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성과금으로 드릴게요
장혜리는 최근 핫한 배우의 열애설 제보를 받고, 그 배우의 집 근처에서 잠복 중이었다.
“아니, 다 큰 성인끼리 연애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이런 걸 왜 잠복까지 해서 취재를 해오라는 거야? 그냥 밝히면 축하합니다. 하고 말면 안 되나?!”
불만이 가득한 장혜리였지만, 아직 김 선배의 지시를 어길 짬은 아니었다.
“그때가 좋았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
<투명한 사랑>의 영화제 수상 소식을 단독으로 올렸을 때의 그 쾌감이란.
그녀는 이렇게 연예인들의 러브스토리나 취재하려고 연예부 기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기사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신은 연예계의 치부라든지.
부당한 일을 당하는 이들의 사연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파헤치고 싶었다.
“휴우.”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던 그녀의 패딩 호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래 성격 급한 김 선배의 닦달 전화가 올 때도 됐지.
그녀는 누구에게 온 것인지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받았다.
“여보세요?”
-장혜리 기자님?
김 선배는 아니었으나 목소리가 익숙했다.
“예. 맞습니다. 누구세요?”
-저 신바드입니다.
장혜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에, 예?”
-아라비안필름 신바드 대표요.
“대표님?!”
-예. 부탁드릴 게 좀 있는데, 통화 가능하세요?
“아아! 그럼요!”
습관처럼 수첩부터 꺼내던 그녀 눈에 누군가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
그토록 기다리던 열애설의 주인공인 남배우가 그녀의 차 앞을 지나가고 있던 것이다.
장혜리는 잠깐 고민했다.
저 배우를 쫓을 것인가.
신바드와의 통화를 이어갈 것인가.
결정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표님. 메모할 준비까지 완료했습니다. 말씀하시죠.”
그녀는 1년 전과 같이 가슴 뛰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
한 실장은 임윤서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주택 거실에 난 창문을 올려다봤다.
강남 주택가에 있는 그녀의 집은 이렇게 픽업할 스케줄이 없는 날에도 가끔 찾았다.
임윤서가 자신들의 수법에 제대로 말려들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나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순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차가 집 주변에 주차되어있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을 느낄 것이다.
그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빨아들인 후 내쉬려는데.
지잉-.
지잉-.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한 실장! 그래서 베를린 어떻게 하기로 했어?
회사에서 배우 쪽을 총괄하고 있는 박 팀장이었다.
“제작사 쪽에서 웬만하면 배우 쪽 스태프 최소로 해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렇긴 했는데, 못해도 3명은 데리고 가야 하지 않겠어?
“3명까진 필요 없을 것 같고, 저랑 메이크업해 줄 애 한 명만 붙여주시면 될 것 같은데요?”
-그걸로 괜찮겠어? 괜히 따라붙는 기자들한테 윤서가 이상한 소리 할 수도 있고, 그렇잖아.
한 실장은 다시 주택을 올려다봤다.
창문 너머로 살짝 젖혀져 있던 커튼이 급하게 여며지는 모습이 보인다.
“괜찮아요. 윤서 갔다 오면 바로 재계약할 수 있게 준비나 해주세요. 작업 제대로 했잖아요?”
그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비릿하게 웃었다.
*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의 후반이 완료됐다.
“나경 씨. 부스 임대는 완료된 거죠?”
“네. 부스 임대 완료했고, 배지랑 가서 사용할 용품들 싹 다 준비해뒀습니다.”
이번 베를린 영화제에선 할 일이 많았다.
<혐오스런 라라의 일생>의 초청 일정도.
수출을 위한 첫 부스 운영도.
마지막으로 리메이크 판권을 사고 싶은 영화도 있었으니 6박 7일의 일정이 그야말로 빠듯했다.
다행히 나경의 영어 실력과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나 하나를 가르쳐주면 척척해내서 준비과정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이 과장은 전생에서도 영어 때문에 애를 꽤 먹었다.
그래도 영화사에서의 영어는 필수였기에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다.
이번에 나경과 이 과장을 마켓으로 데리고 가는 이유는 이후부터의 필요한 행사에 둘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해외로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기에 내가 꼭 직접 가야 하는 자리에만 나설 생각이었다.
“마켓 측이 주최 전에 올해 라인업을 정리해서 바이어들한테 돌릴 거예요.”
나경과 이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걸 본 바이어들이 관심 있는 영화사에 미리 연락해서 미팅 일정을 잡기도 하거든요? 현지에선 정신이 없으니까.”
나경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저희한테도 연락 올 수 있겠네요?”
누가 봐도 잔뜩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클 텐데.
사실 아라비안필름 입장에서 이번 마켓 출전은 실험적인 행동이었다.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요. 우리는 뮤지컬 영화에다 예술영화 분위기가 강해서 관심을 끌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럽에서 아시아 영화라고 하면 보통 액션이나 공포 영화가 잘 팔리거든요. 그들도 자국에서 돈이 되는 영화를 사 가니까요.”
해외에서 확실히 대박 나는 <망자와 함께>를 제대로 팔기 위해서는 그전에 시행착오를 한 번 겪는 것이 낫다.
그런 의미에서 베를린 영화제는 경험을 쌓기 위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경은 내 말에 투지가 더 불타올랐다.
“에에? 아니에요! 저는 벌써 포기 안 할래요! 제가 꼭 잘 팔아볼게요! 그것도 다 영업능력이 어떤지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니겠어요?!”
이건 맞는 말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잠깐 느꼈었지만.
마켓에서는 세일즈 담당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많이 좌지우지된다.
조금 더 투지를 불태워 줘도 괜찮으려나.
“그럼 나경 씨. 이번에 어떤 국가의 배급사든 팔 때마다 성과금으로 드릴게요. 어때요?”
그 말에 나경은 당연히 난리가 났고.
“우오오! 정말이시죠?!”
옆에서 조용히 서류 정리 중이던 이 과장이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대표님! 저, 저는요?!”
당연히······.
“재민 씨도 드려야죠? 대신 나경 씨와 차등은 두는 조건으로요.”
둘의 모습이 너무 재밌어서 놀려보려다가 그만뒀다.
나경과 이 과장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재민 씨! 이번에 차 한번 뽑아봅시다!!”
아니, 저기요. 그건 좀.
*
출국 날이 되었다.
임윤서와 그녀의 스태프 2명.
허훈, 나경, 이 과장과 나.
그리고 언어 능력자가 한 명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전해성에게도 일당을 주는 조건으로 가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그는 언제 자신이 돈까지 받으면서 베를린 영화제를 가보겠냐며 흔쾌히 허락했고.
이번에도 협찬을 진행해 준 나앤케이의 의상과 함께 순탄하게 출국할 수 있었다.
허훈은 그녀의 맞춤 정장을 입으며 이 맛에 영화를 찍는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임윤서와 그녀의 스태프들은 영화제 일정에 맞춰서 와도 상관없었으나 그녀가 꼭 우리와 같이 가야겠다고 꾸역꾸역 소속사에 어필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한국보단 베를린이 소속사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테니 그랬을 것이다.
중간중간 한 실장이라는 임윤서 매니저의 거슬리는 행동들을 직접 보니 그녀가 얼마나 시달렸을지 이해가 갔다.
“감독님? 좀 떨어져서 걸으시죠? 괜히 붙어 있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떡합니까.”
허훈은 그저 임윤서의 뒤에서 심사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는 것뿐이었다.
되게 유난스럽네. 정말.
임윤서도 그런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허훈은 혼이 난 강아지처럼 축 처져서는 그녀와의 거리를 벌렸다.
한 실장은 베를린에 도착해서 발을 묶어둘 계획이었으니 그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비행기 안에서도 유난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그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나는 한 실장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우리와 떨어져 앉아 있던 임윤서를 찾았다.
“한 실장. 평소에 술 좋아하는 건 확실한 거죠?”
“네. 술 환장하는데, 조금 걸리는 게 일할 때는 안 먹어요. 아마 베를린에서는 쭉 업무시간이라 생각하고, 안 먹을 확률이 높긴 할 것 같은데······.”
“우선 알겠어요.”
그리고 이번엔 허훈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네! 대표님!”
신이 난 그는 이미 기내에서 제공되는 모든 종류의 술을 다 주문한 뒤 세팅해 놓은 뒤였다.
허훈은 혹시 내 부탁을 잊은 걸까.
“제가 그때 부탁드린 거 잊으신 건 아니죠?”
“전혀요! 먹고 한숨 자려고요. 그럼 또 개운한 기력으로 먹을 수 있어서 더 잘 들어갑니다!”
그래. 잊을 리가 없지.
그는 전생에서도 소문난 애주가이자 주당이었다.
지금은 젊어서 그런지 더 잘 먹는다.
“그럼 이따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훈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앞에 놓인 샴페인을 원샷 했다.
어우. 내가 다 속이 울렁거린다.
우리는 약 12시간의 비행 후 파리에서 1박을 했고, 다음 날 아침 일찍 2시간을 추가로 비행한 뒤에야 베를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경이 영화제 측과 며칠간 연락을 주고받아 예약한 숙소로 향했고.
임윤서, 허훈은 1인 1방.
나경과 스타일리스트, 이 과장과 한 실장, 전해성과 나는 2인 1방으로 체크인을 완료했다.
우리는 모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약속대로 임윤서가 나를 보고 한쪽 눈을 찡긋거리더니 바람을 잡기 시작했다.
“다들 이제 뭐 하세요?”
“저희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다들 피곤하실 텐데 푹 쉬세요. 영화제 일정은 3일 뒤부터 시작이니까요.”
여기서 ‘저희’는 나경, 이 과장, 전해성과 나까지를 지칭하는 것이었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3일간의 자유시간이 생긴 셈이었다.
임윤서는 일부러 나긋한 목소리로 한 실장을 불렀다.
“한 실장님. 저 3일 동안 방에서 안 나올 거니까 은희랑 관광이라도 좀 하세요. 최근에 바쁘셨잖아요.”
스타일리스트의 이름이 은희였는지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언니! 정말 그래도 돼요?”
“그래.”
임윤서가 시크하게 대답하고는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탔고.
우리도 그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한 실장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지 않았다.
“됐어. 호텔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전화해.”
왜 저 말이 근처에 있을 테니까 허튼짓하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 걸까.
이번엔 허훈이 입을 열었다.
“어! 그럼 한 실장님. 어차피 호텔에 계실 거면 저랑 술이라도 한잔하실래요? 제가 들어오면서 아주 좋은 술을 사 왔습니다!”
걸려들어라.
계획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의 속마음이었다.
그러나 한 실장은 만만하지 않았다.
“됐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타지까지 왔으니 한 번은 튕길 줄 알았지.
그러나 우리는 이런 반응에도 대비했다.
“그래요? 음, 이번에 큰맘 먹고 산 건데, 혼자 먹어야 하나.”
이 과장이 궁금했는지 물었다.
“무슨 술인데요?”
“로얄 살루트 38년산이요. 다 같이 먹으려고 일부러 큰 거로 샀는데······.”
면세점에 팔길래 두 병을 사서 한 병을 허훈에게 건넸다.
당연히 그는 너무 좋아했고.
두 병을 산 이유는 단순했다.
나중에 38년 산은 단종돼서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 술이니 하나쯤 소장하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리고 한 실장이 반응했다.
“38년산이요?”
그러자 허훈이 아까부터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그에게 훅 들어 보였다.
“네! 술 안 좋아하세요?”