가 막힌다.

“처음에 여기 땅 살 때 이만 평, 살 수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근데 대표님이 만 평만 사자면서.”

“여기 이제 너무 좁지 않아요?”

예정우가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소름이 돋더라니. 지훈아. 내일 여기 아버님께 연락드려라. 계약하러 가자.”

“계약이요?”

윤지훈이 되묻자 그가 답했다.

“대표님이 세트장 부지 넓히고 싶으시다잖아.”

나는 그런 그를 보고 그저 씩 웃었다.

이제 예정우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손발이 꽤 잘 맞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렇게 2주가 지나고, 날이 제법 따뜻해졌을 무렵.

<망자와 함께> 팀은 로케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세트장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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