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59화 (59/140)

#59화. 고발하겠습니다

다음날부터 필름마켓의 운영은 삼총사(나경, 이 과장, 전해성)에게 일임했다.

첫날 하는 걸 살펴보니 내가 없어도 곧잘 할 거라는 판단이었고,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생에서 영국의 교육용 애니메이션이었던 <어울림>을 찾는 것이었다.

이맘때쯤 이 애니메이션의 리메이크 판권을 한국의 한 제작사가 산 뒤 실사로 재탄생시켰고.

완성된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한국은 물론 역으로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으며 하나의 신드롬이 되었다.

<어울림>은 동물, 곤충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한 소년이 주인공인 휴먼 드라마 장르였는데.

주 타격 층을 아이들로 잡으면 얼마나 큰 성공을 일굴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10세 이하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던 그 영화를 이번 베를린에서 꼭 찾고 싶었다.

그리고 혼자서 마켓을 돌아다닌 지 2시간이 지났을 무렵.

나는 다행히도 익숙한 포스터를 찾을 수 있었다.

아기 코끼리와 이마를 맞대고 있는 남자아이의 그림이 따스하게 그려진 포스터였다.

“안녕하세요. 리메이크 판권을 좀 사려고 하는데요.”

<어울림> 부스에 있던 세일즈 담당자는 교육용 영화에다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별 기대가 없던 눈치였고.

잠깐의 대화 끝에 우리는 서로 만족스러운 적정 금액을 합의할 수 있었다.

그 금액은 3천만 원이었다.

*

영화제 일정까지 성공적으로 소화한 뒤 우리는 귀국길에 올랐다.

베를린에서 많은 일이 있었으나 그중 가장 큰 보상으로 돌아온 것은 필름마켓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삼총사는 마켓에 참여한 3일간 총 23개국에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을 팔았다.

아흐마드가 다녀간 뒤 급속도로 높아진 관심과 허훈의 <투명한 사랑>을 알음알음 알고 있던 바이어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수치였다.

물론 삼총사가 찾아온 모든 바이어들에게 성심성의를 다한 결과이기도 했으니 성과금은 한국에 도착해 정당한 금액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숙소 근처 바에서 조촐한 축하 파티를 했고.

수상을 한 건 아니었으나 기자회견과 무대인사 등 대부분의 일정이 수월했기에 임윤서와 스타일리스트도 함께했다.

아, 참고로 한 실장은 첫날 허훈과의 술자리에서 제대로 뻗어 이틀을 술병으로 고생했다.

그러다 문득 자존심이 상했는지 자신이 먼저 술자리를 다시 제안했는데, 스스로 무덤을 파는 객기였다.

그는 그렇게 다시 뻗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같은 방을 쓰던 이 과장 말에 의하면 그는 마지막 날까지 숙소에서 골골대기 바빴다고 한다.

하긴 귀국행 비행기 안인 지금도 옆에서 끙끙거리며 자고 있다.

그리고······.

나는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장혜리에게 한 통의 문자를 보냈다.

[기자님. 저희 이제 이륙합니다. 준비하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임윤서 씨! 베를린 영화제의 분위기는 어떠셨습니까?!”

“이번 영화의 흥행을 어떻게 예측하십니까?”

“초청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기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베를린 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로 한국 영화가 초청됐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나라 입장에선 경사였고.

임윤서가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탑은 탑이었으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한 실장은 임윤서 뒤에서 힘없이 비척비척 걷다가 기자들을 밀어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저 집에 가고 싶은 얼굴이었고, 속도 안 좋은 것 같다.

그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검은색 생머리를 휘날리며 도도하게 걷던 임윤서는 쇄도하는 질문에 멈춰 서서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 모습을 먼발치서 보고 있던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게 싱긋 웃어 보이더니 기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영화제는 너무 완벽했어요. 제 인생에서 큰 반환점이 될 겁니다.”

한 실장은 그녀에게 거기까지 하라는 듯 앞을 막아섰다.

그의 얼굴이 점점 새파래지기 시작하자 임윤서는 사전에 준비한 발언을 또박또박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아, 그리고 기자님들 저는 오늘.”

한 실장이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봤을 땐 이미 늦었다.

“NX엔터를 고발하겠습니다.”

“뭐?!”

당황한 한 실장은 놀라기 바빴고.

기자들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예?!”

“임윤서 씨!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동안 소속사와 갈등이 있으셨다는 겁니까!”

뭐가 됐든 한 실장은 이 자리를 얼른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너, 입 다물고, 빨리 따라와!”

그러다가 단전 어딘가에서 갑자기 밀려드는 뭔가를 느꼈는지.

“우욱!”

임윤서의 손목을 황급히 놓고, 자신의 입을 막았다.

결국 한 실장은 그녀의 입을 단 한 순간도 막지 못했다.

“이유는 곧 자세히 알게 되실 거예요.”

싱그러웠던 임윤서의 웃음에는 어느새 독기만이 가득했다.

임윤서의 발언 이후 각 신문사의 기자들은 추측성 기사를 일제히 쏟아냈다.

『임윤서, 충격 고백. NX엔터 고발하겠다』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로코의 여왕 임윤서의 독기 어린 눈빛』

『임윤서 측 소속사와의 갈등 암시. 정면돌파 하나』

임윤서와 같이 만났던 박재익 변호사는 우리가 귀국한 당일 지금까지 모아둔 증거들과 함께 고소장을 제출했고.

장혜리는 준비 중이던 기사를 올렸다.

『(단독) 배우 임윤서의 입장 발표. NX엔터의 만행 나에게 지옥이었다』

[배우 임윤서가 소속사 대표를 고소했다.

임윤서는 인터뷰를 통해 “소속사 NX엔터는 지난 2년 동안 자신을 수직적인 관계로만 대해왔다. 또 집 앞과 핸드폰을 수시로 감시하는 등 억압적인 관리를 받았으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중략)

마지막으로 임윤서는 “후배들은 이런 불공정 계약에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한다.”라며 끝까지 싸울 것을 밝혔다.]

기사를 접한 대중들은 분노했다.

[뭐야? 진짜로 그 임윤서가 저런 대접을 받았다고?]

[소속사 입장 안 올라오는 거 보니까 맞나 보네요.]

[찾아보니까 NX엔터 대표 얼굴 진짜 심술 맞게 생겼네.]

[임윤서가 말을 좀 순화한 것 같은데? 인터뷰를 저렇게 했으면 더 심한 일이 있었을 거임.]

물론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사건이었고, 임윤서의 일방적인 인터뷰였기에 중립을 유지한다는 반응도 있었다.

그리고······.

이 관심은 자연스럽게 우리 영화로 이어졌다.

[임윤서 베를린 영화제 다녀오지 않았나요?]

[저도 들었음. 23개국인가 팔렸다던데. 재밌나?]

[대충 보니까 뮤지컬 영화던데.]

[임윤서도 하필이면 안 팔리는 장르를 찍었네.]

[그래도 연기 하나는 잘하는데, 한때 로코의 여왕이었잖아요.]

[다른 건 모르겠고. 그래서 그 영화, 개봉이 언제입니까?]

*

“야! 한 실장! 너 일 처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이 자식이! 죄송하다면 다야! 네가 사람 더 필요 없다면서!!”

박 팀장은 화를 참지 못하고, 근처에 있던 머그잔을 던져버렸다.

퍽-!

한 실장은 피할 새 없이 머그잔을 그대로 맞았고.

그의 이마가 찢어지면서 생긴 상처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표님 얼굴을 어떻게 보냐고!! 아니 그건 둘째치고, 최 의원님한테 공사 끝났다고, 말씀 다 드려놨는데, 어떻게 할 거야?! 어?! 제대로 했다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제가 봤을 땐 누군가의 영향을-.”

“이이! 미친놈이! 그런 거 감시하라고 너 붙인 거잖아! 네가 출국하기 전에 뭐라고 했어? 재계약 준비나 해놓으라며!!”

이번엔 상대방이 묵묵부답이자 박 팀장은 더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빨리 뭐라도 엮어서 기사 내! 이 자식아! 윤서가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지 발로 들어오게 하란 말이야!”

한 실장은 피가 흘러내리는 이마를 붙잡은 채로 허리를 숙였다.

“예. 팀장님.”

박 팀장은 그가 나간 뒤에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문을 향해 온갖 집기류를 던졌다.

“으아! 진짜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

“역시가 역시네요.”

NX엔터가 정식 입장을 반박 기사로 올렸다.

그 뒤로는 악성 루머 기사들이 앞다투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임윤서의 가족, 전 남자친구, 클럽에서의 목격담 등등.

추잡스러운 내용의 그 기사들은 하나같이 익명의 제보로 교묘하게 출처를 숨기고 있었다.

익명의 제보자가 누구인지는 뻔했다.

-반박 기사는 다 준비해뒀으니 NX엔터 측에서 기사 올라올 때마다 바로바로 올릴게요.

우리는 이미 그들의 만행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었다.

베를린에 가기 전.

임윤서와 장혜리는 독대해 미리 인터뷰를 진행했고.

장혜리는 소속사에서 그녀를 옭아맬 수 있는 건수들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물었다.

임윤서가 모두 솔직하게 답해준 덕분에 그녀가 반박 기사를 꼼꼼히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즉각 대응하면 임윤서로 향하는 피해는 덜 수 있다.

또한 대중들은 끊이지 않는 자극적인 기사에 관심도가 식을 틈이 없을 것이다.

이건 내가 딱 원하던 그림이었다.

임윤서가 소속사를 나올 수 있게 함과 동시에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도 홍보할 수 있는 그런 그림.

당분간 법적 분쟁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녀에게도 이편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임윤서 사건이 한창 뜨거웠던 2주 뒤.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이 첫날 스코어 15만으로 화려하게 개봉했다.

그날 우리는 영화 개봉을 축하할 겸 근처 삼겹살집을 예약한 뒤 밥을 먹었다.

어느새 아라비안필름의 직원은 나까지 11명이었고.

“와, 우리 회사 직원 많다!”

사무실이 오랜만인 예정우가 그 수를 보고 놀랐다.

“점점 더 늘려가야죠.”

내 말에 예정우가 기특하다는 눈빛이다.

“오올. 이제는 진짜 대표님 포스 좀 나는데?”

그럼 언제는 아니었나.

옆에 있던 나경은 내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대표님. 근데 성과금을 왜 이렇게 많이 주셨어요?”

나는 그녀와 이 과장에게 약속한 대로 성과금을 지급했다.

나경은 건당 60만 원으로 1,380만 원을.

이 과장은 건당 20만 원으로 460만 원을 계좌로 쏴줬다.

나경은 전해성과 나누기로 했으니 건당 금액을 조금 더 높인 것이고.

이번 필름마켓에서 벌어들인 수익이 17억 정도였으니 많은 돈도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더 챙겨주고 싶었으나 다른 직원들도 있으니 나중에 연말 보너스 식으로 모두에게 나눠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생했잖아요.”

“흐음. 그래두요······.”

“한국에서도 잘해달라고 드린 겁니다.”

그 말에 나경은 눈을 부릅떴다.

“역시! 알겠습니다! 아라비안필름에 뼈를 묻겠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정우가 다 먹기 전에 얼른 고기를 많이 먹으라고 일러두곤 허훈에게 물었다.

“감독님. 이번엔 좀 쉬시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만간 제주도에 가 있을 예정입니다.”

“오, 제주도 좋은데요? 머리 좀 식히고 오세요. 얼마나 계시려고요?”

“그게, 말입니다.”

그의 분위기가 일순 바뀌었다.

“<처절한 인생> 완고 나올 때까지 안 올 겁니다.”

응? 쉬러 가는 거 아니었어?

그의 눈빛이 또 광기로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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