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독보다 영화사 대표님-58화 (58/140)

#58화. 험난하지 않은 여정

한 실장은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허훈과의 대작을 시작했다.

전생의 영화판에선 떠도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허훈에게 술로 덤비면 삼일 뒤에 일어난다는 무시무시한 소문.

그도 그렇게 될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아까 허훈의 눈빛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최근 촬영 때문에 참아왔으니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실장은 그에게 맡겨 두고, 우리는 숙소에 짐을 푼 뒤 쉴 틈 없이 바로 필름마켓이 열리는 그로피우스 바우(Gropius Bau)로 향했다.

마켓은 내일부터였으나 우리 부스의 위치 확인과 기본적인 세팅을 해놔야 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영화제에 왔지요오~”

가는 길에 탄 택시에서 나경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 과장의 입은 귀에 걸려있었고.

나경이 성과금을 받으면 나눠주기로 한 전해성은 그녀의 콧노래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그저 웃음이 났다.

이다지도 신이 난 모습이라니.

잘 팔리기만 한다면 두둑이 챙겨줘야겠다.

도착한 그로피우스 바우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돋보였다.

그곳은 원래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건물로 부산 센텀의 필름마켓과는 또 다른 웅장한 분위기였다.

부스를 찾아 도착한 우리는 내일 왔을 때 정신없지 않도록 프린트해 온 포스터를 가판대에 꽂아 놓고, 바이어와의 미팅 시 필요한 종이와 펜, 음료수와 다과 등을 부스 이곳저곳에 세팅해 놓았다.

얼추 준비가 끝난 뒤 나경은 확인할 게 있었는지 한쪽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한참 뭔가를 하던 그녀는 갑자기 실눈을 뜨고 노트북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으응?”

잠깐 뭔가를 생각하더니.

“대, 대표님! 바이어! 바이어!”

말을 더듬으며 날 찾았다.

“예?”

느닷없는 소란에 이 과장과 전해성도 그녀를 쳐다봤다.

“바이어 연락 왔어요! 내일 10시에 미팅하고 싶대요!”

이 과장과 전해성은 그녀의 말에 부스가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려다 주변 부스를 의식하곤 목소리를 낮췄다.

“와! 할 수 있다아.”

“나경 씨! 약속 꼭 지켜야 돼요.”

목소리를 낮췄으나 근처 부스 담당자들은 고개를 빼꼼 내밀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고.

나는 스리슬쩍 부스에서 발을 뺐다.

절대로 창피해서 그런 건 아니다.

*

갈색 머리의 푸른 눈을 가진 벤트는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샤워를 했고.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었으며 미리 다려놨던 단정한 정장까지 차려입었다.

베를린에 본사를 둔 배급사에 다니던 벤트에게 오늘은 특별했다.

항상 자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베를린 영화제 기간이기도 했고.

자신이 참가하는 유럽 필름마켓이 시작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차를 운전하고 가면서도 입가에 미소는 떠나지 않았다.

‘오늘 당장 나타나려나.’

그의 흥이 잔뜩 오른 이유는 무릇 필름마켓의 개최뿐만이 아니었다.

매년 필름마켓에는 큰 손들이 참여하곤 했는데, 이번에 떠도는 소문은 사이즈 자체가 달랐다.

모든 세일즈 담당자들을 설레게 한 사람은 바로 아랍 에미리트의 왕세자.

물론 그가 직접 참여하는 것은 아니고, 왕세자의 대리인이 영화를 사기 위해 베를린으로 넘어온다는 소식이었다.

마냥 소문으로만 치중하기엔 마켓 관계자들로부터 퍼진 이야기라 신빙성이 있었다.

어느새 필름마켓에 도착한 벤트는 차를 주차해놓고, 자신의 부스로 향했다.

조금은 촐랑거릴 정도로 가벼운 발걸음이던 그는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올해 자신의 배급사에서 야심 차게 가지고 나온 영화는 총 3편.

아랍 에미리트의 왕세자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돈을 펑펑 쓰는 거로 유명했다.

그리고 당연히 벤트는 그의 대리인이 살 영화가 자신들의 영화일 거라, 확신했다.

고로 이걸 비싼 값에 팔면 당연히 자신의 승진은 보장된 것이다.

‘승진하면 차부터 바꿀까.’

행복한 고민이었다.

부스에 도착한 그는 왕세자 대리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스 이곳저곳을 정리했다.

그때.

어디선가 희희낙락거리는 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는 옆 부스로 어제부터 소란스럽던 아시아인들이었다.

이상한 뮤지컬 영화를 들고 온 것 같던데 뭐가 저리도 신이 나는지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 벤트는 어쩐지 그들이 불쌍해 보였다.

마켓이 끝나도록 아무 성과 없이 자리만 지키다 자국으로 돌아가는 세일즈 담당자들이 어디 한두 명인가.

‘그래. 지금 많이 웃어둬라.’

그러나 벤트는 정확히 1시간 뒤.

옆 부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50만 달러면 살 수 있습니까?”

‘저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

다음날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조식을 든든하게 먹고, 필름마켓으로 향했다.

마켓은 정확히 9시에 오픈했고, 오픈 시간에 맞춰 바이어들이 하나둘 건물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으아. 떨려.”

나경은 어깨를 으슬으슬 떨며 잔뜩 긴장했으나 그 모습이 무색하게 우리 부스는 오전 10시가 될 때까지 찾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워싱>을 팔던 태국인 담당자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나경과 이 과장, 전해성은 지나가는 바이어들에게 호객행위까지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나경 씨. 너무 심란해하지 말아요. 그래도 10시에 잡힌 미팅이 있잖아요.”

어깨가 축 늘어진 나경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전 미팅까지 신청한 걸 보면 분명 우리 영화에 관심이 있는 분이겠죠?”

“그럼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시가 다가오자 삼총사(나경, 이 과장, 전해성)는 다시금 긴장하기 시작했다.

“재민 씨. 제가 영화 설명해 드릴 테니까 옆에서 시놉시스랑 예고편 잘 챙겨주세요.”

“넵!”

“그리고 해성 오빠는 옆에 계시다가 제가 잘 못 알아듣는 부분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혹시라도 계약하신다고 하면 같이 봐주시고요!”

“알겠어요!”

삼총사는 똘똘 뭉쳐 전의를 다졌다.

바이어들은 영화가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당일 계약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괜히 그들의 사기를 꺾어 좋을 게 없다.

드디어 10시가 되기 5분 전.

삼총사는 부스 앞으로 나가 쭈르륵 선 다음 바이어가 도착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때 저 멀리 딱 떨어지는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우리 부스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중동 국가의 사람인 것 같았는데.

턱 주변을 감싸고 있는 수염이 잘 정리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설마 저 사람이려나.

싶었는데 그는 딱 우리 부스 앞에 섰다.

그리고 능숙하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여기가 아라비안필름의 부스 맞습니까?”

삼총사는 동시에 대답했다.

“네! 잘 찾아오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성과금을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50만 달러면 살 수 있습니까?”

모든 여정이 험난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테이블에 앉자마자 시작된 그의 갑작스러운 가격 제시는 황당했다.

“에, 에?!”

저 봐라.

그 똑 부러지던 나경이 말까지 더듬지 않았나.

50만 달러라고 하면 지금의 환율을 천 원으로만 계산해도 5억이었다.

지금 시대의 영화들이 5천 ~ 2억 정도에 팔렸던 걸 보면 엄청난 금액이다.

그런데 무슨 기름 국 왕자라도 되나.

저렇게 큰 금액을 입에 담는데 표정이 아주 평온했다.

필름마켓에 임하는 보통의 바이어는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신경전을 벌인다.

그러니 지금의 광경은 거의 볼 수 없는 희귀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나경은 자신의 예상치를 한참 벗어난 금액에 난처한지 나를 쳐다봤다.

이건 자신이 협상할 금액의 크기가 아니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나는 당연히 돈을 준다는데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사기를 칠 생각도 없다.

5억은 받되 이후 유통되면서 발생하는 수익의 배분을 포기하면 얼추 계산이 맞았다.

“예. 5억이면 MG(Minimum Guarantee)가 아닌 단매(Flat Deal)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까부터 이상했는데 영화를 처음 사보는 사람인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필름마켓도 오늘에야 발을 들인 것 같은데······.

내가 추가 금액 없이 사갈 수 있다고 풀어서 설명하자 그제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지금 당장 계약이 가능합니까?”

고구마 없는 쿨 거래 진행에 삼총사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

아흐마드는 어제 갑작스러운 지시로 베를린 땅을 밟았다.

왕세자를 보필하던 자신에게 내려진 지시는 유럽 필름마켓에서 한 영화를 사 오라는 것.

혹자들은 이 지시를 뜬금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왕세자를 옆에서 쭉 봐 온 아흐마드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왕세자는 최근 1년 새 어떤 가수에게 푹 빠져있었다.

그녀들은 한국이라는 아시아의 나라에서 온 네 명으로 그 시점은 왕세자가 유명 팝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미국에 갔을 때부터였다.

그는 전용기를 타고 다녀온 뒤부터 ‘그린 애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잦아졌다.

왕세자는 그중에서도 아람이라는 멤버를 가장 좋아했는데.

온갖 선물들을 보내면서도 부끄러운지 직접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점점 그녀에 대한 팬심이 커진 왕세자는 한국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아람이 한국에서 찍은 한 영화를 발견했을 땐 환호까지 질렀다.

그는 그 영화를 제작한 회사 이름을 유심히 살피더니 아람이 하는 연기를 볼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영화사라며 마음에 새겼다.

자연스럽게 한국 영화로 관심이 넓어진 그는 이번 유럽 필름마켓에 아라비안필름이 영화를 팔러 온다는 소식까지 들은 것이다.

아흐마드는 마켓을 빠져나온 뒤 왕세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흐마드! 그래. 영화는 샀어?

“예. 왕세자님. 다행히도 적절한 가격에 구매했습니다.”

-잘했어! 그래서 얼마에 샀는데?

“50만 달러에 샀습니다.”

전화기 너머 왕세자가 화들짝 놀랐다.

-뭐어?! 그런 푼돈으로 영화를 살 수 있는 거야?!

아흐마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라비안필름 쪽에서 신경을 많이 써줬습니다. 계약 기간도 넉넉하고, 추가 금액 없는 걸로 계약 완료했습니다.”

왕세자의 들뜬 목소리가 이어졌다.

-역시! 아람을 알아본 회사는 다를 줄 알았다니까!

*

아흐마드는 계약을 완료한 뒤 흡족한 얼굴로 우리 부스를 빠져나갔다.

그 계약은 유럽 필름마켓이 오픈한 지 1시간 만의 벌어진 초유의 사건으로 우리는 전체 부스 중 가장 빠른 계약을 한 부스가 되었다.

그리고 이 계약 건은 빠르게 주변 부스와 바이어들에게 퍼졌다.

그 결과······.

“어어!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재민 씨! 여기 시놉시스 좀 가져다주실래요?!”

“넵! 해성이 형! 여기 뭐라고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올해 유럽 필름마켓에서의 첫 계약이자 5억이라는 큰 금액에 팔렸다는 소식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파리만 날리던 우리 부스는 바이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고.

삼총사와 나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날 우리 팀은 총 10개국의 바이어와 계약하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고.

하늘 높이 오른 삼총사의 사기는 마켓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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